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공대원 모임 (3)
삼겹살집 옆으로 난 작은 골목.
다른 아이들의 귀를 피해 선택한 한적한 공간엔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애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본론만 얘기할게.”
먼저 입을 연 쪽은 대화를 요청한 정웅이었다.
“솔직히 식당에서 마주친 건 우연이 맞는데, 네가 온다는 얘길 못 들었으면, 합석도 안 했을 거야.”
“왜지?”
오전에 같은 공대였다는 것을 제외하곤 별다른 친분이 없었을뿐더러 한 발 늦은 헬프로 인한 서운함까지 표출했던 터라 자신을 보기 위해 자리를 지켰다는 정웅의 고백이 낯설 수밖에 없었다.
“매직 아처에 대해 궁금해졌거든.”
“……?!”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 태주가 자신을 바라보는 정웅의 눈빛에서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비장함을 발견했다.
“모의 던전에서 죽었을 때 확실히 느꼈어. 아, 법사로는 부족하구나. 누군가의 도움 없이도 레이드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건 오직 매직 아처밖에 없구나라고.”
자신의 한계를 성급하게 인정해버린 정웅이 태주에게 느낀, 정확히 말하면, 매직 아처라는 희귀 클래스에게 느낀 법사로서의 열등감과 자괴감을 자조적인 어조로 털어놨다.
“그래서 한번 도전해보려고. 두 번째 매직 아처에…….”
합석의 이유.
정웅은 매직 아처의 길을 걷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롤 모델인 태주에게 제일 먼저 밝히고 싶었다.
“……?!”
연이은 깜짝 발언에 잠시 할 말을 잃은 태주가 가볍게 흘려들을 수 없는 정웅의 진지한 태도에 덩달아 조심스러워졌다.
물론 노력으로 쟁취할 수 있는 클래스가 아니란 걸 알고 있는 태주의 눈엔 안타까운 각오로 비춰졌지만.
“원래는 내일쯤 따로 얘기할 생각이었어. 뭐, 본의 아니게 기회가 닿아서 이렇게 고기까지 얻어먹었지만.”
매직 아처로의 전직을 선언한 정웅이 배를 문지르며 헛웃음을 지었다.
“다른 얘들한테는 비밀로 할 거야?”
“아니. 그냥 너한테 제일 먼저 얘기하고 싶었어. 왠지 그래야 될 것 같기도 했고.”
정웅은 자신의 무모한 도전을 숨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잘난 척을 즐기는 정웅의 입장에선 도전 그 자체만으로도 주목을 받을 수 있는 매력적인 목표이기도 했지만, 동기들보다 똑똑하다는 자만심이 스스로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목표만 설정했을 뿐, 매직 아처로 거듭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선 조금도 아는 바가 없었지만.
“참고로 어설픈 흉내에 그치진 않을 거야.”
상상만으로도 입꼬리가 올라간 정웅이 희망에 찬 얼굴로 자신 있게 말했다.
“내일 수업 시간 전까지, 아니, 오늘 당장 1372페이지부터 수정할 거거든.”
정웅은 헌터의 역사 시간에 작성한 장차 이루고 싶은 헌터로서의 목표에 매직 아처를, 그것도 1순위로 추가시킬 작정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너 입학시험 당일에 2차 각성한 거. 그거 진짜 우연이야?”
매직 아처로의 전직 계기가 궁금했던 정웅이 태주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물었다.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 막말로 2차든 3차든 궁수면 그냥 궁수로 각성하는 게 정상인데, 어떻게 너만 각성과 동시에 매직 아처로 전직할 수 있었냐 이거지. 심지어 노력 없인 불가능하다는 N차 각성을.”
랜덤하게 결정되는 초기 각성과 달리 2차 각성부터는 전적으로 개인의 역량에 좌우됐기 때문에 태주처럼 우연히 2차 각성에 성공했다는 것 자체가 정웅의 상식선에선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나도 몰라.”
열심히 추궁한 것이 허무할 만큼 정웅의 귀에 돌아온 대답은 간결했다.
“모, 모른다고?”
