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시험 범위 (3)
[시험 시간]
[1. 가형: 오후 12시 (정오)]
[2. 나형: 오후 3시]
[3. 다형: 오전 9시]
문제 유형을 표시하고 있던 화면이 함 교수의 작은 움직임에 새로운 공지사항으로 전환됐다.
- “어? 시험 시간이 다 다르네?”
- “그러게. 딱히 가나다순도 아니야.”
가형 17명, 나형 48명, 그리고 다형 35명.
함 교수를 따라 대형 스크린을 바라본 학생들이 3시간 간격으로 배정된 독특한 응시 순서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 “뭐야, 교수님을 기준으로 모여 있는 위치가 시험 시간이랑 일치하는데? 정면엔 가형, 오른쪽엔 나형, 왼쪽엔 다형, 이렇게 12시, 3시, 9시로.”
- “어? 듣고 보니 그러네? 난 그냥 편의상 나누신 건 줄 알았는데.”
- “근데 오후 12시가 낮 12시를 얘기하는 거지? 점심 먹을 때.”
- “야, 그래서 아예 옆에 정오라고 써두셨잖아. 너처럼 한밤중에 나타나는 애들이 있을까 봐.”
사방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수군거림을 묵묵히 듣고 있던 함 교수가 입술을 떼기 전, 오른손을 반쯤 들어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 “…….”
급격히 식어버린 대화의 열기.
조용히 하라는 사인을 눈치챈 아이들의 목소리가 잦아들자 함 교수의 설명이 이어졌다.
“가나다형 모두 다른 던전으로 구성될 거야. 시험 시간을 달리한 건 정확한 평가를 하기 위함이고.”
선택과 집중.
트레이닝 돔의 규모상 세 가지 유형의 테스트를 동시에 진행할 수 있는 시스템은 이미 갖춰져 있었지만, 서로 다른 3개의 상황을, 그것도 화면상으로 보며 평가할 경우 놓치는 부분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학생들의 이의 제기나 점수의 추후 보정을 위해 테스트 과정 전체를 따로 녹화해두긴 했지만.
“참고로 응시 순서가 난이도랑 다르니까 둘 다 가나다순이라고 착각하지 마. 특히, 다형.”
함 교수가 자신의 왼편에 모여 있는 아이들을 돌아보며 주의를 강조했다.
“너희들은 착각하는 순간 응시 기회 박탈이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라.”
가형과 나형을 택한 경우 응시 순서가 ‘다가나’라 ‘가나다’로 착각해도 3시간 정도 일찍 도착한 것에 그치지만, 다형의 경우 6시간이나 지각한 것이 되어 0점 처리가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저, 교수님,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지난 시간의 교훈으로 질문을 하기 전, 함 교수의 허락부터 구하게 된 세준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며 물었다.
“말해.”
함 교수가 다형을 선택한 아이들 중에 섞여 있던 세준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다형을 아침 9시에 배정하신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분명 로우 리스크 로우 리턴이라고 하셔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응시 기회 박탈이라는 최악의 리스크는 다형에만 있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 억울해?”
“네? 아, 아니요. 저는 그냥…….”
다형을 택한 아이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질문이었지만, 함 교수의 싸늘한 반응에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세준이었다.
“말로는 로우 리스크라 선택했다고 했지만, 내 귀엔 노 리스크를 원한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노 리스크 로우 리턴. 아니야?”
“……?!”
정곡을 찌르는 함 교수의 날카로운 일침에 세준의 말문이 막혔다.
“왜. 위험 없이 이득만 보고 싶어? 초반에 뒤져도 C-가 나오니 가나를 택한 애들은 다 탐욕스러운 모지리들 같아?”
세준에게 집중되어 있던 함 교수의 시선이 어느덧 다형을 고른 아이들 전체에게로 확장됐다.
“글쎄. 내 눈엔 오히려 조금의 위험도 감수하지 않으려는 모습이 더 탐욕스럽게 비치는데?”
- “…….”
