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사설 금고 (1)
“이게 뭡니까? 이름까지 찍혀 있는 걸 보면 꽤나 중요한 카드 같은데.”
플라스틱 소재의 낡은 카드엔 클로버 컨테이너란 업체명과 함께 염 기사의 본명인 염경섭이 새겨져 있었다.
“비밀을 지켜주신다는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드리는 작은 성의 표시입니다.”
룸미러로 마주친 염 기사의 눈빛에선 이미 태주에 대한 경계심이 사라져 있었다.
“입막음의 대가를 지불하는 건 기사님이 가장 경멸하는 피크닉의 특기 아닙니까?”
“하하. 듣고 보니 또 그러네요.”
염 기사가 태주의 가벼운 농담에 실소를 터뜨렸다.
“그럼 작은 성의 표시의 명분을 입막음이 아닌 동맹으로 바꾸는 건 어떠십니까?”
“동맹이라……. 글쎄요. 동맹은 너무 거창하니까 가볍게 동행 정도로 해두죠. 재룡이의 정신 건강을 위한 일시적인 동행.”
염 기사의 고백에 오해도 풀렸고, 재룡이와의 친분도 쭉 이어갈 참이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원만해진 분위기에 휩쓸려 부담스러운 관계를 맺고 싶진 않았다.
“네. 동행도 좋습니다. 뭐, 일시적이라는 수식어가 좀 마음에 걸리지만.”
침묵의 강제력이 약해진 것까진 흔쾌히 양보했지만, 영속적인 동행이 아니라는 점에선 약간의 아쉬움을 드러낸 염 기사였다.
“동맹은 동행에 비해 계산적인 느낌이 강해서 배제한 거고, 일시적이란 표현은 재룡이가 진실을 알게 될 때까지라는 의미가 내포된 거니까 제 말을 단순히 책임의 측면에서만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세요.”
“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한결 마음이 놓이네요.”
본심을 숨긴 태주의 그럴듯한 해명에 넘어간 염 기사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카드의 정체에 대해 설명했다.
“아, 그리고 그건 사설 금고의 출입증이자 열쇠입니다. 흔히들 카드키라고 하죠.”
‘사설 금고?’
헌터들이 사설 금고를 이용하는 목적은 다양했지만, 매달 만만치 않은 보관료를 지불해야 하는 만큼 개인적인 의미가 있거나 객관적인 가치가 높은 물건들을 위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도 시시한 선물은 아닌가 보네.’
창고에나 처박아 둘 물건을 주려는 건 아니라고 판단한 태주가 기분 좋은 기대감에 휩싸였다.
‘그나저나 클로버 컨테이너가 어디지?’
업체의 수가 워낙 많기도 했지만, 회귀 전, 사설 금고를 이용할 만큼의 중요한 물건도, 보관료를 부담할 만큼의 여유도 없던 태주로선 생소할 수밖에 없는 영역이었다.
“설마 저에게 사설 금고를 공개하겠다는 겁니까?”
“운전대가 아닌 칼자루를 잡던 시절에 애용하던 곳인데, 혹시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동맹, 아니, 동행의 의미로 하나 드리겠습니다.”
“선물을 꼭 받겠다는 건 아니지만, 기사가 아닌 전사 시절의 발자취가 보고 싶긴 하네요.”
태주는 돈이 되는 일이라면 불법적인 의뢰도 불사하는 머니 길드의 수장 출신인 염 기사의 컬렉션이 문득 궁금해졌다.
“그럼 지금 바로 가보시겠습니까?”
“지금요?”
갑작스러운 제안이긴 했지만, 별다른 약속 없이 집으로 향하던 터라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혼자 가는 게 편하긴 한데, 그러다 숨은 진주를 놓치면 또 아까울 거 같고.’
물론 아티팩트의 분석 능력만 믿고 혼자 가는 게 이득인지 아님, 소장품의 희소성과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아는 염 기사의 사연과 설명을 들으면서 선물을 고르는 게 이득인지는 좀 더 고민해 봐야 할 문제였지만.
‘잠깐. 말로는 하나만 주겠다고 했지만, 같이 가서 보다 보면 오히려 생기는 게 더 많지 않을까? 옥석을 가려내기에도 훨씬 수월하고.’