각성을 위한 작은 단서라도 얻고 싶었던 정웅이 믿고 싶지 않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설마 알려주기 싫어서 그런 건 아니고?”
“글쎄. 네가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 할 말이 없지만, 네 말대로 인위적인 방법에 의한 각성이었다면, 굳이 2차 각성에 머무를 필요가 있었을까?”
“…….”
태주의 차분하면서도 반박할 수 없는 논리에 정웅의 말문이 막혔다.
바로 그때.
“야, 류정웅, 그만 떠들고 태주 좀 보내. 1분 넘었어.”
계산을 마치고 나온 세준이 음침한 골목 안을 향해 휴대폰 불빛을 흔들어 대며 다그쳤다.
“아무래도 가봐야겠다.”
시스템의 존재를 숨긴 태주가 적절한 타이밍에 나타난 세준의 재촉을 핑계로 정웅과의 자리를 파하려 했다.
“아, 그리고.”
잠시 발걸음을 멈춘 태주가 갑자기 정웅의 한쪽 어깨에 손을 얹었다.
“도전을 말릴 생각은 없는데, 법사로서의 네 실력은 절대 부족하지 않아.”
“……?!”
법사를 선택한 것에 회의를 느끼고 있던 정웅이 기대한 적 없는 태주의 무심한 격려에 묘한 울림을 느꼈다.
‘미안한데, 그냥 하던 거나 해.’
물론 표면적인 훈훈함과 달리 태주의 격려엔 매직 아처로의 전직을 갈등하게 만들려는 견제의 의도가 내재되어 있었지만.
“그럼 내일 보자.”
정웅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인 태주가 베로닌의 주교를 연상케 하는 온화한 미소와 함께 좁다란 골목을 빠져나갔다.
*
*
*
다음 날.
‘정수리만 봐도 딱 우리 애들이네.’
헌터의 역사를 수강하러 온 태주가 계단형 강의실 곳곳에 엎어져 있는 자신의 공대원들을 한눈에 알아봤다.
‘그러게 2차까지만 하자니까.’
정웅이 빠진 이후로도 새벽까지 달린 터라 저항 스킬의 도움을 받은 태주를 제외하곤 하나같이 몬스터보다 물리치기 어렵다는 숙취와 싸우고 있었다.
‘그나저나 결석을 안 한 게 신기하네. 역시 학과장님 수업이라 그런가?’
지난 시간, 출석부도 없이 나타나 28기 전원의 얼굴과 이름, 심지어 클래스와 개개인의 특징들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던 한중연 교수의 완벽주의 성향으로 인해 대출이나 자체 휴강 등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물론 출석부 없이 나타난 건 함 교수도 동일했지만.
‘어디 앉지?’
마력이 아닌 술 냄새를 발산하고 있는 공대원들의 곁에서 3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던 태주가 적당한 빈자리를 찾아 눈동자를 움직였다.
‘어?’
강의실 안을 둘러보던 태주가 자신의 옆자리로 오라 손짓하고 있는 정웅의 낯선 모습을 발견했다.
‘또 무슨 일이지?’
어제의 대화가 이어질 것 같아 썩 내키진 않았지만, 동석을 피한다면 오히려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역시 술롱도르 출신답게 멀쩡하네. 다른 애들은 다 초주검 상태던데.”
1차 때 합석했던 녀석들의 흐트러진 모양새를 본 정웅이 태주의 맑은 눈동자를 신기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도 나온 게 어디야. 다들 7시부터 새벽 3시까지 달렸는데.”
정웅과 마찬가지로 형식적인 인사말을 생략한 태주가 헛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이 자린 일부러 비워둔 거야?”
태주가 인벤토리 안에 넣어둔 묵직한 전공 서적을 꺼내며 물었다.
“왜. 갑자기 친한 척해서 부담스러워?”
“같이 레이드도 뛰고 회식까지 했는데 부담스러울 게 뭐 있어.”
“그래? 난 또 골목에서 했던 말 때문에 불편해할 줄 알았지.”
“뭐야, 불편할 줄 알았으면 안 불러야 되는 거 아니야?”
