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3. 새터 (9)
패시브 스킬이 발동하는 순간 타들어갔던 식도가 물을 삼킨 것처럼 평온해졌다.
‘와…….’
살짝 흔들렸던 태주의 동공이 저항의 효과로 제자리를 찾았다.
‘이거 완전 대박인데?’
알코올 함량이 높은 술인 건 맞지만, 강력한 상태 이상 공격으로 인정되진 않아 어떠한 대미지도 입지 않았다.
‘이 정도 독성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대미지 감소의 비율은 최소 51%에서 최대 100%까지지만, S급 게이트 안에 서식하는 맹독성 몬스터에게 공격받지 않는 이상 최소 비율이 나올 일은 없었다.
‘잠깐. 이러면 추균성이 문제가 아니라 역대 최고 기록도 깨겠는데?’
태주가 기억하는 추균성의 기록은 19잔이지만, 술롱도르 사상 최고의 기록은 그보다 3잔 더 많은 22잔이었다.
‘명예의 전당에 오르면 술롱도르 배지도 금으로 만들어 준다던데.’
심지어 인근 술집의 할인율도 무려 80%까지 확대시킬 수 있었다.
[“자! 바로 두 번째 잔을 돌리겠습니다!”]
도전자들의 술잔이 모두 채워지면 별도의 신호 없이 다음 라운드가 진행되는 방식이었다.
탁! 탁!
- “어! 신태주랑 추균성은 벌써 마셨어!”
두 사람의 압도적인 스피드에 아이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 “야, 신태주는 표정 하나 안 변하는데?”
- “뭐야, 그냥 물 마시고 있는 거 아니야?”
탁! 탁! 탁! 탁!
다른 4명의 경쟁자들도 술잔을 내려놨지만, 두 사람에 비해 안색이 어두웠다.
잠시 후.
- “푸!”
술을 머금은 채 삼키지 못하고 있던 참가자 한 명이 결국 물대포를 발사했다.
[“아! 드디어 첫 번째 탈락자가 발생했습니다!”]
- “야, 그래도 7잔까지 갔으면 오래 버틴 거 아니냐?”
- “그러게. 난 냄새만 맡아도 미치겠던데.”
다른 아이들과 달리 스피리터스를 경험해본 허수들은 술을 뿜어내는 탈락자의 모습을 보고도 쉽게 웃지 못했다.
[“신태주 학생과 추균성 학생을 제외하곤 다들 위태로운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탁! 탁!
[“아! 말씀드리는 순간, 8번째 잔을 돌파했습니다!”]
“제법인데?”
손등으로 입에 묻은 술을 닦아내던 균성이 태주를 돌아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근데 난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심리전에 들어간 균성이 자신의 주량을 과시하며 태주를 도발했다.
“…….”
물론 흔들릴 이유가 없는 태주는 세상 여유로운 얼굴로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지만.
1분 후.
- “비…… 비닐 좀…… 우웩!”
10잔째에 접어들자 두 번째 탈락자가 나왔다.
- “으!”
지켜보던 관객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 “야, 내가 아까 그랬잖아. 저거 한 병이면 디오니소스도 필름 끊긴다고.”
술의 신을 끌어다 비유할 만큼 스피리터스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 “근데 저딴 술은 왜 만든 거지?”
- “나도 그게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원래 주스나 탄산음료에 희석해서 마시는 거래.”
- “아아, 어쩐지.”
[“자! 다른 참가자들에게 방해되지 않게 빨리빨리 치워주세요!”]
어느새 달려온 선배들이 현장을 정리하며 탈락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바로 그때.
- “웁! 우웩!”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던 참가자 한 명이 두 번째 탈락자의 실수를 보고 덩달아 속을 게워냈다.
[“아! 불과 5초 사이에 또 한 명이 탈락했습니다!”]
이제 남은 사람은 3명.
탁! 탁!
현장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지만, 태주와 균성은 한결같은 속도로 레이스를 이어가고 있었다.
- “후.”
거침없이 잔을 비운 두 사람과 달리 나머지 한 사람은 잔을 내려다보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 잔은 들었지만, 선뜻 입에 대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회자가 15초로 맞춰진 타이머를 작동시킨 뒤 관객들에게 보여줬다.
[“설마 이대로 포기하나요!”]
- “…….”
