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외전 11화
“안녕하십니까, 황녀님. 신수님께서는 어디로 가시고 홀로…….”
“내 남편은 잠시 산책을 갔어.”
“아, 그러시군요.”
그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할 말을 골랐다. 마침 이 근처를 지나다가 카페 테라스에 나와 있는 블론디나를 발견하고는 마차를 세워 달려온 참이었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었다. 지금 기회에 제대로 사과도 전하고 상황도 마무리 짓고 싶었다.
“앉아, 로난.”
블론디나는 비어 있는 앞자리를 가리켰다. 로난은 주저하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심스레 자리를 잡았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사과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황녀님.”
“사과라니. 오히려 내 남편이 그대를…… 음…… 오히려 내 남편이 거칠게 행동한 일을 사과해야 옳지.”
오히려 내 남편이 그대 목덜미를 잡아 던진 일을 사과하고 싶다고 말해야 했는데, 그가 수치스러워할 것 같아 적당히 돌렸다.
로난은 두 손을 휘저으며 고개도 같이 흔들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처음부터 무례했지요. 황녀님이신 줄 알았다면, 아니, 결혼한 분이라는 걸 알았다면 절대 그런 식으로 인사를 건네지는 않았을 겁니다.”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황녀님. 전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억울함을 표정으로 호소하는 로난의 말에 블론디나는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괜찮아. 이해해.”
그제야 로난의 표정이 풀렸다.
“지나는 길에 황녀님이 보여 무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혹시 제가 황녀님을 방해한 건 아니겠지요?”
“아니야. 와주어 고마워. 나도 내심 아까 일을 제대로 사과하고 싶기는 했으니.”
그 말에 로난은 온전히 안심한 것 같았다. 그는 빳빳이 굳었던 어깨에서 힘을 풀었다.
“이곳에 오시기 전에 미리 언질 주셨다면 맞이할 준비를 했을 텐데요.”
“남편과 둘만 조용히 보내고 싶어 조용히 온 거야. 괜찮아.”
도란도란 정적인 대화를 나누며 블론디나는 로난의 눈을 깊게 들여다 보았다. 정직하고 맑은 눈은 특유의 선량함을 그대로 찍어 내고 있었다.
역시 아까 느꼈던 분위기 그대로였다. 라르트를 위해 이참에 좀 친해져 볼까, 그리 생각하며 상체를 그의 쪽으로 슬며시 기울였을 때였다.
발목 아래 보송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음?”
뭐지, 하고 다리를 움직이자,
「냐아-.」
아래에서 자그마한 털 뭉치가 야옹거렸다.
에이몬이었다. 그가 어느새 다가와 그녀의 발목에 뺨을 비비고 있었다. 삐져서 가버릴 땐 언제고, 로난과 함께 있는 블론디나를 보자마자 부리나케 뛰어온 모양이었다.
블론디나는 에이몬을 발등으로 스윽 밀어냈다.
“황녀님 고양이인가요?”
“아니. 길고양이인가 본데.”
짐짓 모른 척 발뺌하니 에이몬은 깜짝 놀라 홀로 바빠졌다. 작은 짐승이 그녀의 다리 사이를 통과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서성였다.
발목에 부드러운 털이 스칠 때마다, 블론디나는 에이몬을 달랑 들어 품에 안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블론디나가 관심을 주지 않자, 에이몬은 발치에 웅크리고 앉아 그녀의 복숭아뼈를 앙앙 물었다.
아프지 않게 스치는 송곳니가 간지럽다. 블론디나는 두 입술을 맞물어 미소를 지워 냈다.
로난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황녀님. 오늘은 저희 성에서 저녁이라도 함께하시는 건 어떠신지요?”
치열하게 복숭아뼈를 공격하던 에이몬의 행동이 굳었다.
물론 로난은 ‘신수님과 황녀님을 초대하여 저녁을 대접하자.’라는 의미로 한 말이지만 에이몬이 그 속사정을 알 리 없다.
저녁이라니. 저녁을 권유할 정도로 친해진 것인가. 나 없는 사이에, 벌써?!
블론디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 굳이 고개를 내려 에이몬을 보지 않아도, 그에게 묻지 않아도 에이몬의 생각이 빤히 읽혔다. 솜방망이로 제 발등을 원망스럽게 때리는 걸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러지 마. 그러지 마, 브리디. 네 남편 여기 있어. 마음으로 말하는 에이몬의 의중이 너무도 명확하게 다가왔다.
블론디나는 구두 앞코를 휙휙 움직여 그의 항의를 무시하고는 로난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마음은 고맙지만, 사양할게.”
“하오면 신수님과 함께 저희 성에서 묵으시는 것은 어떠신가요? 아버지께서도 몹시 기뻐하실 겁니다.”
“배려해 주어 고맙지만, 그것 역시 괜찮아.”
미소 섞인 목소리로 거절한 후, 블론디나는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절 원망스레 응시하는 새까만 솜덩이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이리 와.
에이몬은 귀를 움찔거리며 약간 고민하다가, 결국 그녀 품에 폴짝 뛰어 안겼다. 화가 났는데. 원망스러웠는데. 그럼에도 저 품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제 품에 안긴 작은 짐승을 쓰다듬으며 블론디나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역시 귀여워.”
용케 그녀 목소리를 들은 로난이 싱글싱글 웃었다.
“주인이 없는 것 같은데 마음에 드시면 데려가 키우시지요.”
블론디나는 에이몬의 턱을 간지럽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차후 황궁에서 보지.”
차후 황궁에서 보지. 그 말의 의미를 대번 파악한 로난이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중히 허리를 굽힌 그가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예. 황녀님의 여행이 평온하시기를.”
로난이 떠나자 풍경 좋은 카페 테이블에 인간과 짐승, 둘만 남았다.
