165. 시험 범위 (4)
‘흥미로운 얘기?’
수업 시간 중 공개적으로 밝힐 만한 근황이 무엇인지 당사자인 태주조차 궁금했다.
한 번씩 자신의 이름을 검색해 보긴 했지만, 별다른 기삿거리를 발견하지 못한 아침이었기 때문이다.
‘뭐가 있지?’
현실적으로 삼강 하베스트나 클로버 컨테이너에서 있었던 일들이 함 교수의 귀에 들어갈 가능성은 희박했다.
‘설마 인턴십 때문에 그러나?’
찰나의 추측을 마친 태주가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얼굴로 함 교수와 눈을 마주쳤다.
“1학년 주제에 여름 인턴십이라니.”
헛웃음과 함께 흘린 함 교수의 혼잣말이 모두의 시선을 태주에게 집중시켰다.
- “인턴십? 그거 3학년 이상만 하는 거 아니야?”
- “뭐, 그렇긴 한데, 이미 4학년 수업도 듣고 있어서.”
- “근데 그건 학교 차원의 내부적인 인정을 받은 거고, 이건 길드 차원의 대외적인 인정을 받은 거잖아.”
- “하긴, 길드에서 하는 인턴십에 한국대만 지원하는 건 아니니까.”
- “우와, 그럼 우리가 인턴십 할 때 태주는 뭘 해야 되는 거야?”
- “글쎄. 뭘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뭘 하든 우리보단 낫지 않을까?”
태주의 남다른 행보에 적응을 한 아이들도 있었지만, 앞서 재룡이 그랬듯 대다수의 동기들은 이른 감이 지나친 신입생의 인턴십 소식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수락할 거야? 듣자 하니 아직 구체적인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던데.”
누가 소식통인지에 대해선 따로 밝히지 않았지만, 현재의 진행 상황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앞으로의 논의 역시 함 교수의 귀에 들어갈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들으신 대로 아직 논의 중이라 지금으로선 확답을 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인턴십을 거부할 마음은 없었지만, 협상 테이블에 앉기도 전에 설레발을 치고 싶진 않았다.
“그래? 근데 조금은 들떠 보여도 괜찮지 않을까?”
태주의 신중한 대답을 들은 함 교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한 가지 조언을 건넸다.
“가만 보면 너무 덤덤해. 다른 녀석들 같았으면 벌써 목이 뻣뻣해졌을 텐데 말이야.”
첫 수업 직후, 겸손은 꼰대들 앞에서나 떨라는 말과 함께 본인의 수업에선 더 나대도 된다 했던 함 교수의 눈엔 자랑과는 거리가 먼 태주의 한결같은 태도가 오히려 실력을 숨기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흘려듣지 마. 때론 지나친 겸손이 기만보다 더 재수 없으니까.”
“네. 명심하겠습니다.”
물론 엄밀히 말해 실력을 숨긴다기보다 전력을 다할 필요성을 못 느낄 뿐이었지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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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안녕하세요.”
학과 사무실로 들어선 태주가 혼자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조교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어?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태주의 얼굴을 알아본 조교가 문자를 보낸 시각을 떠올리며 물었다.
“네. 강의가 좀 일찍 끝나서요.”
오늘도 어김없이 일찍 수업을 마무리 지은 함 교수였다.
“아아, 그러셨구나.”
책상 위에 놓인 서류 봉투 하나를 집어든 조교가 태주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습니다.”
안에 든 내용물을 다시 한번 확인한 조교가 태주의 앞으로 다가가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서류 봉투 겉면에 적힌 자신의 큼지막한 이름을 본 태주가 미소를 머금은 채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 그리고 오신 김에 새터 때 받은 상품도 받아 가실래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려던 조교가 사무실 한편에 보관 중인 보물찾기 선물을 바라보며 물었다.
“네. 같이 가져가겠습니다.”
애초에 두 번 걸음을 하기 싫었던 터라 족보가 준비되었을 때 함께 찾아갈 생각이었다.
“아, 그래요? 근데 종류도 많고 박스 부피도 커서 한 번엔 못 가져가실 거예요.”