재수강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다형을 택했던 학생들이 반박할 수 없는 함 교수의 지적에 하나둘 시선을 떨어뜨렸다.
“단순하지만 지키기 어려운 것들을 우린 기본이라고 하지. 노 리스크 노 리턴. 잊지 마. 이게 바로 헌터의 기본이자 불변의 진리니까.”
평소, 의욕이 없어 보인다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함 교수지만, 4차 각성에 성공한 S급 법사인 만큼 헌터의 기본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자신 있게 단언할 수 있었다.
바로 그때.
“저, 교수님.”
침묵을 이어가던 세준이 다시금 손을 번쩍 들었다.
“왜. 내 말에 비약이 있는 거 같아?”
“아니요. 교수님의 말씀엔 저도 동의합니다.”
“그래? 그럼 이 타이밍에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자리를 바꾸고 싶습니다. 가형으로.”
함 교수의 가르침에 깨달음을 얻은 세준이 사뭇 비장해진 얼굴로 뜻밖의 요청을 했다.
“진심이야?”
“네.”
“입시 때 몇 등으로 붙었지?”
“97등이었습니다.”
“그래? 그럼 그냥 거기 있어.”
“네?”
“이해력이 떨어져? C-도 안 되는 실력이면 그냥 그 자리에 잠자코 있으라고. 괜히 객기 부리다가 F 뜨지 말고.”
“……?!”
도전에 대한 칭찬을 기대했던 세준이 싸늘하다 못해 냉정한 함 교수의 쓴소리에 또 한 번 할 말을 잃었다.
“혹시라도 임세준과 같은 녀석들이 있을까 봐 미리 얘기하는데, 내 말은 리스크 없는 레이드가 없다는 뜻이지 감당하지도 못할 과도한 리스크를 부담하라는 게 아니야.”
자신의 의도가 다른 방향으로 전달되었음을 인지한 함 교수가 미간을 찌푸리며 꾸짖듯이 말했다.
“자신의 객관적인 수준에 맞는 무난한 던전을 골라야지 남의 눈을 의식해서, 혹은 남 보기에 조금 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무모한 던전을 고르는 건 용기 있는 도전이 아니라 무지에서 비롯된 객기라고.”
- “네.”
세준을 따라 충동적으로 자리를 옮기려 했던 다형의 아이들이 함 교수의 현실적인 조언에 이성을 되찾으며 대답했다.
물론 다형은 아니었지만, 모 아니면 도라는 심정으로 무리하게 가형을 택한 일부 학생들도 함 교수의 말에 깨달은 바가 있었지만.
“그리고 응시 순서 갖고 불평하지 마. 상대적인 난이도가 낮은 만큼 다른 유형의 지원자들에 비해 몸풀기 시간을 줄인 거니까.”
왜곡된 접근을 바로잡은 함 교수가 세준의 첫 질문에 대한 답을 마지막에 덧붙였다.
“어? 그럼 가형은 왜 12시입니까? 난이도에 따라 몸풀기 시간을 주실 거면, 오히려 가형과 나형이 바뀌어야 될 것 같은데.”
가형을 고른 피크닉의 신입 부원 금서윤이 합리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왜냐고? 이상하게 난 그 시간만 되면 예민해지거든.”
정면에서 마주 보던 서윤의 질문에 함 교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서윤이 까다로운 심사를 예고하는 함 교수의 독특한 성향에 두 귀를 의심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A+를 받을 수 있는데, 그 정도 각오는 해야지.”
- “……?!”
순간, 가형을 고른 학생들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옆 사람의 얼굴을 쳐다봤다.
- “이거 이러다 몇 명 빼고 다 F 뜨는 거 아니야?”
일반적으로 학기가 끝나기 전까진 학점이 정해지지 않으며, 중간, 기말 등의 세부 점수는 별도의 사유가 없는 한 공개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헌터학과의 경우 교수의 재량에 따라, 그리고 수업의 방식에 따라 테스트의 점수를 학생들에게 알려 경쟁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 “아아, 괜히 가형으로 왔네.”
