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공성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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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가 떠난 성기사들의 훈련장.
성기사 게르딘이 떠날 채비를 하기 위해 숙소로 달려간 사이, 조별 과제의 중단 시점으로 돌아온 태주가 피렐레 사제에게 다가갔다.
“피렐레 사제님.”
“예? 아, 예,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게르딘의 테스트를 무사히 통과한 피렐레가 태주의 갑작스러운 부름에 뿌듯한 표정을 들켰다.
“사제님이 믿는 신께서 혹시 사랑과 포용에 대한 교리도 남겨 주셨나요?”
인간의 적인 몬스터와 손에 피를 묻히고 살아가는 암살자.
태주는 신성함과는 거리가 먼 이 두 명의 조원이 팀워크 지수에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극심한 반발이 예상되는 인물인 게르딘과 피렐레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킬 생각이었다.
“예.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신실한 사제답게 신앙적인 질문에 있어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아아, 원수를 사랑하라…….”
설득의 근거가 될 만한 적절한 명분을 찾은 태주가 말씀을 곱씹어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갑자기 그건 왜…….”
질문의 의도를 알 리 없는 피렐레가 태주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원수마저 사랑하라 하셨으니 죄 많은 자 역시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겠네요.”
태주가 피렐레의 물음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예, 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렇지만, 교리상 모든 말씀을 또 그렇게 표면적으로만 해석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뜻밖의 질문 공세에 당황한 피렐레가 난처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끝을 흐렸다.
“언제나 예외는 존재한다는 말씀이시죠? 예를 들면, 벨지오스처럼.”
대화의 주도권을 잡은 태주가 기다렸다는 듯이 극단적인 예시를 들어 티마란과 테테에 대한 거부감의 허들을 낮추려 했다.
“예, 제가 드리고 싶었던 말씀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원수의 커트라인을 정하게 된 피렐레가 별다른 의심 없이 맞장구를 쳤다.
“사실 벨지오스는 심판과 단죄의 대상이지 사랑과 포용의 대상은 아니거든요. 제가 형제님을 따라 비테론에 가는 이유도 다 그 때문이고요.”
“네. 맞습니다. 심판과 단죄.”
피렐레의 목적의식을 재차 확인한 태주가 조금 더 대화를 진전시켰다.
“그럼 피렐레 사제님, 혹시 벨지오스를 심판하고 단죄할 수 있는 자격은 사제님처럼 성스럽고, 흠 없는 인생을 살아온 분들에게만 허락된 것입니까?”
“아니요. 그분 앞에선 모두가 죄 많은 인생이기 때문에 성직자의 길을 걷고 있는 저 역시 성스럽거나 흠 없는 인생을 살아왔다고 볼 순 없습니다. 더구나 벨지오스를 심판하고 단죄하는 일에 그 어떤 도덕적 자격이 요구되는 건 더더욱 아니고요.”
“네. 지금 하신 그 말씀. 꼭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피렐레의 입에서 원하는 대답을 끌어낸 태주가 함부로 말을 바꾸지 못하도록 단단히 쐐기를 박았다.
“예? 아, 예.”
말실수를 하지 않았음에도 말실수를 한 것 같은 막연한 찝찝함.
태주의 의미심장한 부탁에 자신이 했던 말을 되뇌어 본 피렐레가 의아한 얼굴로 대답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건 그렇고, 게르딘 씨는 어떤 분입니까?”
피렐레를 설득하기 위한 논리적 기반을 어느 정도 다져 놨다고 판단한 태주가 이번엔 잠시 자리를 비운 게르딘의 이름을 거론했다.
“글쎄요. 저도 베로닌에 온 지 한 달밖에 안 돼서 잘은 모르지만, 일단 주교님을 대하는 태도만 봐도 신앙심이 남다르다는 게 느껴졌습니다. 성기사의 필수 덕목이라고 할 수 있는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또한 지니고 계신 것 같고요.”
“네. 그건 한 달이 아니라 하루밖에 안 된 저도 느꼈습니다.”
피렐레의 대답을 듣는 순간, 다른 곳도 아닌, 비테론으로 가라는 주교의 무리한 지시에 두말없이 따르던 게르딘의 순종적인 모습이 떠올랐다.