개강총회 때 받은 한정판 과잠을 제외하고도 무려 9개의 상품이 탑처럼 쌓여 있었기 때문에 태주의 인벤토리 능력에 익숙지 않은 조교로선 충분히 조언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일단 이쪽으로 오세요.”
사무실 구석으로 앞장선 조교가 맨 위에 놓인 선물부터 차례대로 태주에게 전달했다.
“이건 지갑, 이건 이어폰, 와아, 하나같이 다 신상이네요? 백화점 상품권도 두둑하게 들어 있고.”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알찬 구성에 입이 떡 벌어진 조교가 태주를 부러운 눈빛으로 돌아보며 말했다.
“네. 그러네요.”
▶ 획득한 물품을 인벤토리에 넣으시겠습니까? (Y/N)
“이제부터 박스가 커지는…….”
운동화 박스를 두 손으로 들어 올린 조교가 물건을 넘겨받는 족족
인벤토리 안에 넣고 있는 태주의 모습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아, 제가 괜한 걱정을 했네요.”
멋쩍은 웃음을 보인 조교가 옆으로 한 발짝 물러나며 자리를 내어 주었다.
“아무래도 직접 챙기시는 게 빠르겠죠?”
“네. 뭐.”
▶ 획득한 물품을 인벤토리에 넣으시겠습니까? (Y/N)
제안을 받아들인 태주가 조교가 보는 앞에서 나머지 상품들을 순식간에 감춰 버렸다.
“와아, 소문대로 정말 남다르시네요.”
자신도 모르게 손뼉을 칠 뻔했던 조교가 거짓 없는 탄성을 내뱉으며 경이에 찬 눈빛을 보냈다.
“아닙니다. 그럼 전 이제 가 봐도 되죠?”
“네. 근데 가끔씩 여기로 태주 씨의 연락처를 묻는 전화가 오는데, 어떻게 할까요?”
“제 연락처를요? 누가요?”
“뭐, 신분을 밝히는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는데, 지금까진 그냥 알려드릴 수 없다고 했거든요.”
태주의 인기와 인지도가 나날이 상승하다 보니 여기저기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접촉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아, 네. 그럼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해주세요.”
인수다의 다이렉트 메시지나 윷튜브에 게시된 메일 주소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연락을 취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학과 사무실로 무작정 전화를 거는 이들에 대해선 크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
*
*
잠시 후.
빈 강의실에 자리 잡은 태주가 시험을 앞둔 과목들의 족보를 발췌해 천천히 훑어봤다.
[헌터의 역사 1학년 1학기 중간고사 (25~27기)]
제일 처음 확인한 것은 유일한 교재 수업인 헌터의 역사였다.
특히 25기부터 27기까지 출제된 3년 치의 기출문제가 빠짐없이 들어 있었는데, 객관식 없이 오직 주관식 단답형과 서술형 문제로만 채워져 있었다.
‘질문의 형식은 매년 바뀌는데 물어보는 부분은 똑같네.’
재능이 아닌 노력으로 경쟁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과목들 중 하나였기 때문에 회귀 전, 헌터사를 열심히 팠던 태주로선 문제의 키워드만으로도 출제 파트를 정확히 구분 지을 수 있었다.
[직업 탐구1 1학년 1학기 중간고사 (25~27기)]
헌터의 역사에 대한 분석을 마친 태주가 이번엔 직업 탐구1의 족보를 들여다봤다.
‘역시 클래스별 수업이라 그런지 분량이 많네.’
헌터의 역사와 달리 분반 수업으로 진행되다 보니 기출문제 역시 클래스별로 구분되어 있었다.
[궁수 클래스]
‘여기 있네.’
실기시험의 족보 역시 필기시험과 마찬가지로 시험 과제가 기술되어 있었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딱 떨어지는 정답 대신 고득점을 위한 팁들과 선배들의 응시 후기가 덧붙여져 있다는 것이었다.
‘뭐, 어차피 A0는 보장이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기대치라는 게 있으니까.’