덤을 기대해 볼 수 있는 선택지로 마음을 굳힌 태주가 고민 끝에 수락의 의사를 밝혔다.
“으음. 네. 가겠습니다.”
“어? 정말 괜찮으십니까? 혹시 힘드시면 다음번에 혼자…….”
“아니요. 같이 가겠습니다.”
“아, 그러십니까? 그럼 동행을 허락하신 걸로 알고 경로를 수정하겠습니다.”
태주의 뜻을 재차 확인한 염 기사가 내비게이션의 도움 없이 머릿속에 있는 약도를 따라 차선을 변경했다.
*
*
*
잠시 후.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재건축이 시급해 보이는 어느 오래된 아파트였다.
“설마 여깁니까?”
직사각형으로 높게 솟아 있는 여느 아파트들과 달리 해당 아파트는 큐브를 세워놓은 것 같은 정사각형의 형태로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금고치고는 좀 크죠?”
입구에 다다른 염 기사가 아파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파트 전체를 금고처럼 사용해서 그렇습니다. 마치 남의 집에 세 들어 사는 것처럼 주거 목적으로 사용되던 공간을 위탁자가 빌리는 형식이죠.”
“근데 겉보기엔 별로 안전해 보이지 않네요. 모름지기 금고는 보안이 생명인데.”
비테론의 성문도 단숨에 돌파했던 태주의 눈엔 비가 올 때나 물 구경을 해본 듯한 얼룩진 창문과 저층에만 설치된 방범창이 영 미덥지 않았다.
“네. 아주 정확히 보셨습니다.”
“네?”
잠시나마 보안에 취약해 보이는 첫인상과 달리 침입자의 방심을 역이용한 대비책이 마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태주가 반전이 없는 염 기사의 빠른 인정에 두 귀를 의심했다.
“근데 왜 이런 곳을 사설 금고로…….”
염 기사의 성의 표시에 대한 기대감이 하락한 태주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사실 이곳의 진가는 물건이 도난당한 이후부터 발휘되거든요.”
“네? 그건 또 무슨.”
염 기사의 의미심장한 미소만큼이나 와닿지 않는 클로버 컨테이너의 독특한 보안 시스템에 태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클로버 컨테이너의 대표가 어쌔신인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훔쳐 간 물건을 회수하지 못한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바다를 건넌 장물을 찾아 이웃 나라까지 쫓아간 일화도 있고요.”
“으음. 뭔가 대단하긴 한데, 상당히 피곤한 방법이네요. 차라리 보안 시설의 확충에 투자했으면, 몸도 편하고, 손님들도 안심했을 텐데.”
태주는 사지가 고달플 수밖에 없는 사설 금고 대표의 비효율적인 일 처리 방식에 크게 공감하지 못했다.
“뭐, 그렇긴 하지만, 한편으론 다른 사설 금고들에 비해 운영비가 적게 들어 보관비가 저렴합니다. 주인장이 독종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도둑들의 발걸음도 뚝 끊겼고요.”
태주의 우려와 달리 클로버 컨테이너의 오랜 고객인 염 기사의 입에선 칭찬이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대표의 책임감에 높은 점수를 주는 이들이 많아 지금은 공실을 구하기도 어려운 상태입니다. 솔직히 분실과 동시에 보험사부터 운운하는 업체들을 보면 정이 떨어지기도 하고요.”
“하기야 피해자의 입장에선 경찰만 부르고 나 몰라라 하는 업체보다 직접 발 벗고 나서는 대표에게 더 호감을 느끼겠네요.”
설득에 가까운 설명을 듣고 있던 태주가 갸웃했던 고개를 처음으로 끄덕였다.
“그럼 여긴 외관만 빼면 단점이 없는 겁니까?”
강렬한 첫인상에서 비롯된 선입견을 버린 태주가 조금의 빈정거림도 없이 진지하게 물었다.
“아니요. 있습니다. 그저 장점으로 위안을 삼고 감수하는 것뿐이지.”
이번에도 역시 보안상의 허점을 논할 때처럼 빠르게 단점을 인정하는 염 기사였다.
