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동아리 (1)
“어? 저러다 무너지는 거 아닐까요?”
때아닌 붕괴 소리에 놀란 피렐레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아무래도 비테론 4세가 나오는 과정에서 균열이 생긴 거 같군.”
발바닥에서부터 전해지는 묵직한 진동을 느낀 보르가넨이 부서진 성문 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테테 씨는 이제 어떡하죠? 제가 들어가서 데리고 나올까요?”
피렐레가 보물을 찾으러 들어간 테테의 들뜬 뒷모습을 떠올리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저 정도로 성이 무너지진 않을 걸세. 물론 보물이 있는 방이 무너졌다면 테테의 가슴도 무너져 내리겠지만.”
붕괴의 위험이 다분한데도 불구하고 성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테테의 어리석은 욕심을 확인한 보르가넨이 실소를 터뜨렸다.
“그만 가세. 아, 성유물을 회수하고 가려면 일단 교회부터 들러야겠군.”
게르딘과 눈이 마주친 보르가넨이 교회가 있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리던 바로 그때.
쿠구구궁! 콰과과광!
위태위태하던 성의 입구가 쓰러진 기둥과 천장에서 쏟아진 돌들로 완전히 막혀버렸다.
“어?!”
또 한 번 소스라치게 놀란 피렐레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성문 쪽을 돌아봤다.
“저러다 영영 못 나오면 어떡하죠?”
장비의 도움 없이 맨손으로 걷어낼 수 있는 수준의 잔해도 아니었지만, 무엇보다 2차 붕괴의 위험 때문에 섣불리 다가갈 수도 없었다.
“창문으로 어찌어찌 뛰어내릴 순 있겠지만, 저 정도 집착이면 분명 본인의 몸보다 보물을 먼저 집어던질 걸세.”
비테론 출신으로서 테테의 합류 동기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보르가넨이 높은 곳에 위치한 작은 창문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바로 그때.
쿠구구궁! 콰과과광!
이전보다 더욱 위협적인 붕괴 소리와 함께 창문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챙!
“어?!”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고 있던 피렐레가 창문을 통해 탈출하고 있는 테테의 다급한 모습을 목격했다.
철퍼덕!
“으아악!”
부상을 입은 탓에 제대로 착지를 하지 못한 테테가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비명을 질렀다.
“괜, 괜찮으세요?!”
사고 현장으로 달려간 피렐레가 한눈에 보기에도 심각한 테테의 상태에 황급히 회복 마법을 시전했다.
“리스토레이션!”
그로부터 얼마 후.
“이런 씨.”
텅!
피렐레의 도움으로 간신히 정신을 회복한 테테가 옆에 있던 플레이트 아머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분한 표정을 지었다.
“왜. 마차에 싣고 갈 게 몸뚱이밖에 없어서 그래?”
어느새 다가온 태주가 테테의 빈손을 내려다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말도 안 돼. 비테론 가문의 보물은커녕 금화 하나 못 보다니…….”
태주의 농담이 귀에 안 들어오는 테테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비테론 4세를 원망했다.
“그 망할 놈이 설치지만 않았어도 일이 이렇게까지 꼬이진 않았을 텐데.”
“그래도 판단력이 아주 흐린 편은 아니네.”
태주가 테테가 뛰어내린 창문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자리에서 일어난 테테가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의아하게 물었다.
“네가 광장에서 그랬잖아. 죽음을 재촉하는 과한 욕심을 버린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거라고. 아마 조금만 더 머뭇거렸으면, 성 어딘가에 묻혀서 지금보다 더한 후회를 하고 있었을걸?”
설득 당시를 떠올리던 태주가 베로닌 1세의 동상 앞에서 나눴던 테테와의 대화를 인용하며 말했다.
“뭐야, 그걸 지금 위로라고 하는 거야? 보물 하나만 보고 여기까지 온 사람한테?”
“세상에 목숨보다 귀한 보물은 없다. 이것도 네 입으로 한 얘기잖아. 그러니 엄밀히 따지면 보물을 얻은 셈이 되는 거지.”
“어휴, 짜증나!”
텅!
태주의 농담에 발끈한 테테가 투구를 걷어차며 애먼 곳에 화풀이를 했다.