- “지금이라도 나형으로 가면 안 되나? 교수님 말씀대로 무모한 도전은 객기지만, 실력에 맞게 하향 지원하는 건 오히려 권장하셨잖아.”
- “야, 되겠냐? 아마 실제 던전에서도 유턴할 거냐고 오지게 혼날걸?”
- “하아. 그런가? 그럼 그냥 기말이나 노릴까?”
자신의 선택을 자책하던 가형의 학생들이 후일을 도모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대체 얼마나 예민해지신다는 거지?”
피크닉의 멤버이자 A급 무투가인 황건우가 곁에 있던 태주에게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글쎄.”
회귀 전, 다형을 택했던 태주가 가형을 심사할 당시에 보여준 예민함의 정도에 대해 온전히 알 순 없었지만, 해당 과목의 족보가 이미 확보된 상태였고, 얼마 전 있었던 빌런 찾기 테스트 직후, 앞으로 이루어질 모든 테스트에서 동등하고 공정한 기준을 적용해 달라 했던 태주의 요구도 이미 수락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나마 높은 기대치를 바탕으로 한 함 교수의 까다로운 평가 기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된 태주였다,
바로 그때.
- “저, 교수님. 근데 전 수요일에 교양 수업이 하나 있어서 3시에 못 볼 것 같은데요?”
나형을 고른 한 학생이 난처한 얼굴로 질문을 하자 같은 고민에 빠져 있던 아이들이 곳곳에서 입을 모으기 시작했다.
- “교수님, 저도요.”
- “전 3시가 아니라 9시에 교양 수업이 있어서…….”
콘텐츠 제작의 이해처럼 다른 학과의 교양 수업을 듣는 경우, 특히 해당 강의가 시간표상 레이드의 기초와 같은 수요일에 배정된 경우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물론 베테랑인 함 교수가 그 정도 변수도 고려하지 못했을 리 만무했다.
“내가 언제 수요일에 본다고 했지?”
- “……?!”
테스트의 유경험자인 태주를 제외한 모든 아이들이 함 교수의 생각지도 못한 답변에 일순간 굳어버렸다.
“시험은 토요일에 볼 거야. 다음주 토요일에.”
- “……?!”
공식적인 중간고사 기간은 다다음 주 월요일부터였지만, 함 교수가 발표한 시험일은 그보다 4일이나 앞선 주말이었다.
- “뭐야, 그럼 학교를 토요일에도 나와야 되는 거야?”
- “아아, 나 그때 친구들이랑 제주도 가기로 했는데.”
- “야, 여행? 난 아침 9시 시험이라 금요일에 술도 못 마셔.”
- “교수님, 그냥 수요일에 보면 안 돼요?”
예상대로 스케줄이 어긋난 학생들의 불만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뭐지 이 앵앵거리는 소리는? 설마 교수의 재량권에 도전하는 거야?”
물론 그렇다고 해서 뜻을 굽힐 함 교수가 아니었지만.
“여기가 지금 주 5일 수업을 지키는 고등학교야? 왜. 주말에 시험을 보거나 보강을 하면 막 손해를 보는 거 같아?”
- “…….”
볼멘소리를 하던 아이들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함 교수의 지적에 조용히 입을 닫았다.
“대신 앞으로 2주간, 그러니까 다음주 수요일하고, 다다음 주 시험 기간엔 휴강을 할 거니까 한 번만 더 주말에 불렀다고 투덜대면, 12시가 아니라, 9시랑 3시에도 상당히 예민해져 있을 거야. 알았어?”
- “네.”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한 아이들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마지못해 대답했다.
바로 그때.
“아 참, 그리고 신태주 너.”
“네.”
“내가 오늘 아침에 아주 흥미로운 얘기를 하나 들었는데 말이야.”
시험 일정을 둘러싼 논란을 잠재운 함 교수가 가형에 있던 태주를 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