“가시죠.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공동 현관의 문을 활짝 연 염 기사가 어두컴컴한 복도를 익숙한 발걸음으로 나아갔다.
“문이 그냥 열려 있네요? 딱히 지키는 사람도 없는 것 같고.”
구조상 대낮임에도 볕이 잘 들지 않아 안으로 들어갈수록 습기를 머금은 서늘함이 진하게 감돌았다.
“그래도 CCTV까지 없는 건 아니니 곧 마중을 나올 겁니다.”
나란히 복도를 걷던 염 기사가 천장에 설치된 감시카메라를 향해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아 참, 그리고 차에서 기다리는 동안 태주 씨에 대해 검색을 좀 해봤습니다. 덕분에 현 업계에서,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얼마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됐고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전 태주 씨 나이에 술이나 퍼먹고 다녔는데.”
지하 주차장에서 뒷조사 아닌 뒷조사를 하며 시간을 보낸 염 기사가 때아닌 칭찬으로 태주를 쑥스럽게 만들었다.
“아니요. 솔직히 그 정도까진 아닙니다.”
늘 그렇듯 겸허한 대답으로 손사래를 대신한 태주가 어색한 미소를 짓던 바로 그때.
“아니, 이게 대체 얼마 만이야?”
맞은편 복도에서 나타난 한 여인이 염 기사의 방문에 반색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설마 저분이 대표님은 아니겠지?’
4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여성의 외모에선 도둑들을 얼씬도 못 하게 만든다는 독종의 이미지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뭐, 어쌔신에 남녀 구분이 있는 건 아니지만, 딱 봐도 여장부 스타일은 아닌 거 같은……. 으음?!’
의문의 여성과의 거리를 좁혀가던 태주가 염 기사에 버금가는 심상치 않은 마력을 감지하는 순간, 일방적인 추측을 멈췄다.
“원래 헬스장도 그렇고 매일 와서 귀찮게 하는 손님보다 끊어만 놓고 안 오는 손님이 더 반가운 거 몰라?”
대화의 양상만 봐도 하루 이틀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란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하긴, 매달 꽂히는 월세가 곧 안부 인사이긴 하지. 아무튼 잘 왔어. 근데 이쪽은 누구? 아저씨가 모시던 도련님은 아닌 거 같은데.”
염 기사와 격의 없는 농담을 주고받던 여성이 초면인 태주에게 관심을 보였다.
“인사해. 너도 아는 분이니까.”
“나도 안다고? 으음. 어디 보자. 그러고 보니까 어디서 본 거 같긴 한……. 어?! 설마 세계 최초의 매직 아처, 신태주?!”
염 기사의 소개에 긴가민가한 눈빛을 보내던 여성이 예리한 눈썰미로 태주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신태주라고 합니다.”
“어머. 어떻게 이런 누추한 곳까지……. 아무튼 반가워요. 전 클로버 컨테이너의 대표 유민정이에요. 호칭은 본인 입에 붙는 거로 편하게 하시면 되고요.”
오른손을 바지에 닦은 유 대표가 가식 없는 미소와 함께 악수를 청했다.
“아, 네.”
손을 맞잡은 태주가 민정의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굳은살에 또 한 번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느꼈다.
“근데 이런 전도유망한 청년이 어떻게 경섭이 아저씨랑 같이…….”
악수를 나누던 민정이 태주와 염 기사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거참, 말을 섭섭하게 하네.”
“아니. 아무리 봐도 접점이 안 보이잖아. 나이도 아들뻘이고.”
“그냥 내가 모시고 있는 도련님의 친구분이라는 것만 알아둬.”
민정과 티격태격하던 염 기사가 시시콜콜한 설명을 생략한 채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건 그렇고, 내 짐들은 잘 있지?”
“말했잖아. 월세만 안 밀리면 대대손손 책임진다고. 뭐, 아저씨 같은 노총각한테 할 소린 아니지만.”
“거 왜 쓸데없는 소리를……. 태주 씨, 그만 가시죠.”
민정의 짓궂은 장난에 귀까지 빨개진 염 기사가 태주의 눈치를 보며 방이 있는 곳으로 앞장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