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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 신입생이 되었다-157화 (157/242)

157. 사설 금고 (2)

잠시 후.

언제부터 운행이 중단된 건지도 알 수 없는 노후화된 엘리베이터 대신 튼튼한 두 다리를 택한 태주와 염 기사가 한 줄로 묵묵히 계단을 올랐다.

“태주 씨.”

두 계단 정도 앞서가던 염 기사가 뒤를 돌아보거나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태주의 이름을 불렀다.

“네.”

“부럽습니다.”

“네?”

밑도 끝도 없는 고백에 잠시 말문이 막혔던 태주가 염 기사의 등을 올려다보며 이유를 물었다.

“뭐가 말입니까?”

물론 20대의 젊음, 압도적인 능력, 사람들의 관심, 창창한 미래 등 예상 가능한 답변들은 많았지만, 회귀 전, 누군가의 부러움을 샀던 기억이 전무했던 터라 여전히 칭찬이나 적극적인 팬심에 적응하려 노력하고 있는 태주였다.

“하하. 뭐부터 말씀드려야 될까요?”

4층에 먼저 다다른 염 기사가 올라오는 내내 등을 지고 있던 태주를 돌아보며 흥미롭게 웃었다.

“태주 씨에 대해 정리된 위키 페이지를 보다 인벤토리 능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용자들이 공동 문서의 형태로 내용을 추가할 수 있는 위키 페이지의 경우, 특히 헌터 개개인과 관련된 표제어의 경우 프로의 자격을 갖춘 네임드의 이름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태주처럼 학부생의 신분으로 등록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런 능력이 있으면, 이런 곳에 올 이유가 없겠죠? 매달 보관료를 지불할 필요도 없고요.”

“네. 뭐.”

“아, 그리고 순간 이동도 하고, 화살도 바로바로 생성할 수 있다던데 전부 사실입니까?”

“네.”

“어? 그럼 제자리에서 몇 미터씩 이동할 수 있으니까 평소엔 지금처럼 걸어 다니실 일이 없겠네요?”

“아니요. 그건 좀.”

“아, 그런 능력들은 꼭 필요할 때만 사용하시는군요.”

“네.”

취조는 아니었지만, 본의 아니게 ‘네, 아니요’로만 대답할 수 있는 확인 형식의 질문들이 이어졌다.

‘이런 건 다 누가 정리해서 올리는 거지?’

위키 페이지에 이름이 등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가끔 자신에 대한 일화나 기사의 내용이 실시간으로 추가되는 것을 보면 신기하다 못해 놀라울 따름이었다.

“자, 이쪽으로 오시죠.”

“네.”

미로처럼 생긴 복도로 들어선 태주가 양옆으로 늘어선 문들을 곁눈질하며 염 기사의 안내를 받았다.

“저, 근데 거기에 나와 있는 능력이 태주 씨의 전부입니까?”

“……?!”

무난한 질문들의 연속에 기계적으로 대답하고 있던 태주가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드는 염 기사의 합리적인 의심에 마른침을 삼켰다.

“제가 그 입장이면, 남들 모르게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은 끝까지 비밀로 해둘 것 같아서요. 물론 순간 이동처럼 눈에 보이는 능력만 있으면 어쩔 수 없겠지만.”

“네. 아쉽게도 몰래몰래 쓸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갈수록 느는 연기력으로 염 기사가 제기한 의혹을 딱 잡아뗀 태주가 헛웃음을 지으며 아쉬운 척을 했다.

물론 염 기사의 가정대로 도발, 저항, 간파, 체이싱 애로우 등 타인이 눈치챌 수 없는 스킬과 보정 화살을 이미 보유하고 있었지만.

“으음. 그렇군요.”

태주의 대답을 들은 염 기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믿는 거야 안 믿는 거야?’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적지근한 반응에 개운치 않은 마음이 들었지만, 당사자가 직접 부정한 이상 그 어떤 합리적인 의심도 결국 의심으로밖에 남을 수 없었다.

