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초대 (5)
“이거네.”
하도철 대표가 내민 것은 누군가의 명함이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대각선으로 빨간 줄이 그어져 있다는 정도?
물론 디자인을 위한 프린트가 아닌 추후에, 그것도 매직으로 거칠게 그어진 불길한 느낌의 사선이었다.
“네.”
명함을 받아든 태주가 두 가지 사실에 흠칫했다.
“……?!”
바로 아레나 길드의 명함이라는 것과 명함의 주인이 입학시험 당시, 태주에게 지는 바람에 길드에서 쫓겨났다던 2차 각성 S급 궁수 정진천이라는 것.
‘이건 또 무슨 뜻이지?’
이동규로부터 명함이 아닌 수수께끼를 받아든 심정이 된 태주가 빨간 줄에 대한 해석을 나중으로 미룬 채 선약에 집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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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명함이?”
자신이 건넨 명함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목격한 하 대표가 태주의 얼굴과 손을 번갈아 바라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뭘 명함 하나 가지고 놀라세요. 평소엔 1000페이지가 넘는 전공 서적도 아무렇지 않게 집어넣는데.”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재룡이 태주의 인벤토리 능력에 놀란 아버지에게 자랑하듯이 말했다.
“너는 저런 거 안 되냐?”
물론 잘난 친구가 때론 자랑거리가 아닌 부모의 기대감만 높이는 독이 될 때도 있었지만.
“아니, 지금 절 누구랑 비교하시는 거예요.”
비각성자인 아버지의 마음에 대해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태주의 능력들은 재룡이 함부로 넘볼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그건 그렇고, 무슨 명함인데 그렇게 섬뜩하게 생겼어?”
아버지의 관심이 부담스러웠던 재룡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며 물었다.
“아까 보니 정진천이라고 쓰여 있던데, 혹시 아는 사람인가?”
이 대표의 심부름꾼 역할만 했을 뿐 명함에 얽힌 의미에 대해선 따로 전달받지 못한 하 대표가 태주의 대답을 가로채며 개인적인 궁금증을 덧붙였다.
“어? 정진천이면 너랑 몬스터 웨이브 때 붙었던 그 프로 헌터 아니야?”
이번엔 아버지에 이어 아들이 태주의 대답을 가로챘다.
“어. 맞아.”
“근데 갑자기 그 사람 명함은 왜 줬지? 분명 그 사건을 마지막으로 길드에서 쫓겨났다 들었는데.”
신입생도 아닌 응시생의 신분으로 무려 아레나 소속의 프로 헌터를 압도한 이례적인 사건이라 현장에 있던 재룡에겐 아직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게.”
순간, 태주를 원망하며 퇴사했다는 이 대표의 말이 불현듯 스쳐 갔다.
‘궁금하면 찾아오라는 건가?’
하 씨 부자만큼이나 명함의 의미에 대해 궁금했던 태주가 회장실을 나서기 전,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는 말과 함께 아레나에서의 만남을 기약했던 이 대표의 청을 떠올렸다.
‘아니지. 연락을 기다리겠다고 한 쪽은 나니까 별다른 액션이 없으면 알아서 전화하겠지.’
하 대표와의 관계에서도 알 수 있듯 상대가 원하는 것을 미끼로 주도권을 쥐고 흔드는 것에 능한 이 대표라 섣부른 처신으로 조급함을 드러내고 싶진 않았다.
“어?! 설마 그 사람이 너한테 복수할 수 있다는 걸 미리 경고해주는 건가?”
좋지 못한 예감에 휩싸인 재룡이 심각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뭐야, 반응이 너무 덤덤한 거 아니야? 그러다 진짜 무슨 일이라도 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일찍이 납치와 폭탄 테러 등 끔찍한 경험을 한 바 있는 재룡의 눈엔 태주의 태연한 태도가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으면, 이렇게 명함만 주고 가지 않았겠지. 그것도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서.”