물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보르가넨은 비테론 성채의 재건에 사용될 자금을 빼앗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내심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지만.
“그리고 이왕 빈 마차로 돌아가는 거 저기 있는 세 사람도 기다렸다 태우고 가. 어차피 나랑 티마란만 빼곤 다 베로닌으로 돌아갈 거니까.”
태주가 성유물 회수를 위해 모인 동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남남인데 내가 왜?”
목표 달성이 좌절된 테테가 신경질적인 말투로 태주의 지시에 불응했다.
“남남? 글쎄. 남남인 사람 덕분에 목숨까지 구한 네가 할 소린 아닌 거 같은데.”
태주가 힘들게 힐을 넣어 주고도 고맙다는 소리 한 번 듣지 못한 피렐레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 그, 그건…….”
“잊지 마. 피렐레 사제님과 게르딘 씨가 제 시간에 돌아가지 못하면 너한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테테의 한쪽 어깨를 가볍게 움켜쥔 태주가 주교의 편지에 적혀 있던 내용을 똑똑히 상기시켜 주었다.
“하아. 괜히 마차 값만 날렸군.”
결국 태주의 제안을 들어줄 수밖에 없게 된 테테가 함께 마차를 타고 왔던 세 사람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피렐레 사제님께 먼저 고맙다고 해야 되는 거 아니야? 네가 그렇게 멀쩡한 상태로 불평을 할 수 있는 것도 다 옆에서 힐을 넣어준 덕분인데.”
피렐레의 노고를 아는 태주가 테테의 염치없는 태도를 지적했다.
“안 그래도 하려고 그랬습니다.”
태주의 훈계를 잔소리로 여긴 테테가 존댓말을 하며 비꼬듯이 말했다.
“……살려줘서 고마워.”
도움을 받는 것에 익숙지 않았던 테테가 피렐레를 곁눈질을 하며 어색하게 말했다.
“예? 아, 예.”
테테의 인사를 기대하지 않고 있던 피렐레가 얼떨결에 고개를 숙였다.
“자, 그럼 이제 모든 원정이 마무리가 된 거 같으니 이쯤에서 진짜 헤어지도록 하죠.”
리더로서의 교통정리를 모두 마친 태주가 후련한 마음으로 안녕을 고하던 바로 그때
▶ 조별 과제를 마치고 현실로 돌아가시겠습니까? (Y/Y)
중단 여부만을 확인하던 조별 과제의 메시지가 처음으로 종료 의사를 물어 왔다.
‘다행히 해가 떨어지기 전에 끝났네.’
노을이 지는 것을 바라보던 태주가 Y밖에 없는 선택지로 시선을 옮기자 과제의 종료를 실감케 하는 강렬한 빛이 번쩍이며 지친 몸을 덮쳤다.
▶ 현실로 돌아갑니다.
*
*
*
다시 돌아온 월요일.
트레이닝 돔 지하에 위치한 궁수 훈련장에 모인 아이들이 엄 교수를 기다리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와아, 진짜 하루에 10000점씩 쏘느라 죽는 줄 알았네.”
오른쪽 어깨를 풀고 있던 세준이 엄 교수의 무리한 과제에 혀를 내둘렀다.
- “그러게. 신입생이 주말에 쉬지도 못하고 학교에, 그것도 훈련을 하러 나와야 한다니.”
- “난 오전에 약속이 있어서 오후부터 시작했는데, 진짜 거짓말 안 하고 딱 12시가 되기 직전에 끝났어. 완전 버저 비터.”
- “근데 이거 이번 주엔 안 시키시겠지?”
- “왜. 이번 주도 시키면 전직하게?”
역시나 주말을 반납한 아이들이 세준의 말에 공감하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아 참, 희범이 형, 태주한테 사진은 보냈어?”
세준이 태주의 비공식 서포터로서 클래스 리더를 대신해 엄 교수에게 보낼 인증샷의 취합을 맡게 된 희범을 쳐다보며 물었다.
“보내긴 했는데, 이게 생각보다 엄청 귀찮아. 사진도 밤낮 없이 오고. 요즘엔 귀에서 환청도 들리는 거 같아. 띠링! 띠링! 이렇게.”