“보르가넨 씨, 곧 뒤따라갈 테니까 게르딘 씨가 오면, 피렐레 사제님과 먼저 비테론으로 출발해주세요.”
게르딘을 설득할 수 있는 열쇠가 주교에게 있음을 확신한 태주가 최연장자인 보르가넨에게 조원들의 인솔을 부탁했다.
“설마 이제 와서 도망치려는 건 아니겠지?”
옷소매로 지팡이를 닦고 있던 보르가넨이 태주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실없이 웃었다.
“그럴 리가요.”
태주가 보르가넨의 농담에 헛웃음을 지었다.
“주교님께 따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예? 주교님께요?”
곁에 있던 피렐레가 주교를 만나러 간다는 태주의 말에 귀를 쫑긋 세우며 물었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그럼.”
용건에 대해선 말을 아낀 태주가 멀리 가지 못했을 주교와의 격차를 좁히기 위해 스킬의 힘을 빌렸다.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
*
*
잠시 후.
게르딘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한 비장의 카드를 확보한 태주가 성기사들의 훈련장 부근에서 테테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그닥! 다그닥!
‘으음?’
마차 두 대가 줄지어 달려오는 것을 발견한 태주가 담벼락을 등지며 일찌감치 길을 비켜주었다.
- “워워.”
물론 그러한 배려가 무색하게 고삐를 쥔 마부들은 달리던 말의 속도를 줄여 태주의 앞에 멈춰 섰지만.
‘하필이면 왜 여기에…….’
떳떳하지 못한 인물과의 만남을 앞두고 있던 태주가 마부들의 눈을 피해 자리를 옮기려던 바로 그때.
덜컥!
첫 번째 마차의 문이 열림과 동시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타.”
베로닌 1세의 동상 앞에서 들었던 바로 그 온기 없는 목소리가.
‘테테?’
마차 밖으로 코빼기도 내비치진 않았지만, 첫 만남 때부터 은신 스킬을 사용했던 터라 태주의 입장에선 오히려 목소리로 구분하는 편이 익숙했다.
‘설마 마차도 훔쳐 온 건 아니겠지?’
마차로 향하던 태주가 마부의 인상을 유심히 살펴보며 장물이 아닌지 의심해 보았다.
“웬 마차…… 어?”
마차에 오르려던 태주가 한쪽 발만 발판에 올린 채 그대로 멈췄다.
두 명씩 마주 보고 앉을 수 있는 넉넉한 공간이었지만, 텅 빈 마차 속, 그 어느 자리에도 테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야, 마나 안 아낄 거야?”
마력이 느껴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태주가 은신을 사용하고 있는 테테를 향해 다그치듯이 물었다.
“말했잖아. 그건 네가 성직자들을 얼마나 빨리 설득하느냐에 달렸다고.”
태주를 보자마자 은신 스킬을 사용했던 테테가 사방으로 난 작은 창문을 통해 한산한 골목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왜 너 혼자야? 다른 녀석들은 다 어디 있고?”
“조금 전에 먼저 출발했어.”
마차에 올라탄 태주가 테테의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어? 그럼 설득에 성공한 거야?”
“아직.”
“아직?”
“조급해하지 마. 설득은 협박이 아니니까.”
“대신 협박은 효과가 빠르고 확실하잖아. 거절당할 일도 거의 없고.”
“그래서. 네가 여기 협박을 당해서 온 거야?”
“뭐?”
“사람이 협박을 당하면 도망칠 궁리밖에 안 해. 너처럼 이렇게 제 발로 찾아오지 않는다고.”
“…….”
테테의 말문이 막힌 건 거대한 마차를, 그것도 두 대씩이나 끌고 온 자신의 적극적인 행동이 설득에 기인한 것이었음을 차마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한테 다 생각이 있으니까 넌 그냥 옆에서 조용히 보고만 있어. 괜히 지금처럼 헛소리나 하지 말고.”
팀워크 지수의 하락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태주가 불필요한 마찰을 방지하기 위해 입조심을 하도록 당부했다.
