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공성전 (2)
“……?!”
태주의 돌발 행동에 말문이 막힌 게르딘이 움직일 수 있는 건 흔들리는 눈동자뿐이었다.
“형제님! 지금 이게 무슨…….”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친 피렐레가 당혹감에 말을 잇지 못했다.
“이보게. 자네 갑자기 왜 이러는 건가?”
태주를 자극할까 두려웠던 보르가넨이 팔을 뻗은 채 타이르듯이 말했다.
“이 칼을 기억하십니까?”
칼날을 거둔 태주가 게르딘의 눈앞에 단검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
순간, 보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손잡이를 본 게르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건…….”
“다행히 기억하시네요.”
▶ 착용한 장비를 인벤토리에 넣으시겠습니까? (Y/N)
게르딘의 표정을 읽은 태주가 단검을 거두며 헛웃음을 지었다.
“게르딘 형제님, 대체 저게 무엇입니까?”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수수께끼 같은 대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피렐레가 게르딘의 곁으로 다가가 나지막이 물었다.
“성검입니다.”
피렐레의 질문을 받은 건 게르딘이었지만, 대답을 가로챈 쪽은 태주였다.
“예?! 성검이요?!”
물론 누구의 대답을 들었어도 반응은 동일했겠지만.
“네. 성기사가 된 게르딘 씨가 처음으로 회수했던 아주 의미 있는 성유물이죠.”
“그걸 어떻게 당신이…….”
자신이 숙소에 간 사이, 주교를 만나러 갔다는 얘기는 피렐레에게 전해 들었지만, 태주가 베로닌 교회에 보관 중인 성유물을 들고 나타날 것이라곤, 더구나 성검에 얽힌 자신의 사연까지 알고 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게르딘이었다.
“주교님께서 빌려주셨습니다.”
“……?!”
주교가 직접 성검을 내어 주었다는 사실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게르딘의 말문이 또 한 번 막혔다.
“이해가 안 되시죠? 이게 왜 제 손에 있는지. 아마 머릿속이 복잡해지셨을 겁니다. 서운함과 섭섭함, 그리고 약간의 원망스러움. 자신과는 무관하다 여겼던 거룩하지 못한 감정들이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겠죠. 주교님에 대한 인간적인 배신감도 당연히 들었을 거고.”
“아니!”
태주의 일방적인 추측에 발끈한 게르딘이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날 만큼 주먹을 불끈 쥐며, 노기를 드러냈다.
“이해가 안 되는 건 맞지만, 결단코! 주교님께 배신감을 느낀 적은 없습니다.”
“아아, 그래요?”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잠시나마 동의하는 듯했던 태주가 게르딘의 뒤로 이동해 속삭이듯이 말했다.
“거짓말.”
“……?!”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자신의 두 귀를 의심한 게르딘이 재빨리 뒤를 돌아봤지만, 거짓말처럼 사라진 태주의 몸은 이미 제자리로 돌아간 뒤였다.
“베로닌에 돌아가면 고해성사부터 하셔야겠네요. 주교님을 원망하고,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한 참회의 고해성사를.”
“이런 씨…….”
자신도 모르게 심한 욕을 내뱉을 뻔했던 게르딘이 간신히 혀를 굳혔다.
“그냥 하세요. 그게 더 인간적이니까.”
“후우. 왜 나를 시험하려 드는 겁니까?”
태주에게 더는 말려들고 싶지 않았던 게르딘이 성기사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기억 안 나세요? 시험은 게르딘 씨가 먼저 하셨잖아요. 저희 세 명에게.”
태주가 보르가넨과 피렐레의 얼굴을 한 번씩 쳐다보며 말했다.
“그, 그건…….”
“네. 복귀를 장담할 수 없는 위험한 임무인 만큼 믿고 의지할 만한 동료들인지 궁금하셨겠죠. 충분히 이해합니다. 근데.”
태주가 핵심을 전달하기 직전에 한 템포 끊어줌으로써 상대방의 궁금증과 집중력을 극대화시켰다.
“그건 저희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지금 제 역량을 검증해보시겠다는 겁니까?”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이 있던 게르딘이 불쾌함을 드러내며 되물었다.
“네.”
두 사람의 아슬아슬한 대화를 숨죽인 채 지켜보고 있던 보르가넨과 피렐레가 태주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요! 우리끼리 이러는 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피렐레의 말이 맞네. 괜히 서로 힘 빼지 말고, 이쯤에서 그만하게.”
물론 조장을 맡은 태주의 입장에선 주교의 말에만 충성하는 게르딘을 길들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하는 일종의 통과 의례였지만.
“아니요. 이건 성기사로서의 검증을 떠나 제 자존심이 걸린 문제입니다.”
스르릉!
칼집을 움켜쥔 게르딘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롱소드를 꺼내 들었다.
“난 준비됐소.”
“네. 저도 준비됐습니다.”
게르딘의 예리한 칼끝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주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태주의 제안을 대련의 의미로 받아들인 게르딘이 싸울 마음이 없어 보이는 상대의 관조적인 제스처에 싸늘한 말투로 물었다.
“준비가 됐으면 어서 활을 꺼내시죠.”
순간, 왼발을 앞으로 뻗어 준비 자세를 취한 게르딘의 몸에서 황금빛 오러가 피어올랐다.
“아니요. 게르딘 씨의 상대는 따로 있습니다.”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오해를 유도한 태주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마차의 옆으로 이동했다.
“그럼 왜 준비가 됐다고 한 겁니까?”
“준비가 됐으니까요. 심판을 볼 준비가.”
덜컥!
태주가 활짝 문을 열자 은신으로 몸을 숨긴 테테가 발자국 소리 하나 없이 마차에서 내렸다.
“설마.”
