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 새터 (12)
[“또 다른 질문 없습니까?”]
- “조장님과 부조장님도 출전할 수 있나요?”
[“아니요. 조장과 부조장의 경우 핸디캡의 종류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힌트 방지 차원에서 참여할 수 없습니다.”]
보물찾기 순서를 앞당기고 싶었던 아이들이 같은 조에 속한 선배들을 조르며 힌트를 구걸했다.
- “선배님, 그냥 우리한테만 살짝 알려주시면 안 돼요?”
- “네, 맞아요. 이거 어차피 다 재미로 하는 건데, 이왕 하는 거 우리 조가 1등하면 좋잖아요.”
- “다른 조들도 몰래 힌트를 주지 않았을까요? 아까 보니까 술 게임 한 번 했다고 확실히 친해진 거 같던데.”
[“자, 지금 곳곳에서 은밀한 제안들이 오가는 거 같은데, 부정행위가 적발될 경우 보물찾기에 참여할 수 없으니까 각 조의 조장과 부조장들은 다 사이드로 빠져주세요.”]
후배들의 무리한 요구에 난감해하던 선배들이 사회자의 지시에 얼른 무리를 이탈했다.
[“자, 그럼 출전 선수를 결정한 조부터 나와 머리띠를 고르도록 하겠습니다.”]
사회자의 설명이 끝나자 머리를 맞댄 신입생들이 작전 회의를 시작했다.
- “선수도 7명이고, 머리띠 색깔도 7개니까 안전하게 하나씩 고를까?”
- “그러게. 괜히 중복된 걸로 골랐다가 안 좋은 게 걸리면 돌이킬 수도 없으니까.”
대부분의 조는 색상에 따른 리스크를 분산하기 위해 균형 잡힌 선택을 하려했다.
오직 한 곳, 태주가 속한 9조만 제외하고.
“난 속이 좀 안 좋아서 빠질게.”
핸디캡의 종류를 알고 있는 위장 신입생 김환이 사전에 협의된 대로 출전을 거부했다.
- “근데 우리 조는 뭐로 하지?”
- “우리도 다른 조들처럼 한 가지 색깔씩 맡을래?”
- “그래, 뭐, 모두가 같은 선택을 하면 실력으로만 겨룰 수 있으니까.”
- “태주야, 네 생각은 어때?”
하나의 의견으로 몰아가던 조원들이 마지막으로 태주의 뜻을 물었다.
“글쎄. 그냥 하나로 통일하는 게 재밌지 않을까?”
- “뭐?!”
조원들이 태주의 깜짝 제안에 두 귀를 의심했다.
- “그러다 진짜 이상한 거라도 걸리면 어떡하려고 그래.”
- “그 말엔 나도 동의. 막말로 핸디캡 매치인데, 같은 색으로 몰빵하면 서로 도와줄 수도 없잖아.”
- “그러게. 솔직히 나도 태주 말이라면 다 믿는 편인데, 이번만큼은 다수결을 따르는 게 좋을 것 같아.”
아이들의 반발을 예상했던 태주가 자신의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액션을 취했다.
“그래? 그럼 나도 김환처럼 빠질게.”
- “뭐?!”
태주의 생각지도 못한 결정에 조원들이 또 한 번 식겁했다.
- “태주야, 네가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이겨.”
- “그래. 처음부터 우린 너만 믿고 있었는데.”
- “혹시 색깔 때문에 그래? 그럼 우리가 네 말대로 할게.”
1등을 기대하고 있던 조원들이 태주의 초강수에 황급히 태도를 바꿨다.
- “태주야, 그럼 우린 무슨 색으로 할까?”
태주의 눈치를 살피던 조원 하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으음. 글쎄.”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지만, 의심을 피하기 위해 잠시 고민하는 척을 했다.
- “태주야, 빨간색은 어때? 뭔가 강렬한 게 다 같이 쓰면 멋있을 거 같은데.”
- “신입생의 이미지엔 노란색이나 초록색이 더 잘 맞지 않아?”
- “보라색도 특이하긴 한데, 좀 그렇겠지?”
태주가 뜸을 들이자 아이들이 선호하는 색깔을 추천하기 시작했다.
“근데 남색은 한 명도 추천을 안 하네? 난 남색이 좀 끌리는데.”
