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도전자 (1)
“뭐?”
태주가 정웅의 대답에 두 귀를 의심했다.
“나 아직 안 고쳤어.”
정웅 역시 생각지도 못한 경쟁자의 등장에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너 어제 당장 수정한다고 그랬잖아.”
태주가 결단을 미룬 이유에 대해 따지듯이 물었다.
“아니, 처음엔 그러려고 그랬는데, 네가 마지막에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려서 잠깐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거든.”
“고민?”
“어. 법사를 포기할지 말지에 대한 심각한 고민.”
격려의 효과가 미미하다고 속단했던 태주의 예상과 달리 정웅은 법사로서의 잠재력을 인정해준 태주의 한마디에 생각이 많아진 상태였다.
“근데 왜 말 안 했어?”
전직을 갈등하게 만드는 데 성공한 태주가 한결 누그러진 말투로 물었다.
“너도 봤잖아. 교수님께서 딱 그 타이밍에 오신 거.”
“으음. 그럼 누구지?”
하고 싶은 말은 꼭 해야 되는 성격이라고 했던 정웅의 대답 속 숨겨진 용건에 대해 알게 된 태주가 주위를 둘러보며 혼잣말처럼 물었다.
“글쎄. 아직 다른 사람한텐 얘기한 적은 없는데…….”
정웅이 자신을 제외한 20명의 법사들 중 태주의 능력을 선망했던 인물이 있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바로 그때.
“금서윤.”
학생들이 동요하는 이유를 알고 있는 한 교수가 정체를 묻는 질문이 나오기 전에 당사자를 지목했다.
“네.”
A급 법사 금서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얼굴로 해맑게 대답했다.
“왜 매직 아처로의 전직을 희망하지?”
한 교수의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동기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집중됐다.
- “뭐야, 금서윤이었어?”
- “그러게. 완전 의외인데?”
- “근데 금서윤이 28기 법사 중에선 원톱 아니야?”
- “뭐, 법사 애들 말로는 입학 성적도 그렇고 직업 탐구 시간에도 가장 독보적이래.”
- “어? 법사로도 충분히 성공 가능성이 있는데, 왜 굳이 전직을 하려고 그러지?”
- “금서윤이 원래 노력형 천재에 욕심도 어마어마하다잖아.”
- “내가 새터 때 같은 조였는데, 술 게임 하나를 해도 승부욕이 장난 아니야.”
- “맞아. 목소리는 해맑은데, 살짝 다혈질에 욱하는 면도 있어.”
- “으음. 역시 사람은 외모로만 판단하면 안 돼.”
개강한 지 채 2주도 되지 않았지만, 금서윤의 당차고 의욕적인 성격은 법사가 아닌 동기들 사이에서도 이미 소문이 자자했다.
“법사로는 결국 들러리만 될 것 같아서요.”
한 교수의 질문에 대한 서윤의 대답은 놀라울 정도로 솔직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같은 법사 출신인 한 교수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질문을 이어갔다.
“교수님께서 지난 시간에 말씀하셨잖아요. 역사엔 언제나 주연과 조연이 존재한다. 난 너희들 모두가 역사의 주연으로 남길 바란다. 단, 도전을 두려워하고 손해 보는 것을 꺼려하는 자에겐 절대 허락되지 않는 자리다……. 그래서 한번 도전해 보려고요. 솔직히 100세 시대에 1년 정도 허비하는 건 아무 것도 아니잖아요.”
서윤은 전직을 위한 도전 기간을 최대 1년으로 잡고 있었다.
“내 가르침을 상당히 자의적으로 해석했군.”
한 교수가 서윤의 당돌한 대답에 헛웃음을 지었다.
“난 ‘모두가’라는 말에 방점을 찍은 것인데, 넌 오직 ‘주연’이라는 단어에만 집중한 것 같구나.”
서윤은 주연의 범위를 사전적인 의미 그대로 좁게 바라봤고, 한 교수는 서윤의 그러한 자기중심적인 시각을 콕 집어 지적했다.
“내 장담하건대, 스스로를 조연으로 여겨 들러리 취급한다면, 설령 주연이 되는 순간이 와도 필시 새로운 비교 대상이 널 조연이라는 착각이 들 게 만들 거다.”