자신의 상대가 테테임을 알아차린 게르딘이 칼자루를 더욱 단단히 움켜쥐었다.
물론 테테가 내렸을 것이라 짐작만 할 뿐, 그가 어디서, 어떠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지는 쉽게 알아차릴 수 없었지만.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일단 검부터 거두시죠.”
게르딘의 앞으로 순식간에 이동한 태주가 마차를 겨누고 있던 칼끝을 검지로 슬며시 치워내며 말했다.
“검을 거두라니요. 그럼 저 암살자와 맨손으로 싸우라는 겁니까?”
테테의 악명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게르딘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따지듯이 물었다.
“검을 든다고 뭐가 달라질까요?”
“뭐요?!”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무례한 발언에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게르딘이 검을 내리며 태주에게 다가가려던 바로 그때.
툭!
가슴팍에 손을 뻗어 게르딘의 걸음을 막아선 태주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검부터 거두라고 했지.”
“검은 이미…… 헉?!”
태주의 시선이 자신의 등 뒤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게르딘이 목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한기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에이, 시시하게.”
자신의 합류를 거부한 게르딘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려 했던 테테가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들킨 듯한 아쉬운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대신했다.
“이, 이럴 수가.”
“아니, 대체 언제 저기까지.”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아니, 보이지 않아 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한 보르가넨과 피렐레가 시선 둘 곳조차 찾지 못한 채 감탄사를 연발했다.
물론 테테의 은신 스킬만큼이나 태주의 감지 능력 또한 입에 올리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근데 신태주 형제님께선 어떻게 게르딘 형제님의 뒤에 테테가 있다는 걸 알았을까요?”
“그야 당연히 은신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발산된 마력을 느낀 거겠지. 문제는 그 마력을 단 한 사람만 감지했다는 거지만.”
검증 대상자가 게르딘이라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보르가넨과 피렐레의 대화 속엔 태주와 테테의 이름만이 등장하고 있었다.
“테, 테테?”
자신의 턱밑을 위협하고 있던 서늘함이 사라진 것을 느낀 게르딘이 조심스럽게 목을 매만지며 대화를 시도했다.
물론 테테가 태주의 곁으로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대꾸해 주는 이 하나 없는 민망한 혼잣말에 그쳤지만.
“그나저나 제법인데? 오늘은 특별히 은신에 기척 차단 스킬까지 사용했는데 말이야.”
좀처럼 곱게 말이 나가지 않는 테테의 입에서 태주의 칭찬이 나왔다.
테테의 접근을 눈치챌 수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 기척 차단.
물론 기척을 차단했다고 해서 발산되는 마력의 크기가 0으로 수렴되는 건 아니었지만, 여러 명이 동시에 마력을 발산하고 있는, 더구나 언성을 높이며 기 싸움까지 벌이고 있는 혼잡한 상황에 미세한 마력의 움직임을 포착한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검증은 없었던 걸로 하죠.”
게르딘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고 판단한 태주가 사기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선에서 테스트를 중단시켰다.
“그리고 게르딘 씨.”
“듣고 있소.”
스르릉!
성기사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 게르딘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검을 집어넣으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주교님께서 그러시더군요. 당신의 장점은 신앙심이지만, 당신의 단점 또한 신앙심이라고.”
“그게 무슨.”
자신에 대한 주교의 솔직한 평가를 처음으로, 그것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듣게 된 게르딘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
“주교님께는 이미 테테의 존재를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주교님의 반응은 당신과 사뭇 달랐지만.”
“달랐다는 건 저 죄인의 합류를 주교님께서 직접 허락하셨다는 겁니까?”
“네. 보시다시피.”
“말도 안 돼.”
“아니요. 말이 안 되는 게 아니라 본인의 신념에 어긋나는 거겠죠. 죄악 속에서 살아가는 암살자와는 힘을 합칠 수 없다는 그 확고한 신념에.”
“그래도 난 내 신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소.”
게르딘이 협의점이 보이지 않는 신앙의 잣대를 고집스럽게 내세우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네. 틀렸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그저 주교님의 타협 역시 틀린 것이 아니란 걸 말씀드리고 싶었을 뿐이지.”
물론 게르딘의 거센 반발을 예상하고 있던 태주의 표정엔 별다른 동요가 없었지만.
“참고로 주교님께서 이런 말씀도 하시더군요. 자신이 가장 믿고 의지하는 베로닌 최고의 성기사가 함께 하니 분명 큰 힘이 될 거라고. 필시, 벨지오스를 단죄하고, 성유물을 회수한 뒤 무탈하게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말입니다.”
▶ 선택한 물품을 소환하시겠습니까? (Y/N)
설득의 마침표를 찍기로 한 태주가 다시 꺼내든 성검을 게르딘에게 내밀며 말했다.
“바로 이 성검을 가져왔을 때처럼.”
“이걸 왜.”
성검과 태주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게르딘이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받으세요. 사실 내가 아닌 당신에게 빌려주신 거니까.”
“……?!”
성검을 둘러싼 주교의 진심을 알게 된 게르딘이 태주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출발 전에 걸어주신 목걸이는 베로닌 교회 전체를 대표한다는 의미였지만, 이건 게르딘 씨에게 보내는 주교님의 무한한 신뢰이자 믿음의 징표입니다. 그러니 꼭 본인의 손으로 직접 돌려드리세요. 임무를 완수하기 전까진 멋대로 순교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성검을 받아든다는 건 주교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의미였고, 이는 곧 테테를 비테론 원정대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네. 멋대로 순교하지 않겠습니다.”
주교에 대한 오해를 푼 게르딘이 테테의 합류를 인정하며 성검을 집어 들던 바로 그때.
‘됐다.’
태주의 눈앞에 반가운 메시지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