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빌런 vs 헌터 (2)
“어? 몰랐어? 재룡이 아버지가 삼강 하베스트 대표잖아.”
“어? 삼강 하베스트면…….”
태주가 재룡이 가진 뜻밖의 배경에 흠칫 놀랐다.
“맞아. 대한민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던전 채굴 회사.”
게이트가 열리면 협회의 등급 측정과 함께 입찰이 시작된다.
물론 B급 이상의 게이트가 아닌 이상 경쟁이 치열하진 않지만, 원칙적으로는 특정 길드의 독식을 방지하기 위한 몇 가지 제한을 둔 상태에서 입찰이 시작된다.
특히 던전의 등급이 높아질수록 낙찰가는 높아지는데, 발생 빈도가 낮은 S급 던전의 경우 수십억을 호가하는 금액을 협회에 지불해야 게이트의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낙찰에 실패했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었다.
보통 응찰가순으로 적게는 3위, 많게는 10위까지 순위를 매겼는데, 첫 번째로 들어간 길드가 클리어에 실패할 경우 일종의 예비 합격자 제도처럼 추가 입찰을 통한 혼란 없이 다음 길드가 차순위로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긴, 네가 재룡이랑 따로 대화할 일이 없었으니까.”
현실이 이렇다 보니 길드의 입장에선 비싼 대가를 지불한 만큼 수익을 창출해야 했다.
던전의 보스를 잡고 게이트를 닫아 시민들의 안전을 구한다는 공익적인 필요성도 헌터의 존재 목적이긴 했지만, 실제론 던전 안에서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수익 창출 요소들이 레이드의 주된 이유가 된 것이다.
몬스터의 몸속 어딘가에 박혀 있는 마정석, 마정석을 입수하고 남은 몬스터의 사체, 던전 내벽에 광물처럼 박혀 있는 마나석과 강화석, 거기에 희박한 확률이지만 보스를 잡으면 얻을 수 있는 전설 등급 이상의 아티팩트까지.
한마디로 던전은 돈이 됐고, 돈 냄새를 맡은 자본가들은 하나둘 관련 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던전 채굴.
이름은 채굴이지만, 길드와의 계약을 통해 던전 안에서 확보한 모든 전리품들을 게이트 밖으로 안전하게 옮기는 일련의 행위가 던전 채굴 회사의 주된 업무였다.
“그럼 재룡이는 후계자 수업 때문에 늦는 거야?”
왠지 삼강 하베스트 정도 되는 중견 기업은 경영 승계를 위한 준비도 미리미리 해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런가 봐.”
물론 따로 연락을 받은 득구 역시 자세한 사정에 대해선 아는 게 없었지만.
“아아, 나도 학교 수업 대신 경영 수업 받고 싶다.”
재룡의 지각 사유를 전하던 득구가 갑자기 허탈한 표정으로 신세한탄을 늘어놨다.
“내가 아버지께 물려받을 거라곤 탈모랑 빚밖에 없는데……. 아니, 왜 모낭은 힐러도 못 살리는 거냐고!”
“으음. 이런 말 하긴 뭐 하지만, 힐러는 죽어가는 걸 살리는 거지 죽은 걸 살리는…… 아, 그럼 재룡이는 프로 헌터 자격을 따도 레이드가 아니라 경영 쪽으로 빠지겠네?”
득구의 울분에 눈치껏 말을 아낀 태주가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솔직히 개인은 말할 것도 없고, 길드를 차려 봤자 삼강으로 버는 수입이 훨씬 더 많을 텐데.”
메이저 채굴 회사의 경우 한 곳이 아닌 수십, 수백 곳의 길드와 계약을 맺은 상태에서 동시에 업무를 진행했기 때문에 수익적인 측면에서 길드를 압도할 수밖에 없었다.
“설령 필드 경험을 좀 쌓고 간다고 해도 아버지의 인맥이 워낙 화려해서 취업도 쉽게 될걸? 뭐, 길드의 입장에서도 삼강의 후계자를 뽑아서 나쁠 게 없고……. 아,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재룡이의 실력이 부족하다는 건 아니야.”
아차 싶었던 득구가 뒤늦게 손사래를 치며 한쪽 입꼬리를 어색하게 올렸다.
