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조 편성 (3)
“내가 멜라임의 벗이자 비테론을 빠져나온 마지막 생존자거든.”
보르가넨의 몸엔 왼쪽 가슴부터 대각선으로 길게 그어진 흉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
의외의 사실에 또 한 번 흠칫한 태주가 보르가넨의 얼굴과 흉터를 번갈아 쳐다봤다.
“표정을 보아하니 대충 설명이 된 모양이군. 하지만 그렇게 놀랄 것까진 없네. 목숨을 건진 대가치고는 아주 경미한 부상이니까.”
보르가넨이 손끝으로 상처를 쓸어내리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럼 멜라임과 성채에 남아 마지막까지 싸운 겁니까?”
“마지막까지라……. 글쎄. 마지막까지 싸웠다면 지금 이 자리에 없었겠지. 부끄럽지만, 난 친구를 버린 배신자네. 사실 벗이라 부를 자격도 없는 비겁한 겁쟁이지.”
윗옷을 내린 보르가넨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멜라임과 난 어렸을 때부터 마법을 익혔네. 비테론 최고의 법사가 되자는 약속과 함께 연습하고, 또 연습했지. 결과적으로 멜라임만 그 약속을 지켰지만, 나 또한 좋은 경쟁자를 친구로 둔 덕분에 나쁘지 않은 실력을 갖추게 됐다네. 물론 스스로에게 실망한 이후론 그 어떤 주문도 입 밖으로 내뱉은 적이 없지만…….”
태주의 예상대로 남다른 마력을 발산하던 보르가넨의 클래스는 법사였다.
“그럼 법사로서의 삶은 영영 포기한 겁니까?”
보르가넨의 영입 가능성을 열어둔 태주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조원 후보에게 동일한 목표가 부여되었다는 시스템의 설명과 달리 보르가넨에겐 성채로 돌아갈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혹시 갈등을 하고 있어서 그런가? 가고는 싶은데 섣불리 용기가 안 나서?’
물론 귀향에 대한 의지와는 별개로 실력에 대한 검증을 거치기 전까진 조원 리스트에 추가시킬 수 없었지만.
“하아……. 내 마법은 이미 존재의 목적을 잃었네. 더 이상 지킬 고향도, 가족도, 친구도 없는 내가 대체 무얼 위해 다시 법사의 길을 걷겠나.”
깊은 한숨과 함께 푸념 섞인 자책을 늘어놓던 보르가넨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리를 파하려 했다.
“난 그만 일어나 보겠네. 부디 신의 은총이 함께 하길.”
태주에게 형식적인 축복을 빌어준 보르가넨이 마지막 인사와 함께 테이블을 짚고 일어나려던 바로 그때.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습니까?”
태주의 단순하면서도 직설적인 물음이 보르가넨의 엉덩이를 다시 내려앉게 만들었다.
“뭐?”
“바로잡고 싶은 과거가 있냐고 물었습니다.”
“미안하지만, 그때로 돌아갈 수 있는 건 내 기억과 이 상처를 더듬어 보는 것뿐이네.”
검지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린 보르가넨이 겉옷에 가려진 흉터를 손바닥으로 천천히 쓸어내리며 말했다.
“네. 저도 그 마음 이해합니다.”
회귀를 통해 아쉬웠던 순간들을 바로잡고 있는 태주가 공감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허허, 내 마음을 이해한다고?”
태주의 사정을 알 리 없는 보르가넨이 헛웃음을 지으며 되물었다.
“하긴, 내게 자네의 심정을 부정할 자격은 없지. 하지만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든 바로 잡고 싶은 과거든 가정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럴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 아니겠나?”
질문의 의도를 어느 정도 눈치 챈 보르가넨이 회의적인 태도를 고수하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돌이킬 수 없기에 과거인 것이네. 그리고 이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이자 자연의 섭리지.”
“자연의 섭리……. 복수에 대한 두려움을 참 거창하게 포장하셨네요.”
태주가 변명으로밖에 안 들리는 보르가넨의 그럴듯한 자기합리화에 코웃음을 쳤다.