피곤한 얼굴로 하품을 하던 희범이 세준의 물음에 메시지가 오는 소리까지 흉내 내며 고충을 토로했다.
- “그럼 태주한테 한 번 얘기해 봐. 힘들어서 도저히 못 하겠다고.”
희범의 옆에 있던 아이가 활을 닦으며 별생각 없이 말했다.
“에이, 그건 안 되지. 이건 어디까지나 희범이 형이 내기에서 진 대가로 하는 건데. 안 그래 형?”
세준의 말대로 희범은 카운트 업 모드를 택한 태주가 엄 교수의 통과 기준인 10000점을 1000번 만에 절대 끝낼 수 없다고 도발한 적이 있었다.
“어? 어, 뭐, 그야 그렇지.”
본전도 못 찾을 말을 꺼낸 희범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직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한 것에 대한 벌금 50만 원도 입금이 안 됐으니까 서로 민망하지 않게 빨리빨리 해결해 줘.”
궁수 모임의 총무를 맡은 세준이 휴대폰에 적어둔 메모를 확인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어? 내가 아직 안 보냈나?”
어물쩍 넘어가려던 희범이 실수인 척 능청스럽게 되묻던 바로 그때.
“어? 태주 왔다.”
태주가 들어오는 것을 발견한 희범이 세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슬쩍 말을 돌렸다.
“뭐야, 오늘따라 왜 이렇게 반갑게 인사해?”
태주가 희범의 환대를 수상하게 여기며 물었다.
“아니야. 아무 것도. 아, 근데 태주야, 너는 동아리 뭐 할지 정했어? 오늘 오다 보니까 학교에 있는 게시판들마다 아주 홍보 포스터로 도배를 해놨던데.”
어색하게 웃던 희범이 자신에게 쏠린 관심을 다른 주제로 환기시켰다.
“어. 대충.”
“대충 어디?”
세준이 태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동아리의 이름을 물었다.
“왜. 너도 가입하게?”
태주가 추균성, 최희범과 함께 자신의 3대 서포터를 담당하고 있는 세준의 적극적인 관심에 헛웃음을 지었다.
“아니, 뭐, 어차피 학과 동아리 하나는 필수적으로 가입해야 된다니까.”
“근데 너 전에 축알못에 들어간다고 하지 않았어?”
인맥을 통한 인재 영입이 목적인 세준의 입장에선 회원의 숫자가 가장 많은 축구 동아리가 이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두 개까진 병행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네가 축알못을 선택하는 게 가장 베스트이긴 하지만.”
“아니. 운동엔 별로 취미가 없어서.”
친목 이외의 메리트가 없는 곳은 최대한 거르고 싶었던 태주가 세준의 바람을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럼 뭐 하게? 음악? 봉사? 종교? 게임? 아니면 학술?”
헌터학과엔 중복으로 가입할 수 있는 동아리와 크고 작은 소모임들이 30개 이상 존재하고 있었다.
“피크닉.”
세준이 든 예시를 가만히 듣고 있던 태주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뭐? 피크닉?”
순간, 자신의 두 귀를 의심한 세준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 “피크닉이면 여행 동아리인가?”
- “글쎄. 난 처음 들어보는 거 같은데?”
- “그러게. 새터 때 동아리 소개할 때도 못 봤던 거 같아.”
- “어? 근데 여행 동아리면 무박 2일도 있지 않나?”
생소한 동아리명을 접한 동기들의 반응도 세준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물론 홍보가 아닌 통보를 하는 동아리인 만큼 지원 기준에 미달한 아이들에겐 낯선 것이 당연했지만.
“그럼 너 갈 때 나도 같이……, 아, 아니다. 이왕 말 나온 김에 수업 끝나고 한번 들러보자.”
일반적인 동아리 가입 절차를 생각하고 있던 세준의 머릿속엔 신입 부원을 모집하고 싶어 하는 선배들의 호의적인 모습만 가득했다.
“근데 거긴 동방이 어디야? 내가 듣기론 중앙 동아리는 학생회관에 학과 동아리는 헌터관에 동방이 있다던데.”
“동방? 글쎄. 그걸 방이라고 할 수 있나?”
“뭐?”
휴대폰을 꺼내 메모를 준비하던 세준이 태주의 알 수 없는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