조원들의 취향을 가만히 듣고 있던 태주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뭐? 남…… 남색?”
핸디캡의 종류를 알고 있던 김환이 태주의 선택에 화들짝 놀랐다.
- “근데 남색은 좀 그렇지 않아?”
- “그러게. 뭔가 특색도 없어 보이고.”
- “야, 그래도 이왕 태주 말에 따르기로 한 거 그냥 남색으로 가는 게 어때?”
- “그래. 지금까지 태주가 나서서 안 좋았던 적은 없잖아. 어제 술롱도르도 그렇고.”
- “에라 모르겠다. 그럼 나도 찬성.”
- “나도.”
기나긴 토론 끝에 결국 태주의 뜻에 따라 남색으로 통일하자는 결론이 내려졌다.
잠시 후.
[“우리상조는 아직도 결정을 못 내린 겁니까?”]
머리띠를 나눠주던 사회자가 마지막으로 남은 9조의 상황을 물으며 선택을 재촉했다.
- “네! 지금 나갑니다!”
- “가요!”
9조에서 선발된 7명의 출전 선수들이 태주를 앞세운 채 테이블 앞으로 나아갔다.
[“자, 술롱도르의 수상자이자 28기 최고의 기대주인 신태주 선수가 방금 남색 머리띠를 선택했습니다. 어? 그 다음 조원 역시 남색을 선택했는데요. 같은 색깔이 두 명 이상 들어간 조는 처음…… 어! 이게 무슨 그림이죠? 우리상조에서 나온 선수들이 모두 남색만 집어가고 있습니다!”]
앞선 조들과는 확연히 다른 9조의 극단적인 선택에 사회자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 “아니, 어떻게 한 가지 색으로만 통일하지?”
- “모 아니면 도라는 건가?”
- “그냥 경기를 포기한 거 아니야?”
- “잘됐네. 어차피 태주네 조가 제일 걱정이었는데.”
- “그러게. 최소한 꼴등으로 출발하진 않겠네.”
술렁이던 아이들이 한편으론 9조의 무리수를 다행이라 여기고 있었다.
물론 김환이 그랬듯 사회자를 비롯한 선배들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사라지고 있었지만.
[“신태주 선수! 혹시 이러한 결정을 내리게 된 특별한 이유라도 있을까요?”]
당황한 사회자가 자리로 돌아가려는 태주를 향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 네이비색이 좋아서요.”
발걸음을 멈춘 태주가 사회자를 돌아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그래도 한 가지 색에 올인하는 건 좀 위험하지 않을까요? 심지어 잠시 후에 있을 보물찾기의 참여 순서도 피구의 결과에 따라 결정되는 건데. 뭐, 원하신다면, 딱 한 번 바꿀 수 있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사회자가 선심을 쓰는 척 다른 선택지를 유도했다.
“으음. 그럼 마지막에 출발하죠, 뭐.”
사회자의 의도를 눈치챈 태주가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최후의 유혹을 뿌리쳤다.
[“아, 네. 그럼 그 선택이 어떠한 결과로 이어질지 기대해 보면서…….]
태주의 마음을 돌리는 것에 실패한 사회자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이동식 화이트보드 앞으로 이동했다.
[“각각의 머리띠에 부여된 핸디캡의 종류를 지금 바로 공개하겠습니다.”]
촤악!
사회자가 화이트보드를 가리고 있던 커다란 종이를 힘차게 뜯어냈다.
- “어! 뭐야 저거!”
- “야 이 씨! 완전 망했어!”
9조를 제외한 모든 조가 핸디캡을 확인하는 순간 탄식을 내뱉었다.
[빨: 헤드폰과 귀마개 착용]
[주: 한 손만 사용하기]
[노: 외발로 움직이기]
[초: 공격 불가 (패스와 방어만)]
[파: 안대 착용]
[남: 정상 플레이]
[보: (전신) 펭귄 탈 쓰고 하기]
- “와!”
7명 전원이 남색을 고른 우리상조 조원들이 뜻밖의 결과에 환호성을 질렀다.
- “신태주! 어이! 신태주! 어이!”
반대 의견을 냈던 아이들마저 언제 그랬냐는 듯 태주의 이름을 연호하며 축제 분위기를 연출했다.