“…….”
순간, 불쾌함을 느낀 보르가넨의 미간이 심하게 구겨졌다.
“더 이상 지킬 고향도, 가족도, 친구도 없다고 하셨죠? 글쎄요. 제가 보기엔 자신감도 함께 잃은 것 같은데.”
보르가넨의 합류 의사를 가늠해보고 싶었던 태주가 민감한 부분들만 집요하게 파고들며 자극을 유도했다.
복수에 대한 최소한의 의지조차 사라진 상황이라면, 자신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마저 수긍하며 후회와 자책만 거듭하겠지만, 일침을 듣는 순간 불편함과 부담감을 느낀다면, 복수의 성공 가능성과는 별개로 전의가 상실되지 않았다는 것을 일정 부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뭐!”
태주의 도발적인 언사에 발끈한 보르가넨이 주먹으로 테이블 위를 내리쳤다.
쾅!
- “아이, 깜짝이야.”
- “뭐야, 무슨 일이야?”
때 아닌 소란에 화들짝 놀란 손님들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보르가넨을 돌아봤다.
“분노의 대상을 잘못 고르셨네요. 진정 분노해야 할 대상은 저와 이 테이블이 아닌 벨지오스와 그의 하수인들일 텐데. 아, 화풀이 대상이 필요하셨나?”
보르가넨의 격한 반응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태주가 덤덤한 얼굴로 테이블 위를 어루만졌다.
“근데 이 자식이 진짜!”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보르가넨이 태주의 멱살을 잡기 위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태주에게 달려들던 바로 그때.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맞은편에 있던 태주가 어느새 보르가넨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헉!”
태주가 앉아 있던 의자 위로 헛손질을 한 보르가넨이 황급히 뒤를 돌아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물론 태주의 움직임에 놀란 것은 보르가넨만이 아니었지만.
- “어! 저게 뭐야?!”
- “저 친구도 법사였나?”
- “법사도 보통 법사는 아닌 것 같은데?”
- “뭐지? 내가 너무 취해서 헛것을 봤나?”
- “취하긴 아직 한 병밖에 안 마셨는데.”
보르가넨에게 집중되었던 손님들의 시선이 점멸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태주에게 옮겨졌다.
“어, 어떻게…….”
태주를 단순히 무모한 모험가 정도로 여겼던 보르가넨이 멜라임에게서 느꼈던 것과 동일한 설명할 수 없는 위압감에 말끝을 흐렸다.
“때론 불편한 진실이 눈에 보이는 흉터보다 더 가슴 아픈 법이죠.”
보르가넨의 흉터가 위치한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주가 별일 아니라는 듯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앞서 밝혔듯이 전 비테론, 아니, 간악한 벨지오스의 성채로 갈 겁니다. 뭐, 아직 동료들을 모으고 있긴 하지만,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든든한 척후병 한 명을 먼저 출발시킨 상태죠.
태주가 팔찌를 돌려받지 못해 씩씩거리고 있을 티마란의 일그러진 얼굴을 떠올리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순전했고, 명망이 높았으며, 모든 이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멜라임. 만약 당신이 외로운 사투 끝에 명예롭지만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다면, 그는 어떻게 했을까요? 한 달이 흐르도록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대낮부터 술을 마시며 돌아가지 못할 이유만 찾고 있었을까요? 아님, 같은 길을 걸어온 친구의 복수를 위해 주저 없이 성채로 돌아갔을까요?”
“그만…….”
태주가 있던 자리에 무너지듯 내려앉은 보르가넨이 괴로움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스스로를 배신자에 비겁한 겁쟁이라고 하셨죠? 네. 두려울 때마다 눈을 감고 숨을 곳을 찾는 건 비겁한 겁쟁이들의 전형적인 특징이죠. 그러니 괴로울수록 눈을 더 크게 뜨세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외면이 아닌 직면이니까. 외면은 그저 괴로움을 잠시 잊게 해주는 일시적인 착각에 불과하죠.”