급격하게 말이 없어진 참가자가 끝끝내 비우지 못한 술잔을 바닥에 내려놨다.
[“아! 결국 양자 대결 구도로 가게 되었습니다!”]
사회자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결과였다.
그로부터 1분 후.
탁! 탁!
15번째 잔을 내려놓은 균성이 충혈된 눈으로 태주의 옆모습을 쳐다봤다.
‘이 새끼 왜 이렇게 멀쩡하지?’
당시의 기록은 19잔이었지만, 이번엔 일찍 한계에 다다랐다.
태주에게 지기 싫어 선배들이 나눠준 숙취 해소제도 거부했고, 강력한 라이벌의 등장으로 멘탈까지 흔들렸기 때문이다.
“이제 슬슬 포기하지 그래.”
위기감을 느낀 균성이 또 한번 태주의 신경을 자극했다.
바로 그때.
탁!
16번째 빈 잔을 내려놓은 태주가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나지막이 응수했다.
“15초 남았다.”
- “요!”
- “뿌이뿌이뿌이뿌이!”
경기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태주의 조용한 한 방에 관객들이 광기 어린 환호를 보냈다.
‘이런 씨.’
다급해진 균성이 사약을 받는 눈빛으로 독주를 털어 넣었다.
[“아! 추균성 선수! 처음보다 표정이 많이 굳어졌는데요!”]
- “야, 신태주 쟤는 진짜 괴물 아니냐?”
- “그러게. 금방 딴 콜라만 마셔도 목이 따끔거리는데, 어떻게 96%짜리 알코올을 들이부어도 눈 하나 깜짝 안 하지?”
- “아, 내 말이. 심지어 ‘크으’ 소리도 안 내.”
- “아무리 S급이라도 그렇지 사람이 저렇게까지 평온할 수가 있나?”
이제 아이들은 승부의 결과보다 끝을 알 수 없는 태주의 무한한 잠재력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뭐지, 이 미친 새끼는? 난 이렇게 죽을 것 같은데, 저 새낀 왜 아직도 멀쩡한 거야! 왜!’
술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고 싶지 않다던 균성이지만, 자존심만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압도적인 존재의 등장에 열등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탁!
[“아! 이번에도 역시 신태주 선수가 먼저 잔을 내려놨습니다!”]
흥분한 사회자가 태주에게 다가가 인터뷰를 시도했다.
[“신태주 선수! 진짜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마이크를 들이댄 선배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태주의 안색을 살폈다.
“저, 선배님.”
태주가 지금 막 숙면을 취하고 일어난 사람처럼 개운한 얼굴로 사회자를 불렀다.
[“네! 말씀하시죠!”]
“기다리기 지루해서 그런데 그냥 한 10잔 정도를 미리 깔아주시면 안 될까요?”
술만 마시면 폭력적으로 변하는 균성의 주사를 이용해 흑역사를 남겨줄 생각이었던 태주가 자존심을 건드리는 작전으로 폭음을 유도하기 시작했다.
[“네?! 열…… 열 잔씩이나요?!”]
두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태주의 파격적인 제안에 모두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신태주 선수! 혹시 취해서 말이 헛나온 건 아니죠?!”]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한 사회자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되물었다.
“아니다. 괜히 두 번 일할 필요 없으니까 그냥 병으로 주세요. 아, 원샷이면 입 대고 마셔도 되죠?”
혀가 꼬여도 이상하지 않은, 어쩌면 그래야 정상인 상황이었지만, 지금 당장 아나운서 시험을 봐도 될 만큼 태주의 발음은 또렷하고 정확했다.
- “마, 말도 안 돼…….”
- “야,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건 아니지? 뭐? 병으로 달라고?”
- “그냥 상대방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아닐까?”
- “그러게. 경기 초반도 아니고, 막판에 병나발은 좀…… 솔직히 저런 상태에선 옆구리만 찔러도 무지개 토가 나오잖아. 안 그래?”
- “근데 신태주가 지금까지 뻥카를 친 적은 없지 않냐?”
- “어? 그건 또 그러네.”
워낙 이례적인 행동이라 태주를 응원하는 입장에서도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었다.
[“추균성 선수! 신태주 선수의 분위기상 한두 잔으로 끝날 것 같지 않은데, 혹시 기권하실 생각은 없습니까?!”]