태주의 말대로 매달 200만 원이란 적지 않은 투자를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관행에 어긋나는 1학년의 여름 인턴십까지 협회장에게 직접 제안할 만큼 영입에 공을 들이고 있는 이 대표가 태주를 둘러싼 위협을 모른 척할 리 없었다.
“더구나 그때의 앙금으로 복수를 계획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업계와 대중으로부터 더 큰 비난을 받게 될 텐데 뭐 하러 경솔하게 뒤끝을 부리겠어. 무슨 빌런도 아니고.”
“으음. 듣고 보니 또 그러네.”
잠시 흥분을 감추지 못했던 재룡이 태주의 설득력 있는 주장에 수긍의 고갯짓을 했다.
“아무튼 원한을 품은 상대는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법이니까 웬만하면 혼자 다니지 말고, 해 떨어지기 전에 일찍 일찍 들어가. 상대가 궁수라는 건 스나이퍼처럼 언제 어디서 널 노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무려 12년간 밀착 경호를 받았던 재룡이 경험에서 우러난 당부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 걱정해줘서 고마워.”
자신의 몸은 자신이 건사해야 했던 1회차 인생과 달리 새롭게 얻은 두 번째 기회에선 과분하다고 느껴질 만큼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는 태주였다.
“하하. 이거 아주 낯간지럽게 훈훈한 그림이구먼.”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하 대표가 손바닥으로 무릎을 내리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이 녀석 말대로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거라.”
태주가 재룡에게 베푼 호의와 자비를 잊지 않고 있던 하 대표가 이번엔 타인이 아닌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말만 들어도 고마운 하 대표의 든든한 조력 약속에 태주가 진심 어린 고마움을 표하며 명함을 집어넣었다.
“자, 그럼 적당히 쉬었으니 그만 일어나 볼까?”
아직 식당으로 내려가기엔 이른 시각이었지만, 한차례 숨을 돌린 하 대표는 무료하게 시간을 보낼 마음이 없었다.
“어디 가시게요?”
재룡이 상의도 없이 일어난 하 대표를 의아하게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놈아, 넌 여기 밥 먹으러 왔냐?”
역시나 베테랑 사업가답게 상대방의 니즈를 캐치할 줄 아는 하 대표였다.
“그나저나 어떤 선물로 보답을 해야 감사의 마음이 전해질지 모르겠구나.”
하 대표가 자신을 따라 일어난 태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턱을 매만졌다.
“아니요. 전 그냥 삼강의 구내식당이 유명하다는 말에 가벼운 마음으로 온 겁니다. 일전에 있었던 재룡이와의 일들에 대해 대가를 바란 적도 없고요.”
본심을 숨긴 태주가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들은 사람처럼 연기하며 사양의 뜻을 밝혔다.
“그래. 태주 너라면 그럴 수 있겠지. 하지만 인생을 살아 보니 사업이든 우정이든 어느 한쪽만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는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못하더구나.”
“……?!”
순간, 배울 점이 많은 친구와 가깝게 지내는 건 지혜로운 처신이지만, 상대방이 네게 배울 점이 없는 일방적인 관계일 땐 우정도 민폐가 될 수 있다 했던 학과장의 일침이 떠올랐다.
“지금이야 꼴찌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지만, 머지않아 내 뒤를 이어 삼강을 이끌 녀석이란다. 태주 네 입장에서도 알아두어 나쁠 게 없다는 뜻이지.”
“아아, 진짜……. 아버지, 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실익의 측면에서만 접근하는 하 대표의 계산적인 모습에 질린 재룡이 짜증 섞인 말투로 불만을 표했다.
“왜. 아버지가 너무 속물 같아서 친구 보기에 부끄러워? 근데. 지금 당장은 듣기 거북해도 내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언젠가 깨닫게 될 거다.”
아들의 질색에도 불구하고 하 대표는 인간관계에 대한 자신의 가치관을 부정하지 않았다.
“아 참, 삼강이 뭐 하는 곳인지는 알고 왔지?”
핏줄과의 껄끄러운 대화를 마친 하 대표가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에 앞서 태주에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네. 대한민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던전 채굴 회사라고 들었습니다.”