이미 중간, 기말 점수와 관계없이 최소 A0의 성적을 보장받을 수 있는 클래스 리더에 선정된 태주였지만, 지금껏 선보인 압도적인 퍼포먼스에 비추어 봤을 때 당사자와 제삼자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는 불완전한 점수였다.
‘으음. 이것도 매년 평가하는 요소가 비슷하네.’
자신이 치른 28기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대조해 나가던 태주가 과제별 양상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을 본 시점을 비슷하지만, 아무래도 눈으로 바른 필기시험보단 몸으로 겪은 실기시험의 기억이 더 오래 남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레이드의 기초1 1학년 1학기 중간고사 (25~27기)]
‘그나마 이게 가장 문제인데.’
이번 시험의 복병이 될 레이드의 기초는 앞선 두 과목과 달리 응시 경험이 없었다.
물론 시험 자체를 안 본 건 아니었지만, 당시엔 97등으로 합격한 임세준처럼 C-라도 받자는 생각에 다형을 선택, 조금 전 고른 가형에 대해선 이렇다 할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아는 것부터 체크해야겠다.’
족보의 순서상 가형이 맨 위에 있었지만, 태주의 엄지는 계속 다음 장을 넘기고 있었다.
[다형]
결과적으로 가형을 지원했지만, 출제의 기조를 파악하기 위해선 오히려 응시 경험이 있는 다형 던전의 변화 양상을 바탕으로 가형 던전의 특징을 유추하는 접근이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다형의 출제 스타일이 비슷하면 가형도 마찬가지겠지.’
[시험 과제: 던전 클리어]
함 교수의 평소 성격에 걸맞게 가나다형 모두 시험 과제의 이름은 던전 클리어로 통일되어 있었다.
‘역시 후기랑 팁을 봐야겠네.’
아쉽게도 다형 던전을 클리어하진 못했지만, 고글을 벗기 전까지의 기억은 생생했기 때문에 선배들이 남긴 정보들을 토대로 해마다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 정도는 비교할 수 있었다.
‘뭐야, 후기만 놓고 보면 같은 던전에 들어간 거 같은데?’
놀랍게도 기수는 달랐지만, 다형 던전의 공략 팁과 응시 후기에 대한 내용들이 태주의 체험과 일치하고 있었다.
‘나형도 한번 볼까?’
다형의 검토를 마친 태주가 검산을 하는 마음으로 나형의 후기들을 살펴봤다.
‘어? 이것도 그러네?’
다형보다는 확실히 난이도가 느껴지는 평이었지만, 이 또한 매년 같은 내용의 공략 팁과 응시 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귀찮아서 매년 같은 던전을 내시나?’
물론 재수강자들에겐 희소식이었지만, 재수강의 경우 B+가 최고 점수였기 때문에 설령 앞선 경험을 바탕으로 가형 혹은 나형에서 맹활약을 한다 해도 최고 점수가 B인 다형을 고른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럼 가형도 똑같겠네.’
[가형]
마지막으로 가형의 족보를 확인한 태주가 공통적으로 보이는 흥미로운 주의사항을 발견했다.
‘으음?’
[초반에 몸 사린다고 뒤에 서면 습격당함. 중간이 베스트고 차선이 선두임.]
[후방에 빠져 있는 원딜들을 지켜야 중후반에 버틸 수 있음. 근데 원딜들은 초반을 넘기기가 어려움.]
[던전 곳곳에 구멍이 있는데 거기서 몬스터들이 튀어나옴. 단, 증강 현실이라 따로 막을 순 없음. 그냥 나오는 족족
잡아야 됨. 참고로 마지막 사람까지 다 지나간 다음에 뒤에서 튀어나옴.]
‘초반엔 무조건 뒤를 조심해야 되는구나.’
난이도가 높을수록 응시자의 적극성이 떨어지고 시야가 좁아진다는 것을 역이용한 함 교수의 의도적인 함정이었다.
물론 점수 보정 없이 A+를 받기 위한 주의 사항은 한 가지가 아니었지만.
[공벌레는 보이는 즉시 무조건 피해야 함. 학습 효과가 생기기도 전에 바로 아웃임.]
‘뭐? 공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