“그건 그런데, 내가 또 하고 싶은 말은 꼭 해야 되는 성격이라.”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은 정웅이 안경의 브리지 부분을 검지로 밀어 올리며 말했다.
“뭐? 하고 싶은 말?”
태주가 정웅의 용건에 대해 추측해보던 바로 그때.
덜컥!
학생들의 휴식 시간을 온전히 보장함과 동시에 자신의 강의 시간 역시 최대한 확보하겠다는 마인드를 지닌 한 교수가 신념을 지키기 위한 타협점인 정시에 강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몇 시인데 아직도 엎어져 있나?”
텅
자고 있는 학생들을 발견한 한 교수가 두꺼운 전공 서적을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주의를 집중시켰다.
“다들 깨워.”
지친 몸을 이끌고 나타난 것까진 기특했지만, 출석의 의미가 없는 몽롱한 수업 태도는 도저히 모른 척할 수 없었다.
- “야, 교수님 오셨어. 일어나.”
- “…….”
주위에 있던 동기들이 어깨와 등을 흔들어대자 숙취에 괴로워하고 있던 아이들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간신히 상체를 일으켰다.
“으음. 오늘은 그래도 중간까진 내려왔구나.”
엎드린 인원이 없는 것을 확인한 한 교수가 출석을 부르기 전,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 앉아 지적을 받았던 대엽의 달라진 위치 선정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아, 네…….”
물론 주목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대엽은 한 교수의 말에 집중된 동기들의 시선을 부담스러워하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자, 그럼 지난번에 약속한 대로 이번 시간부턴 짧게 이름만 부르도록 하겠다. 최희범.”
다른 활동적인 전공과목들에 비해 집중력이 흐려지기 쉬운 만큼 이름이나 자리 등에 관계없이 무작위로 출석을 불러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의 차례가 언제인지 알 수 없게 만든 한 교수였다.
“네?! 아, 네.”
책상 밑에서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던 희범이 예상치 못한 부름에 화들짝 놀랐다.
“최희범, 정신 안 차려.”
“아, 죄송합니다.”
황급히 자세를 고쳐 앉은 희범이 머쓱한 표정으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로부터 약 5분 후.
100명의 목소리가 한 번씩 강의실 안을 울리고 나서야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됐다.
“다들 59페이지를 펴도록.”
- “네.”
“아참, 그리고.”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책장을 넘기고 있던 한 교수의 시선이 책에서 벗어나 학생들에게로 옮겨졌다.
“너희들 개개인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게시판에 올려둔 목표를 통해 잘 확인했다. 물론 게시물 옆에 표시된 조회수로 보아 다른 동기들의 목표엔 썩 관심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됐지만.”
한 교수의 뼈 있는 농담에 학생들이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건 무려 절반에 가까운 인원이 처음에 올린 목표를 한 번 이상 수정했다는 거다.”
- “와아, 다들 은근히 진심이었네.”
- “어? 난 안 고쳤는데?”
- “나는 처음부터 너무 세게 나간 것 같아서 몇 개 지웠어.”
- “야, 어차피 안 될 거 뭐 하러 고쳤냐?”
목표에 대한 달성 여부가 불분명한 만큼 수정의 필요성에 대한 아이들의 의견도 반반으로 엇갈렸다.
“물론 대부분의 수정이 현실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졌지만, 개중엔 매직 아처로의 전직을 희망하는 등 기존에 설정한 목표를 상회하는 파격적인 내용들도 있더군.”
- “뭐야, 매직 아처?!”
- “누군진 몰라도 패기 쩌네.”
- “그냥 장난친 거 아닐까?”
- “야, 누가 교수님께 제출하는 걸로 장난을 쳐.”
뜻밖의 사실에 놀란 학생들이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며 일제히 술렁였다.
‘결국 썼네.’
훈훈한 격려의 말로 전직의 의지를 약화시키려 했던 태주가 1372페이지를 수정하겠다고 했던 정웅의 얼굴을 쳐다봤다.
바로 그때.
“어?”
한 교수의 설명을 함께 듣고 있던 정웅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순간, 뭔가 이상함을 느낀 태주가 정웅의 의아한 반응에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저거 나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