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외전 6화
라르트는 황제의 집무실을 나오자마자 성큼성큼 도서관을 향해 걸었다.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아주 쉬운 방법인데. 참으로 바보 같고 어리석다.
그래. 내가 더 똑똑해지고 강해지면 되는 것이다. 황후의 힘을 빌려 황제의 기반을 굳게 다질 수 없게 된다면, 내가 더욱 견고해지면 되는 것 아닌가.
누구보다 강하게. 누구도 넘볼 수 없을 만큼 확고히.
그간 노력한 게 무색할 만큼 해결책은 참으로 간단했다. 적어도, 라르트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이후, 마음을 굳힌 라르트는 별궁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루시의 주위를 그림자처럼 따라붙기만 하다가 햇빛 위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제 어렴풋하게 방향을 잡았으니 남은 건 루시의 마음도 잡기.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 될 것 같지만 우선 온몸으로 부딪쳐 보기로 했다.
어차피 자신은 막무가내에 제멋대로인 황자였으니 더 더러워질 평판도 없다.
“황자 전하께서 블론디나 황녀님의 시녀에게 치근덕거리신대.”
그런 소문이 나돌아도 전혀 타격이 없다는 뜻이다. 마음대로 살아온 덕을 이렇게 보다니. 역시 멋대로 살기를 잘했다.
그리고 라르트는 각고의 노력 끝에 루시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진심은 역시 통한 것이다. 루시는 다정하고 선량해서, 매달리고 애원하는 그를 외면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했던 조언대로 현명해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귀족 세력을 제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도 성공했다. 제국군을 제 쪽으로 포섭한 것 역시 중요한 쾌거였다.
‘내가 정신차려야 해.’
게다가 종내에는 신수까지 제 든든한 뒷배가 됐다. 루시를 황후로 맞이한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만큼 견고하게.
***
날이 맑았다. 황제의 뜰 여기저기 꽃향기 천지다. 뽀얀 구름은 천천히 흘러가고, 깃발은 바람결에 부드럽게 흔들렸다.
라르트는 루시의 얼굴을 덮고 있는 베일을 걷어 냈다.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늘 장난꾸러기같이 천진스러웠던 그의 눈빛이 사뭇 진중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늘은 루시와 라르트의 결혼식 날이었다. 황제 자리에 오른 지 2년이 지나서야 법적으로 서로의 짝이 되려 하고 있었다.
라르트가 언제나 염원했던 결혼식이나 늘 미루어지기만 했었다. 아직 때가 아니라는 귀족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기반이 자리 잡힌 후 진행해도 늦지 않다는 그들의 권유 아닌 권유.
결혼을 반대하는 귀족들의 속내는 뻔했다. 루시의 세력이 약하니 그것을 빌미로 그녀를 밀어내고 제 여식을 들이밀려는 검은 속내.
황제의 애정은 곧 풍화될 게 분명하다. 사랑이라는 일시적인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사그라질 터. 그리 믿어 온 것이다.
하지만 라르트는 변하지 않았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그가 끝끝내 잡고 있던 건 늘 루시의 손이었다. 라르트는 결혼을 반대하는 귀족의 권유를 모른 척 부드럽게 넘기다가, 황권이 자리 잡히자마자 결혼 날짜부터 잡았다.
그 결혼식이 바로 오늘이었다. 유난히 볕이 좋은 날. 햇살마저 부드럽게 두 사람을 감싸 주는 온화한 날.
라르트는 루시의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부드러운 햇살이 그녀 눈동자 안에 반사되고 있었다. 신부 베일을 쓴 이가 진정 루시임을 믿을 수 없어 바라보고 또 바라보다가, 뒤에 서 있던 샨티가 흠, 흠, 하고 목을 울리자 그제야 얼굴을 내렸다.
곧 루시와 라르트의 입술이 닿았다. 동시에 환호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제국 황제의 혼인을 축하한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의 앞날에 늘 무궁한 행복이 가득하시기를!”
“축하드립니다!”
샨티와 귀족, 그리고 무수히 많은 이들이 그들의 결혼을 축하했다.
흥에 겨운 함성과 갈채, 공간을 장식하는 현악기 소리가 행복하게 어우러진다. 웃으며 축하를 보내는 얼굴은 모두 행복해 보였다.
화사한 날이었다.
***
빠르게 쏘아 나간 화살이 목표에 적중했다. 블론디나는 땅 위로 떨어지는 목표물을 응시했다. 시종이 웃는 얼굴로 크게 외쳤다.
“다섯 개의 풍선을 맞히신 블론디나 황녀님께서 이번 승자입니다!”
