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 개비스곤 (2)
입구에서부터 빈소까지 이어진 수십 개의 근조화환이 그녀의 죽음을 실감하게 했다.
[대한헌터협회 회장 송기철]
역시 제일 눈에 띄는 자리엔 협회장님의 리본이 달려있다.
대학교 1학년 때 이후론 한 번도 못 뵀는데.
물론 만남을 피하신 건 아니다.
내 스스로가 당당하지 못해 연락을 못 드린 건데, 회장님께선 이미 내 상황을 알고 계셨을 거다.
[아레나 길드 대표 이동규]
아레나.
5대 길드 중 하나로 유리를 4학년 때 스카우트했던 곳이다.
난 서류심사에서 탈락했는데.
헌터학과의 여신이었던 유리는 무려 A급 힐러였다.
기수열외를 당한 내게 힐을 걸어줄 만큼 인정도 많았는데, E급 궁수인 난 딱히 도움을 준 기억이 없다.
다치기만 더럽게 많이 다치고.
어? 아레나의 대표가 이쪽으로 다가온다.
실물을 본 건 오늘이 처음이지만, 워낙 유명 인사라 얼굴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나저나 벌써 가는 건가?
S급 어쌔신인 이동규 대표는 협회장님과 같은 5차 각성자다.
물론 레드오션 시기에 쌓은 커리어라 난이도적인 측면에선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사실 S등급 이후론 특별한 분류 방법이 없었다.
2차 각성을 통해 S급이 되든, S급 상태로 추가 각성이 일어나든 대외적으론 S급 하나로 통일시킨다는 뜻이다.
“…….”
이동규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이게 바로 5차 각성인가.
다른 S급들과는 차원이 다른 위압감이다.
협회장님을 뵀을 때도 이런 느낌이었는데.
“친구예요?”
지나칠 줄 알았던 이동규가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네? 아, 네. 대학 동기였습니다.”
왜 그러지?
면접 때보다 지금이 더 긴장된다.
“대학 동기…….”
이동규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몸조심해요. 내가 던전 다음으로 자주 가는 게 빈소니까.”
씁쓸한 조언을 남긴 이동규가 장례식장을 빠져나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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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사진 속 유리의 미소가 너무나도 생생하다.
잘 가.
헌화를 마친 난 복잡한 심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런.
동기들과의 사이가 껄끄러워 일찍 왔는데…….
“어?”
우연히 마주친 동기 녀석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다른 동기의 빈소엔 나타난 적이 없으니까.
“너도 문자 받았어?”
뭐? 너도?
뉘앙스에서부터 날 동기로 생각하지 않는 게 느껴졌다.
“어. 그럼 나 먼저 갈게.”
자리를 피하려는 순간, 동기 녀석에게 손목이 잡혔다.
“뭐야, 밥도 안 먹고 바로 가는 거야?”
A급 무투가라 그런지 악력이 겁나 세다.
윤철용.
각성이 있기 전부터 태권도 선수였는데, 이 녀석과는 특별한 악연이 없었다.
“이왕 온 거 육개장이라도 한 그릇 먹고 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리 보러 온 건데.”
유리가 내게 호의를 베푼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
*
*
“자, 한 잔 받아.”
테이블에 마주 앉은 철용이 태주의 잔에 소주병을 들이밀었다.
“아니. 장례식장에선 건배도 안 하고, 술도 각자 따라 마시는 거라.”
태주가 자신의 잔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말했다.
“아, 그런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술병을 거둔 철용이 자신의 잔을 채우며 형식적인 근황을 물었다.
“근데 넌 뭐하고 지냈냐?”
“나야 뭐.”
어색한 웃음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이었다.
“그럼 넌? 졸업하자마자 태동에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태동 역시 아레나와 마찬가지로 5대 길드에 속했는데, 두 길드 모두 날 떨어뜨렸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야, 말도 마. 수습이라고 선배들이 어찌나 부려먹는지 하아…….”
소주를 원샷한 철용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빈 잔을 채웠다.
“뒤후리기로 턱을 날려버리고 싶은데, 진짜 간신히 참았다.”
취업만 되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는데.