“그럼 태주 씨의 꿈은 뭡니까?”

“꿈이요?”

앞선 상황과 마찬가지로 능력에 대한 질문은 심심치 않게 받아봤지만, 의외로 꿈이나 목표에 대해 묻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글쎄요. 따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제 나이 땐 보통 졸업과 동시에 프로 테스트를 통과해서 좋은 길드에 취업하는 거 아닐까요?”

7차 각성자 등극, 블랙홀 게이트 클리어, 재앙 등급 아티팩트의 사용 등 매직 아처가 됐을 때처럼 인류 최초란 수식어가 붙게 될 목표들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굳이 염 기사와 공유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역시 무난한 대답으로 질문자의 맥을 빠지게 만드는 태주였다.

“그야 그렇지만, 그래도 출발선이 다르니 결승선의 위치도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태주의 의도대로 거창한 포부를 기대했던 염 기사의 목소리에선 허탈함이 느껴졌다.

“아시잖아요. 평범하게 사는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는 거.”

“……?!”

인터뷰를 방불케 하는 질문 공세를 요리조리 피해 가던 태주가 처음으로 염 기사의 말문을 막았다.

“으음. 돌이켜 보니 그러네요. 사실 이 나이쯤 되면 누구나 가정도 꾸리고, 태주 씨 또래의 자식도 한두 명 있을 줄 알았거든요. 뭐, 제 상황이 어떤지는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아무튼 우문현답이십니다.”

자신에게 노총각이라 했던 민정의 말이 사실이었음을 인정한 염 기사가 주름처럼 굴곡진 인생의 그래프를 머릿속으로 그려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자, 여기입니다.”

[407호]

걸음을 멈춘 염 기사가 문에 붙은 호수판을 시선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카드는 이곳에 갖다 대시면 됩니다.”

“네.”

▶ 열쇠가 감지되었습니다.

▶ 분석을 시작합니다.

▶ 열쇠의 모양과 일치하는 잠금장치가 발견되었습니다.

인벤토리에 보관 중이던 카트키를 꺼내자 손에 쥔 카드키에서 레이저처럼 뻗어 나온 붉은빛이 도어 록까지 이어졌다.

▶ 잠금장치의 위치를 표시합니다.

띠리릭!

▶ 잠금장치가 해제되었습니다.

염 기사의 지시대로 도어 록의 표면에 카드를 밀착시키자 카드에서 발산되던 붉은빛이 초록색으로 바뀌며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 『혼돈의 입구 (0/4)』로 연결된 곳이 아닙니다.

잠금장치가 풀릴 때마다 떠오르는 의문의 메시지.

▶ 위치 표시를 종료합니다.

‘진짜 볼 때마다 혼돈 그 자체네.’

관련이 있을 법한 논문과 사료들을 열심히 뒤져봤음에도 불구하고, 혼돈의 입구에 대한 위치 정보는커녕 열쇠 역할을 해줄 아티팩트에 대한 최소한의 실마리조차 확보하지 못한 태주였다.

“들어가시죠.”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풀리자 잠시 옆으로 물러나 있던 염 기사가 뒷좌석에 오를 때처럼 손수 문을 열어주었다.

“네. 근데 신발은 벗고 들어가야 되나요?”

현관에 들어선 태주가 카드키를 돌려주며 물었다.

물론 주거지가 아닌 창고의 용도로 사용되곤 있었지만, 한국인의 특성상 신발을 신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건 익숙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래는 그렇지만, 오늘만큼은 방바닥보다 신발 밑창이 더 깨끗할 것 같습니다.”

자신의 구두 밑바닥을 슬쩍 확인한 염 기사가 시범을 보이듯 집 안으로 앞장섰다.

“아이고, 먼지 봐라 이거.”

분주하게 불을 켜고 다니던 염 기사가 어둠 속에 감쳐져 있던 소복한 먼지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청소라도 좀 해놓고 모실 걸 그랬습니다.”