그 누구도, 심지어 보르가넨 본인조차 외면하고 있던 나약한 내면을 적나라하게 들춰낸 태주가 단호하고 냉정한 말투로 뼈아픈 가르침을 이어갔다.
“가슴에서 허리까지 그어진 그 흉터. 혹시 다시 입게 될까 두렵습니까? 조금 전엔 분명 목숨을 건진 대가치고는 아주 경미한 부상이라고 태연하게 드러냈던 것 같은데.”
“…….”
입을 굳게 다문 보르가넨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아꼈다.
“벨지오스의 하수인들이 그토록 강력합니까? 나쁘지 않은 실력을 가졌다 자부하는 법사의 몸에 목숨을 위협하는 상처를 남길 만큼?”
보르가넨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태주가 경험자에게 직접 조언 아닌 조언을 구했다.
“……그건 인간의 움직임이 아니었네.”
잠시 머뭇거리던 보르가넨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마법이 통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인간으로선 견디기 힘든 수준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녀석들은 달려들고 또 달려들었지.”
“그럼 하수인들의 흑마법을 풀거나 무력화시키는 방법은 없습니까?”
공성전을 목전에 둔 태주의 입장에선 적의 약점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흑마법을 푸는 것보단 해치우는 게 더 효과적이네. 물론 상대를 해치우기 전에 죽을 각오부터 해야겠지만……. 솔직히 멜라임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 정도 상처로 끝나지 않았을 걸세.”
“으음. 근데 아까부터 좀 이상했는데, 왜 몸에 아직도 상처가 남아 있는 거죠? 본인이 법사면 직접 치료를 시도할 수도 있고, 심지어 힐을 사용하면, 상처의 봉합은 물론 흉터까지 말끔하게 치유됐을 텐데. 혹시 마법이 아닌 의술의 힘을 빌려 치료를 받은 뒤 회복의 시간을 거친 겁니까?”
“그날 이후로 마법을 사용한 적도 없지만, 멜라임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 도저히 힐을 사용할 엄두가 나지 않았네. 어쩌면 염치가 없었다는 표현이 더 맞겠지만.”
“그럼 앞으로도 치료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겁니까?”
“애초에 배신자의 낙인처럼 흉터가 생기길 원했으니 평생 속죄하는 마음으로 가슴 안팎에 남겨둘 생각이네.”
“아니요. 저와 함께 비테론을 되찾으면 치유하는 걸로 하죠.”
“……?!”
보르가넨이 불가능해 보이는 조건을 마치 점심 약속을 잡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제안하는 태주의 담담한 태도에 두 귀를 의심했다.
“진짜 그곳에 갈 생각인가? 거긴 자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위험한 곳이네. 까딱 잘못하다간 성채에 도착하기 전에 늑대 인간의 밥이 될 수도 있어.”
“아아, 늑대 인간이요. 이참에 한번 알아보죠 뭐. 누가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진정한 포식자인지.”
점멸 스킬을 제외하곤 자신이 매직 아처라는 사실조차 밝히지 않은 태주가 보르가넨의 우려를 가볍게 웃어넘기며 자신 있게 말했다.
“허허, 이거 참,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군.”
보르가넨이 자신의 상식으론 이해되지 않는 태주의 강한 자신감에 난감한 기색을 표했다.
물론 티마란에게 그랬듯 보르가넨에게도 자신이 리더라는 사실을 확실히 각인시킬 작정이었지만.
“믿게 만들어드리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 전에 나쁘지 않은 실력부터 좀 확인해보고 싶네요. 제가 원래 짐이 될 것 같은 동료는 곁에 두지 않아서.”
“지금 내 실력을 의심하는 건가?”
“한 달 동안 쉬어서 그렇다는 핑계 따윈 안 들었으면 좋겠네요.”
“좋아.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짐짝 취급을 받지 않겠나?”
대화 내내 어두운 낯빛으로 일관했던 보르가넨이 두 팔을 걷어붙이며 처음으로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냥 편하게 절 공격해 보세요. 그럼 저에 대한 믿음도 자연스럽게 생길 테니까.”
태주가 보르가넨의 자신만만한 눈빛을 마주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