블론디나는 에이몬을 달랑 들었다. 냥. 에이몬은 놔달라는 듯 한번 애옹거렸다.
해가 져 거리가 꽤 어둡다. 새까만 에이몬의 털은 어둠에 묻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선연히 빛나는 그의 자색 눈동자는, 빛을 발하기 시작한 거리 위 조명보다 더욱 반짝거렸다.
“마음에 드시면 데려가 키우시지요.”
문득 로난의 말이 떠올랐다. 블론디나는 에이몬의 코끝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응. 내가 평생 곱게 키울 거야.”
「냐아.」
작은 짐승은, 제 콧등에 떨어진 꽃잎 같은 키스가 좋았는지, 앞발로 그녀의 얼굴을 끌어안고는 작게 울었다.
***
선선한 바람이 머리카락 사이를 노닌다. 하얀 달이 수면 위에 아른아른 비쳤다. 블론디나는 단단한 가슴팍에 제 등을 편히 기대었다.
“호수 멋있다, 그치?”
그녀와 에이몬은 숙소 테라스에 나와 호수를 구경하는 중이었다. 블론디나는 고개 돌려 대답 없는 에이몬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삐졌어?”
그의 턱 아래가 단단히 굳어 있었다. 아직 아까의 일이 마음에 엉겨 있는가 보다.
블론디나는 그의 뺨을 톡 건드렸다. 움찔, 떨리는 그의 눈가가 보였다. 이내 몸을 돌린 그녀가 에이몬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턱 아래 입을 맞췄다.
“화 풀어, 응?”
쪽. 부드러운 입술이 닿자, 에이몬의 굳어 있던 턱에서 힘이 빠졌다. 그는 졌다는 듯 픽 웃고는 블론디나의 허리를 둘러 덮치듯 안았다. 그리고 제 몸으로 눌러 한가득 가두고는 말랑한 뺨 위에 쪽쪽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뭐야, 갑자기.”
블론디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그녀는 쉼 없이 떨어지는 키스를 즐기기로 했다. 입술이 새털같이 닿다가도 뺨을 깨물어 오기도. 입술을 느릿하게 핥으며 비비기도 했다.
온기가 맞닿고 뭉근히 겹쳐질 때마다 블론디나의 숨결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장난같이 내려오던 입맞춤이 어느새 은근해졌다.
흐트러지는 뜨거운 숨결 사이로 그의 나직한 속삭임이 퍼졌다.
“브리디. 네가 원한다면 평생 아기 고양이로 살 수 있어.”
단단한 팔이 그녀를 더욱 꽉 감았다.
“하지만 질투하지 않겠다는 말은 못 하겠어. 보면 화가 나는데 어떡해. 나만 보고 싶은데.”
투정 같은 말과 함께 쪽, 가벼운 키스가 닿았다.
“네가 날 고양이로 만들어도 난 또 질투하고 질투할 거야. 평생 네 새끼 고양이로 살지, 뭐.”
코끝에 쪽, 입술 위에 쪽, 입술이 스치고 지나갔다.
블론디나는 간지러움에 눈가를 움츠렸다. 그러자 눈가에도 다정한 입맞춤이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가슴 안쪽이 간질간질했다. 그의 말 한마디가, 입맞춤 하나가 자그마한 깃털이 되어 심장 안을 폴폴 날아다니는 것만 같았다.
블론디나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매만졌다. 손끝에 닿는 살갗이 대리석같이 매끄러웠다.
예쁘지만 고집이 단단히 담긴 깊은 눈동자도, 저만을 바라봐 주는 시선도, 모두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절 온몸으로 품어 주는 단단한 어깨를 가진 짐승임에도 세상에서 가장 어여뻐 보였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에이몬.”
블론디나의 손이 뺨을 느릿하게 쓸었다. 그의 피부에 열기가 섞였다.
이렇게 예쁜데. 이렇게 좋은데. 에이몬이 어떤 행동을 해도 사랑만 해줄 자신이 있었다. 자그마한 고양이가 되어 제 발목을 꼬리로 감을 때도, 커다란 짐승이 되어 난폭하게 절 들쑤셔도 에이몬은 에이몬이었다.
늘 한결같이 절 사랑해 주는. 이토록 다정한 눈빛으로 제 마음을 부드럽게 파헤치는.
블론디나는 촘촘히 펼쳐진 그의 속눈썹을 천천히 매만졌다. 달빛이 그의 속눈썹 끝에 걸려 있었다. 어쩌면 속눈썹까지 예뻐서는.
“아, 예뻐라.”
에이몬의 입술이 가만히 올라갔다. 절 예쁜이 취급해도, 귀여운 아기 고양이 취급해도 아무렴 상관없었다. 원한다면 까짓것 평생 재롱이나 부리며 살 자신도 있다.
에이몬은 그녀를 꼭 껴안아 하얀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달콤한 살 내음이 밀려왔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맥박 소리에 눈앞이 아찔해진다.
블론디나. 내 부인. 사랑하는 내 브리디.
그녀가 살아 있음을 느낄 때마다. 그녀의 온기가 제 곁에 머무름을 느낄 때마다 벅찬 행복이 가슴을 두드렸다. 현실을 믿을 수 없어 늘 꿈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브리디. 사랑해. 너무너무 사랑해.”
들릴 듯 말듯 속삭이며, 에이몬은 그녀에게 제 뺨을 느릿하게 비볐다. 그녀의 부드러운 살갗을 비빌 때마다 따뜻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나도 사랑해, 에이몬. 넌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내 고양이야.”
블론디나 역시 에이몬의 머리카락을 흩트리며 애정 가득히 답했다.
달빛 아래 겹쳐진 두 몸이 더없이 따뜻한 밤이었다.
<외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