- “미친 척 한 가지 색깔로 통일한 게 남색인데, 그게 마침 노 핸디캡이라고? 이게 말이 돼?”
- “야, 이거 조장이 미리 알려준 거 아니야?”
다른 조에 속한 아이들이 9조의 선택에 의문을 제기됐다.
[“9조 조장님, 혹시 조원들에게 머리띠와 관련된 힌트를 준 적이 있습니까? 예를 들면, 술김에 얘기를 했다든지.]
아이들과 같은 의구심을 품고 있던 사회자가 지희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아니요. 전 오늘 아침까지 빨간 팔찌를 차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고요.”
용의자로 몰린 지희가 세상 억울한 표정으로 자신을 향한 의혹을 반박했다.
“더구나 저희 조원들만을 위해 양심을 판 적은 더더욱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조원에게도 한 번 물어보죠. 어…… 거기 머리띠 없는 학생?”]
사회자가 9조에 섞여 있던 위장 신입생을 의도적으로 지목했다.
“네?”
[“조장의 말이 모두 사실입니까?”]
“네. 심지어 저희 조는 체육 활동이 있다고만 들었지 피구를 한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선택 과정에 개입한 적 없는 김환이 차분한 목소리로 지희의 결백을 주장했다.
[“…….”]
지희가 태주의 팬인 걸 아는 사회자가 잠시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곧이어 나온 김환의 대답에 침묵으로 수긍했다.
[“그럼 이 사태의 장본인인 신태주 학생에게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정말 머리띠의 색깔을 남색으로 통일한 이유가 개인적인 취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까?”]
우연이었음을 인정한 사회자가 다른 아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질문했다.
“네. 하지만 그래도 못 믿으시겠다면, 저희도 다른 조와 똑같은 조건에서 경기를 진행하겠습니다.”
불쾌한 표정을 연기하던 태주가 시위를 하듯 머리띠를 벗어버렸다.
[“아니요. 이 문제에 대해선 더 이상 언급하지 않을 테니까 그대로 착용하세요.”]
태주의 기세에 눌린 사회자가 손사래를 치며 한 발짝 물러섰다.
‘진작 그럴 것이지.’
승리를 위한 첫 번째 조건을 갖춘 태주가 머리띠를 쓰며 다음 작전을 준비했다.
[“자, 그럼 오해도 풀렸으니 이제 조 추첨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사회자가 신호를 주자 선배 한 명이 커다란 상자 하나를 들고 와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여기 보이는 이 상자 안엔 A부터 E까지 적힌 공이 각각 2개씩 총 10개가 들어 있습니다.”]
상자 위에 뚫린 작은 구멍 안으로 팔을 집어넣은 사회자가 공 하나를 꺼내어 아이들에게 보여줬다.
[“같은 알파벳을 뽑은 조끼리 1회전에서 맞붙게 되는데, 특별히 슈퍼 부전승이란 개념을 추가시켜 대진표를 완성했습니다.”]
- “슈퍼 부전승은 또 뭐지?”
- “말 그대로 다른 팀에 비해 경기 횟수가 적은 건가?”
머리띠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이들이 새로운 핸디캡의 등장에 또다시 술렁였다.
[“자, 일단 여기를 보시죠.”]
화이트보드를 뒤집자 미리 그려둔 토너먼트 대진표가 나왔다.
[“A부터 D까지 적힌 공을 뽑은 8개의 조는 3번을 연달아 이겨야 결승에 진출하지만, E가 적힌 공을 뽑은 2개의 조는 슈퍼 부전승 대진에 속하게 되어 승리와 동시에 결승으로 직행하게 됩니다.”]
- “어? 그럼 떨어진 조들끼리는 순위를 어떻게 정하죠?”
신입생 중 한 명이 사회자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같은 단계에서 떨어진 조들끼리는 상대방을 아웃시킨 횟수에 따라 순위를 정하고, 그마저도 같다면, 신속한 승부를 위해 경기 시간이 짧은 순서대로 승자가 결정됩니다.”]
- “야, 우리상조가 E가 적힌 공까지 뽑진 않겠지?”
- “에이 설마. 그리고 어차피 팔만 넣는 거라 뭐가 나올지 아무도 몰라.”
확률은 1/5.
아이들의 말대로 공에 적힌 알파벳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물론 그에 대한 해결책 역시 태주의 머릿속에 들어 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