서윤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던 한 교수가 비교의 늪에 빠진 나머지 스스로를 과소평가하고 있는 제자의 안타까운 모습에 충고와 경고를 아끼지 않았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교수님.”
물론 잠시나마 수긍하는 듯했던 서윤은 한 교수와의 대화를 다시 원점으로 돌려놨지만.
“과연 들러리가 된 것 같은 느낌을 저만 받은 걸까요?”
분명 의견이 충돌하고 있는 아슬아슬한 상황이었지만, 표정만 보아선 그 심각성을 인지할 수 없을 만큼 대화 내내 얼굴 한번 붉히지 않는 서윤이었다.
“제가 봤을 땐 겉으로 티는 안 내도 다들 태주의 독보적인 행보에 두 가지 마음을 품고 있을 것 같아서요.”
“두 가지 마음이라……. 이젠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 자의적으로 해석하는군.”
“네. 조금 전 발언은 순전히 제 추측이었습니다. 다만,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태주에겐 한계를 정하지 않으시면서 왜 저희, 아니, 저에겐 현재에 만족하고 자족하는 법부터 가르쳐 주신 건지 잠시 고민해 본 것뿐입니다. 죄송합니다.”
입으로는 사과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한 교수를 비롯한 강의실 안의 그 누구도 서윤의 진심을 느낄 순 없었다.
“그토록 당당한 얼굴로 왜 잘못을 고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입학시험 당일에 있었던 태주와의 작은 오해 이후 오랜만에 제자와 입씨름을 하게 된 한 교수가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서윤의 당돌한 태도에 코웃음을 쳤다.”
“제자의 성장을 바라지 않는 스승은 없다. 물론 편애가 아닌 것을 편애라 느끼게 했다면, 교수로서의 공정함을 지키지 못한 부덕의 소치겠지. 하지만.”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서윤과 지그시 눈을 마주친 한 교수가 자신의 처신을 둘러싼 억측을 고고한 어조로 차분하게 반박했다.
“성공이든 성장이든 그릇된 집착엔 늘 악순환이 따르는 법. 뭐가 그리 널 조급하게 만든 건진 모르겠지만, 4년의 학과 생활을 건강하게 보내고 싶다면, 부디 비교라는 족쇄로부터 자유로워지길 바란다.”
“…….”
한 교수의 진심 어린 조언을 묵묵히 듣고 있던 서윤이 시선을 떨어뜨리며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입으로는 인정했지만, 세 치 혀에서 만들어낸 의미 없는 다짐이 상대방의 귀를 통해 마음까지 전달될 리 없었다.
“흐음. 출석을 간소화한 게 무의미할 만큼 수업이 지체됐구나.”
손목시계를 확인한 한 교수가 코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책장을 넘겼다.
“59페이지의 상단에 뭐라고 쓰여 있지?”
- “대 헌터 시대의 개막.”
한 교수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예정된 강의를 진행하자 두 사람의 신경전을 숨죽인 채 지켜보던 학생들이 눈치껏 바른 수업 태도를 유지했다.
- “이야, 금서윤도 금서윤이지만, 괜히 학과장님이 아니시네.”
- “그러게. 내가 교수였으면 벌써 미안하다고 그랬을 텐데.”
- “아니, 근데 금서윤은 자족이고 자시고 전직을 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것도 매직 아처로?”
- “그나마 궁수보단 법사가 더 유리한 게 사실이잖아. 뭐, 그래 봤자 전직에 성공한 법사는 단 한 명도 없었지만.”
- “근데 금서윤 정도면 매직 아처로 전직하는 것보다 법사로 한우물만 파는 게 더 낫지 않나?”
- “내 말이. 막말로 고생고생해서 화살을 생성했다고 쳐. 근데 과연 태주처럼 속사가 가능할 만큼 실전에서 유의미하게 사용할 수 있을까?”
- “게다가 태주는 단순히 화살만 생성하는 게 아니라 순간 이동도 하고, 심지어 마법에 대한 내성까지 있잖아.”