“다섯 손가락이라…….”
하 대표가 세간의 평가를 그대로 인용한 태주의 대답에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 수식어는 원래 4, 5등 하는 것들이 1등이랑 같은 레벨인 척 은근슬쩍 묻어가려고 만든 표현인 거 알지? 왜 그 한국대도 인재대나 태성대랑 묶어서 히트(HIT)라고 하잖아. 정시로 가든 수시로 최저를 맞추든 수능에서 대박을 쳐야만 갈 수 있는 명문대란 뜻으로 말이야.”
“네. 그런 단어가 예전부터 있긴 했죠.”
하 대표의 의중을 간파한 태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근데 실상은 어때. 솔직히 인재대랑 태성대가 서로 라이벌이긴 해도 한국대에 비빌 급은 아니지 않아? 사실 이 바닥도 그래. 뭐, 우리가 아직 1등이라고 할 순 없지만, 그래도 4, 5위랑 도매 취급을 받을 만큼 규모나 경쟁력의 격차가 좁진 않다는 거지.”
삼강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이 느껴지는 하 대표의 열띤 항변을 듣는 순간, 기업인에겐 자식이 둘이라고 했던 재룡의 비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똑똑히 알게 되었다.
“아버지. 지금 너무 흥분하신 거 아니에요? 좀 전에 말씀하신 대로 밥만 먹으러 온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회사 자랑을 들으러 온 것도 아니잖아요.”
하 대표의 토크 억제기인 재룡이 태주의 눈치를 보며 바른말을 아끼지 않았다.
“음! 음! 불편하게 했다면 미안하구나.”
재룡의 지적에 목소리를 낮춘 하 대표가 민망함에 헛기침을 했다.
“자, 그럼 몇 층만 더 내려가면 되니 천천히 따라오거라.”
‘대체 어디로 가려는 거지?’
태주가 가이드 역할을 자처한 하 대표의 뒤를 쫓아 회장실 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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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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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이곳이 바로 던전에서 채굴되는 품목들을 모아둔 일종의 박물관이자 삼강의 정체성 같은 곳이지.”
전시실로 들어선 하 대표의 목소리에 또 한 번 힘이 들어갔다.
‘잠재적인 고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포트폴리오 목적인가?’
강화 유리로 만든 케이스 안엔 다양한 종류의 강화석과 마나석들이 보기 좋게 디스플레이되어 있었다.
[모조품]
‘으음?’
강화석이나 마나석 같은 광물들과 달리 아티팩트나 마정석, 그리고 마정석을 입수하고 남은 몬스터의 사체처럼 보관이 용이하지 않거나 채굴 즉시 길드에서 회수해가는 핵심적인 전리품들의 경우 게이트 밖에서 찍은 사진과 그것을 바탕으로 제작된 모형만이 모조품이란 딱지를 붙인 채 전시되어 있었다.
“어떤가? 제법 잘 꾸며 놓은 것 같지 않나?”
백 번도 더 드나들었을 익숙한 공간이지만, 볼 때마다 늘 새롭고 짜릿하다는 눈빛으로 뿌듯하게 전시실을 둘러보는 하 대표였다.
“네. 보기만 해도 정성이 느껴지네요.”
잊을만하면 시작되는 하 대표의 자랑에 적당히 대꾸해준 태주가 보물찾기를 하듯 자신을 위해 준비된 답례품을 찾아 열심히 시선을 옮겼다.
바로 그때.
“맞아. 정성. 내가 준비한 선물에서도 같은 걸 느꼈으면 좋겠구나.”
전시실 내부를 유유히 거닐던 하 대표가 한 쇼케이스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어때. 보는 것만으로도 물욕이 생기는 거 같지 않아?”
팔짱을 낀 하 대표가 다소 우쭐해진 표정으로 자신 있게 물었다.
“이게 뭐죠?”
같은 곳을 바라보던 태주가 용도를 가늠할 수 없는 기묘한 전시품의 형태에 설명 판을 내려다봤다.
[진품]
‘어? 이건 모조품이 아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