TKO를 염두에 둔 사회자가 균성의 도전 의사를 확인했다.
탁!
“아뉘요! 저도 병우로 과겠숨돠…….”
뒤늦게 잔을 내려놓은 균성이 눈에 띄게 꼬인 발음으로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했다.
‘걸려들었어.’
덥석 미끼를 문 균성의 어리석음에 태주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 술롱도르 역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 “야, 이건 진짜 소장각이다.”
- “人수다에 올리면 좋아요 좀 받겠는데?”
명승부가 나오리라 직감한 관객들이 휴대폰을 꺼내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자! 마시는 양은 달라졌지만, 승패를 가르는 방식은 동일합니다.”]
사회자가 신호를 주자 선배들이 다가와 소주잔을 치웠다.
[“1등을 기준으로 15초! 두 사람의 격차가 15초 이상 발생하면, 그대로 대결이 종료됩니다.”]
탁! 탁!
결국 두 사람의 바람, 아니, 태주의 계획과 균성의 오기에 따라 개봉되지 않은 술병이 세팅됐다.
[“자! 과연 술롱도르의 영광은 누구에게 돌아갈지! 아! 말씀드리는 순간, 신태주 선수가 먼저 뚜껑을 열었습니다! 아! 이에 질세라 추균성 선수도 술병을 들었는데요! 어?! 신태주 선수가 갑자기 술병을 입에 문 채 팔짱을 꼈습니다! 설마 손을 대지 않고 마시려는 걸까요?! 아! 이게 뭐죠?! 신태주 선수가 고개를 젖혀 술병을 들어 올렸습니다! 아! 거꾸로 세워진 술이 무서운 속도로 줄어들고 있습니다! 마치 식도가 열린 것처럼 보이는데요! 우와! 보이십니까 여러분! 신태주 선수가 마지막 한 방울까지 깔끔하게 해치웠습니다!”]
쇼맨십까지 갖춘 태주의 화려한 퍼포먼스가 모두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여러분! 이게 정녕 실화란 말입니까!”]
흥분한 사회자가 관객들을 돌아보며 목이 터져라 외쳤다.
- “씨발! 다 찢었다!”
- “이런 미친! 추균성이 인간계면, 신태주는 신계다! 신계!”
- “처음엔 S급이라서 그런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까 그냥 신태주가 대단한 거였어!”
- “와…… 태주가 태주했네.”
과격한 애정표현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소문을 듣고 온 세준이 태주의 이름을 연호하며 아이들의 호응을 유도했다.
- “신태주! 어이! 신태주! 어이!”
태주의 우승이 기정사실화되고 있는 동안, 바로 옆에선 들러리로 전락한 균성이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 “야, 추균성은 마시는 것보다 흘리는 게 더 많은데?”
- “그러게. 그냥 알코올로 샤워를 하고 있네.”
아이들의 지적대로 균성의 자세는 이미 흐트러진 지 오래였다.
[“추균성 선수! 이제 그만 경기를 포기하는 게…….]
타이머를 확인한 사회자가 균성의 앞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바로 그때.
“넌 또 뭐야 이 씨…….”
퍽!
필름이 끊긴 균성이 사회자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쳐냈다.
[“으악!”]
쿵!
중심을 잃은 사회자가 엉덩방아를 찍으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 “뭐야! 지금 선배를 친 거야?!”
- “와…… 나중에 어떻게 수습하려고 그러지?”
- “손버릇이 주사면 앞으로도 같이 못 놀겠네.”
하나부터 열까지 태주의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최악의 신입생은 네가 될 거 같다.’
균성의 추태를 목격한 태주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태주는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지만, 방 안엔 김환을 제외한 나머지 위장 신입생 2명이 균성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1년간 내 심부름꾼 노릇이나 잘해라.’
태주가 최고의 신입생으로 선발되는 순간, 균성은 태주의 부하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야! 저 새끼 밖으로 끌어내!”]
몸을 일으킨 사회자가 균성을 가리키며 불같이 화를 냈다.
바로 그때.
“웁!”
술이 목젖까지 차오른 균성이 태주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야! 저 새끼 토하려고 그런다!”
- “어! 저러다 태주 머리에 쏟겠는데?!”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균성이 태주의 어깨를 짚으며 토사물을 쏟아냈다.
물론 태주의 모습은 이미 온데간데없었지만.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