취준생인 나에겐 배부른 소리로 들리지만, 겪어본 적 없는 고민이니 폄하할 자격도 없었다.
“생각해 보면 대학 다닐 때가 진짜 좋았는데…… 아, 미안. 내가 벌써 취했나 보다.”
추억에 잠겼던 철용이가 처음으로 내게 사과했다.
뭐지, 술이 확 깨는 기분이다.
“아니야. 다 지난 일인데 뭐.”
술잔을 든 태주가 싱겁게 웃어 보였다.
“아, 그나저나 유리 일은 어떻게 된 거야?”
사고의 원인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얼른 화제를 돌리고 싶었다.
“하아...”
한숨을 내쉰 철용이가 잠시 뜸을 들였다.
“나도 아레나에 있는 선배한테 들었는데, S급 던전에 투입됐다가 사고를 당했대.”
목소리를 낮춘 철용이가 주변을 의식하며 말했다.
“S급? 벌써?”
제아무리 A급 힐러라도 1년도 안 된 수습을 S급 던전에 집어넣진 않았다.
“대표가 허락했대?”
“너도 알잖아. 요즘 길드끼리 살벌한 거. 아무래도 유능한 신입이 들어온 걸 홍보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결과적으론 뭐, 완전 무리수가 된 거지.”
순간, 유리의 죽음을 애도하던 이동규의 가식적인 얼굴이 떠올랐다.
이런 미친.
지가 사지로 몰아놓고, 뭐? 몸조심해요?
화가 치밀었지만, E급 헌터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도 각성하고 싶다.
답답한 마음에 연거푸 술잔을 기울였다.
“야, 태준아, 너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철용이가 또 한 번 내 손목을 잡았다.
“내 이름은 태준이 아니고, 태주야 인마.”
“어? 아, 미안. 내가 잠시 착각했나 보다. 마셔. 마셔.”
황급히 손을 거둔 철용이가 머쓱한 표정으로 또 한 번 사과를 했다.
“크으.”
*
*
*
얼마나 마신 걸까.
“야, 태주야, 그만 가자.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게.”
술을 못 마시는 편이라 철용이의 얼굴이 두 개로 보였다.
“아니야. 나 혼자 갈 수 있어.”
한쪽 무릎을 손으로 짚으며 간신히 일어섰다.
바로 그때.
“야, 윤철용. 너 왜 이렇게 빨리 왔냐?”
어? 이 목소리는?
듣기만 해도 미간이 찌푸려진다.
“뭐야, 이 새끼도 있었네?”
이번에도 보자마자 시비를 튼다.
방우혁.
A급 법사이자 학부시절 내내 충돌했던 악질 중의 악질이다.
하…… 가뜩이나 짜증나는 면상이 두 개로 보여 더욱 죽을 맛이다.
“야, 그래도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 새끼가 뭐냐 이 새끼가.”
철용이가 방우혁의 말투를 지적하며 중재에 나섰다.
“어? 뭐야, 너 얘랑 친구 먹었냐?”
방우혁이 날 못마땅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언제 봐도 기분 나쁜 저 새우 눈.
왜 이런 새끼는 뒤지지도 않지?
정말이지 유리를 먼저 데려간 하늘이 원망스럽다.
“야, 괜히 소란 피우고 싶지 않으니까 그냥 조용히 있다 가라.”
난 길막을 하고 있던 녀석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밀어냈다.
“어쭈, 쳤어?”
“그래, 쳤다. 어쩔래.”
등급만 봐도 상대가 안 되지만, 기세만큼은 밀리고 싶지 않았다.
“야, 야, 그만해.”
보다 못한 철용이가 방우혁을 끌어내기 위해 손목을 움켜쥐었다.
“야, 이거 안 놔!”
방우혁이 노려보자 철용이의 몸이 5미터 뒤로 날아갔다.
와장창!
철용이가 떨어진 테이블이 반으로 쪼개졌다.
뭐지 이거?
내가 알던 방우혁의 힘이 아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왜. 쫄았냐? 너도 저렇게 만들어 줄까? 어?”
좁은 눈매에 숨겨진 방우혁의 눈동자가 파란색으로 변했다.
이 새끼 설마.
“으악!”
누가 뒤에서 잡아당긴 것처럼 몸이 날아갔다.
