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5. 레이드의 기초1 (1)
다음 날.
개강 3일째를 맞이한 태주가 수업을 듣기 위해 트레이닝 돔 지하로 향했다.
잠시 후에 있을 강의의 이름은 레이드의 기초1.
전공 필수인 이 과목은 입학시험 때와 마찬가지로 증강 현실을 이용한 최첨단 트레이닝을 활용했는데, 직업 탐구1과 달리 다양한 클래스들이 모여 공대를 편성한다는 특징이 있었다.
물론 사람에 따라 공대를 편성하는 과정에서 큰 소외감을 느낄 수도 있었지만.
‘음?’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태주가 닫힘 버튼을 연타하고 있는 추균성을 발견했다.
탁! 탁! 탁! 탁! 탁! 탁! 탁! 탁!
‘나랑 타기 싫어서 아주 발악을 하네.’
새터 때 이후로 마주친 적이 없는 이유가 자신을 피해 다녔기 때문이라고 여긴 태주가 느슨해진 갑을관계를 바로잡기 위해 기를 쓰고 다가갔다.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오랜만이다?”
균성의 옆자리를 순식간에 꿰찬 태주가 어깨동무를 하며 서늘한 인사를 건넸다.
“헉!”
원치 않는 합승에 당황한 균성이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입만 뻥끗거렸다.
“이제 도피 생활은 그만 청산해야지. 안 그래?”
“어? 어, 그, 그래야지.”
표정 관리에 실패한 균성이 말까지 더듬어가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바로 그때.
철컹! 위이잉!
1초라도 빨리 내리고 싶은 균성의 바람과 달리, 눈치 없는 엘리베이터는 지하에 위치한 모의 던전을 향해 천천히 내려갔다.
“요새 많이 힘들어? 웃는 게 많이 어색해졌네?”
휴대폰을 꺼내든 태주가 추 비서라고 저장된 균성의 번호를 눌렀다.
“어? 아, 아니야. 그런 거…… 어?”
지이잉! 지이잉!
허벅지를 울리는 강렬한 진동에 균성의 손이 바지 주머니로 들어갔다.
바로 그때.
“야, 폰 줘 봐.”
어깨동무를 푼 태주가 균성의 배꼽 앞에 손바닥을 들이밀었다.
“폰…… 폰은 갑자기 왜?”
아차 싶은 생각이 든 균성이 반쯤 꺼낸 휴대폰을 주머니 속으로 슬그머니 밀어 넣었다.
“네가 내 이름을 어떻게 바꿔놨는지 궁금해서.”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턱!
반대편으로 이동한 태주가 휴대폰을 쥔 균성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어!”
다급하게 힘을 준 균성이 의미 없는 버티기에 들어갔지만, 태주 앞에선 A급 전사의 완력도 한낱 어린아이 수준에 불과했다.
“자…… 잠깐만! 내가 다 설명할게!”
단숨에 휴대폰을 빼앗긴 균성이 뒤늦게 수습을 해보려 했지만, 태주의 시선은 이미 진동과 함께 뜬 자신의 이름에 고정되어 있었다.
지이잉! 지이잉!
[믿거신]
“뭐야, 믿거신? 내가 분명 고용주라고 저장했을 텐데?”
페널티 건수를 잡은 태주가 균성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쏘아보며 변동의 이유를 추궁했다.
“설마 여기서 말하는 믿거신이 믿고 거르는 신태주. 뭐, 이런 거야?”
“어? 아니, 그러니까 그게…… 아! 맞다! 이거 내가 술 먹다 바꿔서 그래. 오타야! 오타!”
말술을 마실 때도 변하지 않던 균성의 안색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여간 새터 때부터 이 술이 문제야 술이. 원래는 믿거신이 아니라 믿쓰신이었어. 믿쓰신. 믿고 쓰는 신태주. 하하.”
“…….”
면피용으로 둘러댄 균성의 아무말 대잔치에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뻔히 내가 다가오는 게 보이는데 닫힘 버튼을 연타해?”
태주가 버튼을 누르듯 검지로 균성의 가슴팍을 쿡쿡 찍어 눌렀다.