오랫동안 방치해둔 터라 집 안 곳곳에서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흔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

물론 청소 여부와 상관없이 염 기사의 컬렉션을 스캔하는 태주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물건은 거실 말고 방에도 있으니까 천천히 둘러보시고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근데 물건이 워낙 많아서 뭐가 좋을지 모르겠네요.”

가장 비싼, 혹은 가장 희소성 있는 아이템을 얻고 싶었던 태주가 소유자의 추천을 구하는 뉘앙스를 풍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음. 물건의 양도 양이지만, 아마 두서없이 놓여 있어서 더 엄두가 안 나실 겁니다.”

뒤늦게 환기를 시키고 있던 염 기사가 안개처럼 피어오른 먼지 속에서 입을 가린 채 말했다.

“어디 보자. 이건 내가 100번째 레이드 기념으로 샀던 롱소드고, 이건 내 첫 번째 사수한테 받았던 흉갑, 그리고 이건 의뢰인이 감사의 의미로 선물한 한정판 장갑, 그리고 이건…….”

추천자로서의 본분을 잊은 채 추억에 빠져 버린 염 기사가 거실에 놓인 소장품들을 한 번씩 매만지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러다 날 새겠네.’

염 기사의 기억력 테스트나 하러 온 것이 아닌 태주가 더 이상의 시간 낭비를 막기 위해 눈치 아닌 눈치를 주었다.

“기사님.”

“이야, 이건 내가 제주도 레이드 때……. 예? 아 참,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죄송합니다. 너무 오랜만에 오다 보니 그만 옛날 생각이 나서…….”

태주의 부름에 흠칫 놀란 염 기사가 손바닥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멋쩍게 웃었다.

“그건 그렇고, 혹시 생각해둔 카테고리가 있으십니까? 예를 들면, 무기나 방어구처럼 포괄적인 개념으로요.”

“어어, 카테고리까진 아니지만, 물건 하나하나에 얽힌 잊지 못할 사연들을 듣다 보니 문득, 그중에서도 가장 애착이 가고,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최고의 애장품이 무엇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으음. 최고의 애장품이라……. 설마 작은 성의 표시의 대가로 그걸 원하시는 건 아니시죠?”

태주의 대답을 들은 염 기사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그저 단순한 호기심에 물어본 겁니다. 선택의 범위를 제안하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질문이라 생각했고요.”

노골적인 질문인 만큼 의심을 받을 것이란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염 기사의 반문에도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차분하게 자신을 변호하는 태주였다.

“하하.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실 여기 오기 전부터 이미 제일 아끼는 녀석으로 보여 드릴 생각이었거든요.”

농담이었음을 밝힌 염 기사가 갑자기 화장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 거긴 방이 아니라 화장실인……. 어? 설마 중요한 물건일수록 그렇지 못한 장소에 숨겨둔 건가? 혹시 모를 도둑들의 침입에 대비해서?’

태주가 염 기사의 움직임에 의미를 부여하며 의도를 넘겨짚던 바로 그때.

“저 죄송한데, 잠시 볼일 좀 보고 오겠습니다.”

“네?”

“사실 아까 전부터 가고 싶었는데, 자꾸 타이밍을 놓쳐서…….”

“아아, 네……. 얼른 다녀오세요.”

화장실로 가는 길을 막고 있던 태주가 황급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예, 그럼 실례 좀 하겠습니다.”

걸음을 재촉하는 염 기사의 다급한 뒷모습을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던 태주가 문 너머로 들려올 민망한 소리를 피해 안방으로 향했다.

‘하긴, 훔쳐 간 물건을 이웃 나라까지 쫓아가서 회수해 주는 사람이 있는데, 뭐 하러 화장실 같은데 숨기겠어.’

소리 없는 실소를 터뜨린 태주가 안방으로 들어서던 바로 그때.

지이잉!

진동으로 해둔 태주의 휴대폰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송기철 협회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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