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this ebook
리버브 (Reverb) :
특정 공간에서 발생한 수많은 반사음으로 구성된 음향, 잔향.
믹싱 기사로 일하는 재환.
재환에게는 기억 저편에 깊이 묻어 둔 과거의 시간이 있다.
어느 날 도착한 믹싱 의뢰 메일을 확인하는 순간,
지우려야 지울 수 없던 그날의 기억들이 다시 재환을 찾아든다.
‘아이돌 같다’라는 말을 끔찍이도 싫어했던 분홍 머리.
그가 연주하던 빗소리 같은 음악.
그 음악에 취해 기타를 놓을 수 없었던 자신과,
합주실에서, 무대에서 수없이 시선이 얽혔던 순간들.
그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는 잔향이 되어 또다시 귓가를 울린다.
땀 냄새 나는 열정과 서툰 사랑으로 범벅되었던
찬란한 그 시절의 이야기.
* * *
우물쭈물 맞잡아 오는 손을 힘주어 쥐어 그대로 쭉 당겨 올렸다. 끌려오듯 일어선 한영의 눈높이가 순식간에 쑥 위로 올라갔다. 웅크리고 있을 때는 별로 티가 나지 않았지만, 역시나 상당히 큰 키였다. 후덥지근한 바깥 공기에 비해 제법 서늘한 기운을 품고 있는 손에서 손을 빼낸 재환은 그 자리에 우산 손잡이를 쥐여 주었다.
“쓰고 가.”
습기로 인해 보다 구불구불해진 분홍 머리칼 아래서 갈색 눈이 이리저리로 굴러갔다. 무슨 생각으로 한영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지금은 알 것도 같아, 재환은 무심코 상대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기 충분한 대사를 덧붙이고 말았다.
“다음에 줘, 다음에.”
그 다음이 언제냐고 차마 묻지 못한 한영의 두 손이 우산 손잡이를 꼭 쥐었다. 매끈한 플라스틱 표면에 미세하게 우산 주인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가. 난 담배 하나 피우고 올라갈 거니까.”
“응.”
자그마한 목소리로 답한 한영은 느릿느릿 몸을 틀었다. 건물 바깥쪽, 쉴 새 없이 비 떨어지는 곳을 향해 우산을 쫙 펼쳤다. 반원을 그린 우산 표면에 부딪힌 빗방울이 투두둑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튀었다. 서둘러 우산을 머리 위로 세운 한영은 빗속으로 조심스레 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막 다음 걸음을 떼기 전, 도로 뒤를 돌았다.
시야를 가르는 빗줄기 너머, 바지 주머니에 쿡 한 손을 찔러 넣은 재환이 어서 가 보라는 듯 손짓했다. 이로써 좋아하지 않는 남자의 모습을 한 번 더 눈에 담은 한영은 못내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머뭇머뭇 거두었다. 그새 비에 젖은 신발이 지난 한 달간 몇 번이나 밟았던 길을 다시금 밟아 나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