*
*
*
마차에 올라탄 지 얼마 되지 않아 태주는 베로닌 성을 빠져나갔고, 이내 먼저 출발한 세 사람의 뒷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쟤네들이야?”
태주가 신호를 줄 때까진 은신을 유지한 채 조용히 기다리기로 한 테테가 시큰둥한 말투로 물었다.
“어. 일단 마차부터 세워.”
“미리 말해두지만, 날 거부한 것들은 비테론까지 걸어가야 될 거야.”
쿵! 쿵!
비테론 가문의 보물을 싣고 가기 위한 마차까지 준비해 온 테테가 주먹으로 내벽을 두드리며 말했다.
- “워워.”
테테의 정지 신호를 접수한 마부가 고삐를 당기자 뒤따라오던 마차 역시 속도를 늦춰 마차를 세웠다.
“……?”
태주가 그랬듯 말이 놀라지 않게 옆으로 자리를 피했던 세 사람이 마차의 이상 행동에 덩달아 걸음을 멈췄다.
바로 그때.
덜컥!
“어?!”
예의상 창문 안을 대놓고 들여다볼 순 없었던 세 사람이 마차의 문을 열고 내리는 태주의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건가?”
보르가넨이 마차와 태주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오는 길에 마지막으로 합류한 동료를 만났습니다. 마차도 그 친구가 준비했고요.”
“친구? 아아, 그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후발대로 온다고 했던.”
“네.”
“허허, 이거 새 친구 덕분에 아주 편하게 가겠군.”
밤새 걸을 생각에 발걸음이 무거웠던 보르가넨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근데 그 친구는 지금 어디 있나?”
보르가넨이 텅 빈 마차 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아, 그전에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마차의 문을 닫은 태주가 조원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드릴 말씀?”
마차에 오르기 위해 신발을 털고 있던 보르가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보르가넨 씨도 그렇지만, 특히 게르딘 씨와 피렐레 사제님께 먼저 양해를 구해야 할 것 같아서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세 사람이 태주의 중대 발표를 숨죽인 채 기다렸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이번 비테론 원정대에 합류한 마지막 동료는 테테입니다.”
“뭐?! 테테?!”
예상대로 베로닌 출신인 게르딘의 반응이 가장 눈에 띄었다.
“예? 테테요?”
“테테가 누군데 그래?”
반면, 베로닌에 온 지 한 달밖에 안 된 피렐레와 보르가넨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테테는 베로닌에서 가장 악명 높은 도적이자 암살자의 이름입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게르닌이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예?! 암살자요?!”
테테의 정체를 알게 된 피렐레가 벨지오스를 심판하고 단죄할 수 있는 자격에 대해 묻던 태주의 의미심장한 질문을 떠올렸다.
▶ [알림] 팀워크 지수가 변동되었습니다. (75 → 70)▶ [알림] 팀워크 지수가 『안정』에서 『불안』 단계로 하락하였습니다.
“피렐레 사제님.”
시스템의 메시지를 확인한 태주가 평정심을 유지한 채 설득을 이어갔다.
“예?”
“사제님께서 제게 그러셨죠. 벨지오스를 심판하고 단죄하는 일에 도덕적인 자격이 요구되는 건 아니라고.”
“예? 아, 예, 뭐…….”
게르딘의 상기된 얼굴을 힐끗거리던 피렐레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피렐레 사제님!”
피렐레의 대답을 들은 게르딘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거세게 반대했다.
“잊으셨습니까? 저희는 그분의 모습을 닮기 위해 일평생을 바치는 성직자와 성기사입니다. 결과만을 중시하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 과정마저 순결해야 하는 저희가 어떻게 죄악 속에서 살아가는 암살자와 함께 힘을 합친다는 말씀이십니까.”
종교적 신념에 배치되는 행동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게르딘이 피렐레의 경솔함을 탓하며 열변을 토했다.
바로 그때.
▶ 선택한 물품을 소환하시겠습니까? (Y/N)
스윽!
적절한 타이밍을 엿보고 있던 태주가 갑자기 핏대를 세운 게르딘의 목에 단검을 들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