- “야, 새터 때 교수님이 만든 결계까지 한 방에 깬 거 못 봤어? 태주는 그냥 매직 아처가 아니라 완성형 매직 아처야. 그래서 퀸스맨이나 캘리포니아 불리스 같은 세계적인 길드에서도 러브콜을 보내오는 거고.”
- “솔직히 교수님들이 본인들 아티팩트까지 주면서 예뻐라 하는 건 맞는데, 태주의 플레이를 한 번이라도 직관했으면, 아니, 영상으로라도 봤으면, 이유 없이 편애한다는 소린 못하지. 말 그대로 클래스가 다른데.”
- “와아, 지금도 충분히 살벌한데, 대체 졸업할 때쯤이면 얼마나 더 강해져 있을까?”
- “글쎄. 모르긴 몰라도 최소 한 학기 정도는 남겨두고 조기 졸업하지 않을까?”
서윤의 바람과 달리 대부분의 동기들은 태주에 대한 질투심이 아닌 경외심을 드러내며 매직 아처로의 전직을 녹록지 않게 바라봤다.
“이거 생각보다 반응들이 냉랭한데?”
도전 그 자체만으로도 주목을 받을 수 있는 매력적인 목표라 생각했던 정웅이 매직 아처로의 전직에 대한 동기들의 회의적인 여론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좋겠다. 애들이 다 네 편이라.”
태주를 힐끗 쳐다본 정웅이 툭툭거리는 말투로 부러움을 감추려 했다.
“왜. 너도 내 편 아니었어?”
태주가 경계 대상에서 제외된 정웅의 한쪽 어깨에 손을 얹으며 능청스럽게 물었다.
“미안한데, 난 늘 중립이야.”
자존심상 태주의 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정웅이 어깨 위에 놓인 손을 떼어내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
*
*
잠시 후.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다.”
주어진 강의 시간을 남김없이 사용한 한 교수가 정시에 맞춰 교재를 덮었다.
“아, 그리고 중간중간 조는 인원들이 보이는데, 다음 시간부턴 태도 점수도 체크할 테니 꿈은 꿔도 좋은 학점은 꿈도 꾸지 않길 바란다.”
- “네.”
한 교수가 강의실 문을 나서자 각자의 노하우로 졸음을 이겨낸 학생들이 찌뿌둥한 몸을 스트레칭하며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 “어휴, 다음 시간엔 커피라도 가져와야겠다.”
- “커피? 커피는 마시는 것보다 쏟는 게 더 효과적인 거 몰라?”
- “차라리 나처럼 딴생각을 해 봐. 예를 들면, S급 던전을 솔플로 깨거나 세계 최고의 헌터가 되는 뭐 그런 달달한 상상으로.”
- “근데 신기하게 쉬는 시간만 되면 정신이 맑아지지 않냐?”
- “어? 그럼 우리가 아니라 교수님이 문제였네.”
- “좋아. 이제 내일 하루만 버티면 주말이다.”
왠지 모를 해방감에 들뜬 아이들이 하나둘 걸음을 재촉하던 바로 그때.
‘어?’
태주가 먼발치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서윤의 곱지 않은 시선을 포착했다.
물론 무언의 도전장을 받은 태주의 눈빛에선 어떠한 두려움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
잠시 눈싸움을 벌이는 듯했던 서윤이 이내 고개를 돌려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명심하겠다고 한 건 역시 거짓말이었네.”
태주의 곁에 있던 정웅이 서윤의 행동에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뭘 어떻게 해.”
“그냥 저대로 놔뒀다가 전직에 성공하면 어떡할 거냐고.”
“글쎄. 그건 성공한 다음에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서윤의 실패를 확신하고 있는 태주가 정웅의 물음에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
*
*
다음 날.
글로벌 영어의 면제자인 태주가 트레이닝 돔 지하에 위치한 던전 실습 강의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 뚫어지겠네.’
태주가 자신을 노골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선배들의 시선에 부담스러움을 느끼던 바로 그때.
띠링! 띠링! 지이잉!
‘으음?’
태주를 비롯해 이종도 교수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학생들의 휴대폰이 동시에 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