물론 다른 스펙들이 동일하다고 봤을 때, B급 전사인 재룡이 A급 전사인 득구보다 더 좋은 길드에 취업할 경우 아버지의 입김이 작용한 것은 아닌가라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 순 있었지만.
“아, 그나저나 함 교수님은 또 지각이시네. 수업도 다른 교수님들의 절반, 아니 3분의 1밖에 안 하시면서.”
이번엔 태주가 아닌 득구가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
“설마 오늘도 파리 목숨 취급만 당하다 대기실로 쫓겨나는 거 아니야?”
지난 시간, 태주의 공대원이었던 득구는 태주의 솔플을 원하는 함 교수의 즉흥적인 제안으로 인해 도전 기회 자체를 박탈당한 적이 있었다.
“글쎄. 워낙 예측할 수 없는 분이라.”
모른 척 두루뭉술하게 대답하긴 했지만, 태주는 이미 생존 미션만큼이나 인상적이었던 함 교수의 두 번째 수업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약 10분 후.
철컹!
“…….”
마치 첫 만남을 되풀이하듯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함 교수가 의욕 없는 눈빛으로 아이들을 둘러봤다.
- “야, 저런 거 보면, 교수도 꽤 할 만한 거 같지 않냐? 자기가 오고 싶을 때 마음대로 와도 되고.”
- “근데 난 늦게 오고 일찍 끝내서 나쁘지 않던데?”
불호가 압도적이었던 첫 시간과 달리 함 교수의 자유로운 수업 방식을 마음에 들어 하는 이들도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재룡 빼고 99명 맞지?”
재룡으로부터 이메일을 받고 온 함 교수가 성의 없는 목소리로 출결 상황을 확인했다.
- “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학생들이 다시 함 교수를 바라보며 간결하게 대답했다.
“조교.”
- “네, 교수님.”
모의 던전 입구를 지키고 있던 조교들이 함 교수의 부름에 카트를 밀며 다가왔다.
- “오늘도 생존 미션인가?”
- “뭐야, 그럼 또 1분 컷이야?”
- “어? 근데 저번 시간하고 다르게 무슨 상자가 있는데?”
- “그러게. 저건 또 뭐지?”
특수 고글이 쌓여 있는 카트 위엔 정체를 알 수 없는 상자 하나가 학생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바로 그때.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해본 사람만, 손.”
카트가 자신의 발 앞에 멈춘 것을 확인한 함 교수가 학생들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 “…….”
그러자 생각보다 많은 학생들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바로.”
손을 내리게 한 함 교수가 배신을 당한 적이 있다고 밝힌 여학생 한 명을 턱 끝으로 지목했다.
“거기, 너.”
- “예? 저요?”
“그래 너.”
두 번 말하는 것을 싫어하는 함 교수의 미간에 미세한 주름이 잡혔다.
“누구에게 어떤 식으로 배신을 당했지?”
- “어어, 전 친구끼리 소개시켰다가 둘이 더 친해졌을 때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순간, 첫 번째 고백에서부터 강한 동질감을 느낀 학생들이 자신의 경험담을 공유하며 일제히 혀를 내둘렀다.
- “와아, 진짜 개공감.”
- “나도 지금 누가 내 얘기 하는 줄.”
- “저래서 친구끼리는 소개시키면 안 돼.”
- “뭐, 솔직히 코드가 잘 맞아서 그렇다고 하면 할 말이 없는데, 그래도 나 때문에 친해진 건 사실이니까.”
- “야, 근데 저런 건 참 뭐라고 하기에도 애매하지 않냐? 왠지 나만 더 찌질해지는 거 같고.”
물론 함 교수가 생각하는 배신의 수준엔 한참 못 미치는 인간적인 서운함에 불과했지만.
“약해…….”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은 함 교수가 이번엔 지목이 아닌 지원을 택했다.
“더 센 거 없어?”
“저 있습니다.”
자신의 사연이 더 비참하다고 판단한 득구가 자신 있게 자원했다.
“말해 봐.”