“아니, 그건 내가 수업 시간에 늦은 것 같아서 그런…… 하아…… 미안.”
무의미한 반박을 포기한 균성의 시선이 참회의 한숨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앞으로 잘하자. 경고했다.”
태주가 불심검문을 마친 휴대폰을 균성의 손에 쥐여 주며 단단히 일러뒀다.
“네…….”
[고용주]
한결 고분고분해진 균성이 그 자리에서 바로 태주의 이름을 수정했다.
바로 그때.
철컹!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모의 던전 입구에 모인 동기들의 모습이 보였다.
“어! 태주야, 여기!”
이번에도 역시 GPS 같은 세준의 목소리가 목적지에 제대로 도착했음을 알려줬다.
- “태주야, 근데 너 오늘 왜 이렇게 늦게 왔어?”
- “그러게. 벌써 수업 시간이 5분이나 지났는데.”
미리 도착해 있던 궁수 모임 멤버들이 평소와 다른 태주의 늑장에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원래 출석 부르기 전까진 지각이 아니야.”
물론 교수 개개인의 성향과 특징을 파악하고 있는 태주의 입장에선 지금과 같은 이례적인 지각 또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현명한 판단이었지만.
‘어차피 최소 10분이다.’
사실 태주는 레이드의 기초를 맡은 함희준 교수가 단 한 번도 제 시간에 온 적이 없다는 걸 아는 유일한 신입생이었다.
*
*
*
잠시 후.
- “야, 오늘 수업 없는 거 아니야?”
- “그러게. 무슨 교수님이 첫날부터 이렇게 안 오시지?”
- “학과 사무실에 전화해 볼까? 오늘 휴강이냐고?”
삼삼오오 모인 100명의 아이들이 함 교수의 노쇼 사태에 난감해하고 있던 바로 그때.
철컹!
“…….”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함 교수가 의욕 없는 눈빛으로 아이들을 둘러봤다.
“없는 사람.”
출석부 하나 없이 빈손으로 나타난 함 교수가 학생들의 출결 상황을 성의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 “…….”
기다리게 한 것에 대한 사과는커녕 기본적인 출석조차 학생들에게 미룬 함 교수의 태도에 아이들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없으면, 클래스별로 집합.”
물론 학생들의 기분 따윈 개의치 않는 함 교수는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최소한의 말만 내뱉고 있었지만.
- “야, 분위기만 보면 법사가 아니라 완전 흑마법사인데?”
- “그러게. 학교 밖에선 네크로맨서로 활동하는 거 아니야?”
- “그나저나 무슨 교수님이 저렇게 의욕이 없어 보이지? 집에 무슨 일이 있나?”
- “글쎄. 내가 봤을 땐 그냥 수업을 하는 것 자체가 귀찮은 거 같은데?”
- “근데 그렇게 하기 싫으면 그냥 때려치우면 되는 거 아니야?”
- “그래도 정년은 채울 건가 보지 뭐.”
- “진짜 실력이 있는 건 맞나? 얼굴만 보면 은퇴한지 오래된 D급 법사 같은데.”
- “풉! 그래도 E급이라고는 안 하네?”
- “야, 그래도 명색이 한국대 교수인데 뭐가 있긴 있겠지.”
지시에 따라 자리를 옮기던 아이들이 함 교수의 첫인상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쏟아냈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닌데.’
물론 함 교수의 진가를 아는 태주의 귀엔 학생들의 성급한 평가가 무례하고 경솔하게 들렸지만.
‘선입견을 주는 외모라 그렇지, 함 교수님 역시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던 헌터 중의 헌터다.’
태주가 인지한 대로 함희준 교수는 한중연 학과장과 같은 4차 각성 법사였다.
‘그건 그렇고, 함 교수님이라면 진우의 심장 안에 응축된 재앙 등급의 마력을 제어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일명, 결계 마법의 최강자.
실제로 함 교수는 1급 통제 구역에 위치한 비밀 금고 속 재앙 등급 장비들의 봉인을 담당하고 있었다.
물론 홀쭉한 볼과 가느다란 팔목으로 인해 지금처럼 실력을 의심받는 경우가 더 많았지만.
“주목.”