와장창!
크윽.
말 그대로 눈 뜨고 당했다.
2차 각성에 성공한 건가.
“난 이제 예전의 방우혁이 아니야. 알아!”
어떡하지. 이러다 진짜…… 어?
철퍼덕!
기세등등하던 방우혁의 몸이 바닥에 쩍하고 붙었다.
중력 마법?
특정 대상의 중력을 높여 움직임을 봉쇄하는 이 기술은 S급 법사인 학과장님의 특기였다.
“정신 못 차린 건 여전하구나.”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네.
학과장님의 등장에 전세가 역전됐다.
“컥! 살…… 살려 주세요.”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폐가 눌린 방우혁이 시뻘게진 얼굴로 용서를 구했다.
“한심한 놈. 먼저 간 동료 앞에서 한다는 짓이 고작 힘자랑이냐.”
방우혁을 한심하게 내려다보던 학과장님이 마법을 풀어줬다.
“컥! 죄…… 죄송합니다.”
똑같은 S급 법사지만, 이제 막 각성에 성공한 방우혁과 4차 각성자인 학과장님의 능력이 같을 순 없었다.
“네가 어지럽힌 빈소를 다 치우기 전까진 조문할 생각도 하지 마라. 물론 동기들에게 먼저 사과하는 것도 잊지 말고.”
학과장님이 나와 철용이의 몸을 마법으로 일으켜 세웠다.
“예, 교수님.”
꼬리를 내린 방우혁이 황급히 다가와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했다.
“태준아 미안.”
“하…… 태준이 아니라 태주라고!”
하나 뿐인 정장을 더럽힌 이상 조용히 넘어갈 순 없었다.
“앗! 뜨거!”
방금 나온 육개장 그릇을 녀석의 머리에 모자처럼 씌워줬다.
“미리 사과한다 이 새끼야!”
학과장님이 있든 말든 방우혁의 턱을 그대로 올려쳤다.
퍽!
“컥!”
빨간 국물을 뒤집어쓴 방우혁의 몸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와장창!
이제 학과장님이 내게 중력 마법을 쓰겠지?
뭐, 상관없다.
방우혁을 조진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오랜만이구나.”
혼낼 줄 알았던 학과장님이 뜻밖의 인사를 건넸다.
전형적인 원칙주의자라 낙하산으로 들어온 날 별로 안 좋아했는데.
“죄송합니다.”
학과장님이 이렇게 나오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제가 어지럽힌 건 제가…….”
“아니. 그만 가도 된다.”
더 이상 토를 달았다간 방우혁 꼴이 날 것 같다.
“예……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
*
*
오늘따라 집으로 가는 길이 지루하다.
생각이 많아져서 그런가.
나 혼자 멈춰 있는 기분이다.
그 새끼도 S급을 찍었는데.
복수를 했으면 속이 후련해야 되는데, 오히려 답답하다.
지이잉!
어? 오성 길드에서 온 메시지네?
[오성 길드 면접에서 탈락하셨습니다.]
이젠 별로 놀랍지도 않다.
근데 왜 이렇게 속이 쓰리지?
방우혁에게 당한 외상과 탈락 문자로 입은 내상은 한동안 지속될 것 같다.
[★N차 각성 보조제 《개비스곤》★]
미처 지우지 못한 광고 문자가 눈에 들어왔다.
[100% 후불제! 효과 없으면 무료!]
그냥 속는 셈 치고 한 번 질러?
에이, 아니다.
이런 게 먹힐 리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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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술이 약한지 다음 날 오후에 눈이 떠졌다.
물론 숙취보다 더 큰 문제는 조금 전에 배달된 택배의 정체였지만.
[개비스곤]
내가 이걸 언제 시켰지?
통화내역을 확인해보니 필름이 끊긴 시점이었다.
[10%도 안 되는 N차 각성 확률을 최대 90%까지 올려드립니다.]
박스에 적힌 문구가 상당히 자극적이다.
으음.
이런 건 호구들이나 사는 거지만, 지금 내 상황이 호구보다 낫다고 볼 순 없으니까.
자기합리화를 마친 난 120ml의 액체 한 병을 단숨에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