“네. 제가 중3 때 왕따를 당하던 전학생을 여러 번 도와줬었는데, 이 개새……, 아니, 걔가 나중엔 왕따를 주도했던 애들이랑 친해져서 저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리고, 심지어 저를 집단 폭행까지 했었습니다.”
두 번째 고백 역시 결은 좀 다르지만, 동기들의 강한 공감대를 형성시키며 얼굴을 붉히게 만들었다.
- “이야, 저게 진짜 배신 아니냐?”
- “야, 이거에 비하면, 앞에 건 아무것도 아닌데?”
- “아아, 간만에 PTSD 씨게 오네.”
- “그러게. 내가 다 열받네.”
물론 학생들이 느끼는 분노에 비해 함 교수의 표정은 여전히 심드렁했지만.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함 교수가 득구에게 왕따 사건에 대한 후일담을 물었다.
“다행히 졸업하기 전에 각성을 해서 싹 다 쓸어버렸습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득구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와아, 혹시라도 용서했을까 봐 속으로 겁나 불안했네.”
- “역시 학폭엔 참교육이 답이지.”
- “게다가 이젠 A급 전사라 보복도 못 할걸?”
득구의 대처에 통쾌함을 느낀 아이들이 답답했던 가슴에 손을 얹으며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잘했어.”
칭찬에 인색한 함 교수마저 득구의 복수엔 너그러운 반응을 보였다.
“군자보구 십년불만.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는 뜻이야. 물론 인내하며 실력을 닦으라는 의미와 때를 기다리라는 의미도 함께 내포되어 있지만, 용서나 화해를 권하는 위선적인 가르침보단 훨씬 인간미 넘치는 격언이지.”
“감사합니다 교수님.”
불과 10분 전, 함 교수의 연이은 지각과 부족한 수업 시간을 비판했던 득구가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를 머금은 채 머리를 조아렸다.
“근데.”
“……?!”
고개를 들던 득구가 함 교수의 말에 잠시 멈칫했다.
“레이드 중에 일어난 배신은 복수가 어려워. 왜 그럴까?”
“으음. 그러니까 그게…….”
함 교수의 돌발 질문에 당황한 득구가 의미 없는 추임새를 넣으며 생각할 시간을 벌었다.
“배신을 당한다는 건 곧 죽음을 의미하거든.”
참을성이 부족한 함 교수가 자문자답을 하듯 득구의 대답을 불쑥 가로챘다.
- “……?!”
순간, 많은 생각을 들게 만드는 업계의 살벌한 민낯에 풀어져 있던 대기실의 분위기가 절로 숙연해졌다.
“참고로 헌터는 보험 가입이 잘 안 돼. 왜? 그렇게 되면, 사망 보험금 때문에 회사가 손해를 보거든. 특히 레이드처럼 자발적으로 위험을 감수하는 경우엔 더더욱 그렇고.”
함 교수의 말대로 현역 헌터들의 경우 보험사에 의해 고위험 직군으로 분류, 가입에 성공한다 해도 매달 엄청난 금액의 보험료를 부담해야 했다.
“근데 이렇게 예고 없는 죽음에 노출되다 보니 한 가지 부작용이 생겼어. 바로 무관심……. 한마디로 게이트 안에선 누가 죽어도 의심을 안 해. ‘아, 그냥 몬스터가 그랬나 보다’하고 마는 거지.”
- “…….”
남의 일처럼 흘려들을 수 없는 냉혹한 현실에 학생들의 침묵이 길어졌다.
“결국 이러한 맹점을 악용해 이득을 취하는 녀석들이 하나둘 등장하게 됐고, 우린 그들을 빌런이라 부르게 되었지.”
오늘 강의의 핵심 주제를 꺼내든 함 교수가 카트 위에 놓여 있는 추첨용 상자의 윗면에 난 동그란 구멍 안으로 오른손을 집어넣었다.
“그래서 오늘은 빌런과 헌터를 나눠 아주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될 거다.”
- “……?!”
증강 현실을 이용한 생존 미션 정도를 예상했던 학생들이 뜻밖의 제안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지난 시간에도 말했듯, 던전 안에서 죽는 더러운 기분을 체험해보는 게 이 수업의 궁극적인 목표니까.”
순간, 함 교수의 마른 입술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