전사, 법사, 힐러, 궁수, 어쌔신, 그리고 무투가로 나뉜 6개의 무리를 확인한 함 교수가 학생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레이드의 기초1을 맡게 된 함희준이다.”
한두 단어로만 소통하던 함 교수가 드디어 완전한 문장을 입에 담았다.
- “안녕하세요.”
인사할 타이밍을 놓쳤던 학생들이 함 교수의 자기소개에 맞춰 뒤늦게 고개를 꾸벅였다.
바로 그때.
“거기.”
함 교수가 하품을 하고 있던 균성을 시선으로 지목했다.
“네? 저요?”
함 교수와 눈이 마주친 균성이 자신의 명치를 검지로 가리키며 되물었다.
“피곤하면 집에 가.”
“아, 죄송합니다.”
지적을 받았다고 생각한 균성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뒷목을 매만졌다.
“진짜야. 집에 가.”
“네?!”
균성이 숙취로 인한 졸음마저 확 깨는 함 교수의 지나친 배려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헌터는 열심히 살 필요가 없거든.”
- “……?”
세상의 모든 상식을 거부하는 듯한 함 교수의 발언 하나하나가 아이들에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역시 염세주의자.’
호불호 중 불호가 압도적이었던 함 교수의 부정적인 기질을 재확인한 태주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조용히 상황을 지켜봤다.
“10명이 들어갔다 10명이 나오는 던전은 돈이 안 돼. 열에 아홉이 목숨을 잃고, 남은 한 명도 겨우 숨만 붙어 있는 곳. 그런 곳이 바로 로또라고 할 수 있지.”
- “…….”
던전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던 학생들의 낯빛이 강의를 하는 건지 겁을 주는 건지 알 수 없는 함 교수의 현실적이면서도 냉정한 조언에 점점 어두워졌다.
“근데 로또의 특징이 뭔지 알아? 어차피 넌 안 된다는 거.”
지루하리만큼 한결같던 함 교수의 입꼬리가 처음으로 올라갔다.
“그러니까 열심히 살지 마. 어차피 여기 있는 사람 대부분은 허무하게 죽으니까.”
“저, 교수님, 그래도 던전 안에서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공대 전술도 배우고, 개인 훈련도 하는 거 아닙니까?”
뭔가 아니다 싶었던 균성이 함 교수의 의견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훈련. 그럼 훈련된 고블린과 잠만 잔 드래곤 중에서 누가 더 까다롭지?”
“네? 아, 뭐, 그야 당연히 드래곤이…….”
“왜 그렇게 생각하지? 네 말대로라면 열심히 훈련을 한 고블린을 더 경계해야 되는데.”
“어…… 그러니까 그게…….”
“애초에 몬스터는 훈련 같은 거 안 해. 왜? 어차피 강하게 태어난 놈은 강하고, 약하게 태어난 놈은 약하니까.”
“…….”
함 교수의 극단적인 예시에 말문이 막힌 균성이 더 이상의 반론을 이어가지 않았다.
“우린 그냥 더 센 놈을 만나기 전까지만 살아 있는 거야. 그래서 열심히 훈련만 하다 죽으면 더 억울한 거고.”
되도록이면 부정하고 싶었지만, 경험으로 체득한 함 교수의 주장을 함부로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대체 레이드의 기초란 수업은 왜 맡으신 거죠?”
이번엔 A급 법사인 소영이 상기된 목소리로 따지듯이 물었다.
“왜냐고?”
소영의 질문에 코웃음을 친 함 교수가 또 한 번 미소를 머금었다.
“그 더러운 기분을 체험해 보는 게 바로 레이드의 기초거든.”
답변을 마친 함 교수가 CCTV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학생들의 뒤에 있던 모의 던전의 입구가 서서히 개방되기 시작했다.
“시간은 5분. 인원은 10명. 구성은 자유.”
왼손을 활짝 편 함 교수가 첫 번째 수업의 규칙을 느긋하게 설명했다.
“자, 이제 살고 싶으면 강한 녀석들끼리 뭉쳐라.”
- “…….”
함 교수의 첫 번째 손가락이 접히는 순간, 서로의 눈치만 살피던 아이들의 발이 본능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