다섯 마리의 개가 꼬리를 흔들며 달려갔다. 공기 주머니 조각을 물고 오기 시작한 개들을 보며 블론디나는 시종의 안내에 따라 뒤로 물러났다.
깔개에 편하게 앉아 다음 조가 화살을 날리는 모습을 구경한다. 저 멀리, 공기를 넣은 주머니가 하늘 위로 둥실둥실 올라가고 있었다.
뒤이어 다른 조가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화살 중 반은 빗겨 나가고 반은 적중했다.
“이번 승자는 할라 님이십니다!”
블론디나는, 이번 조 승자가 되어 의기양양한 얼굴로 돌아온 할라와 웃으며 눈인사를 했다.
오늘은 활쏘기 대회 날이었다.
화살로 맞히는 대상은, 예전처럼 비둘기가 아닌 공기를 가득 채운 주머니였다. 자칫 어린애 같은 장난으로 보일지 몰라도 엄연히 황실 주관하에 치러지는 연례 행사였다.
마제또가 날개를 파닥거리며 블론디나 귓가에 외쳤다.
“블론디나, 봤어? 봤어? 황제 폐하께서는 하나밖에 못 맞혔어!”
라르트를 비웃으며 마제또는 짹짹 웃었다.
비둘기에서 공기주머니로 목표물이 바뀐 건, 마제또를 위해서였다. ‘인간은 잔인해!’라고 외치던 작은 새를 위한 작은 배려.
“4조에서는 제가 이겼고, 3조에서는 황녀님이 이기셨으니 최종 결승에서 만나겠네요.”
모로 누워 청포도를 집어 먹던 할라가 웃으며 말했다. 블론디나는 아름다운 여인 모습을 한 신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의기양양하게 턱을 들었다.
“오늘은 제가 이길 것 같네요. 느낌이 좋아요.”
“글쎄요. 그럴까요? 전 제가 이길 것 같은데.”
블론디나는 깔개 위로 몸을 눕혔다. 저 멀리, 낑낑거리며 활을 쏘고 있는 루시가 보였다. 활쏘기 대회 조는 제비뽑기로 정했기에, 고귀하신 황후 폐하께서 맨 마지막 조에 배정된 터였다.
“황제가 꽤 초조해하는데요.”
“라르트야 늘 그렇죠.”
지엄하신 황제 폐하께서는, 루시의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며 그녀를 지키고 있었다. 힘겹게 활시위를 늘이고 있는 제 부인이 걱정되는지 불안한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루시가 간신히 날린 화살이 날아갔다. 화살이 공기주머니에 적중하자 라르트의 얼굴이 여지없이 환해졌다.
“어서 축하의 음악을 울려라! 황후가 맞혔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제 부인을 번쩍 안는 라르트를 보며 블론디나 역시 호쾌하게 웃었다. 뭐, 언제는 라르트가 타인의 시선을 신경이나 썼나. 뭇 귀족이라면 경박스럽다며 호사가들 입방아에 올랐을 행동이나, 라르트이기에 상관없었다. 늘 그래 왔는걸.
구름은 높고 하늘은 청정했다. 인간에게도, 짐승에게도 유쾌한 날이었다. 숲 경계에서 다 죽어 가는 얼굴로 늘어져 있는 샨티만 빼고.
「그만해, 이 조그마한 것들이……!」
샨티는 제 등에서 미끄럼을 타는 세 아이를 향해 힘없이 으르렁거렸다.
샨티의 딸 카리와 블론디나와 에이몬의 쌍둥이, 아니쉬, 틸라이가 샨티의 몸을 타고 데굴데굴 굴러 내려가고 있었다.
모두 얼굴은 천사같이 귀여워서는 샨티의 등을 쿵쿵 밟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아이들이 조그마한 손으로 표범의 털을 움켜쥘 때마다 샨티의 수염 역시 움찔거렸다.
“아빠! 나도 저기 가서 풍선 잡고 놀고 싶어요!”
“저도요, 삼촌!”
“삼촌, 나도!”
샨티의 꼬리를 잡고 붕붕 흔드는 아이들의 눈이 반짝거린다. 꼬리가 흔들릴 때마다 갈색 털이 뿜뿜 날렸다.
「안 돼.」
샨티는 자못 위엄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방금까지 저들이 밟고 논 신수의 위엄에 겁먹지 않았다.
까르륵거리는 소리가 울리는가 싶더니 아이들의 발소리가 이어졌다. 샨티가 안 된다고 하건 말건 사냥터를 향해 뛰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 귀여운 것들이!」
샨티가 부리나케 몸을 일으켰다. 아이들은 어느새 갈색, 까만색 솜뭉치로 변해 마구 달려가고 있었다. 조그마한 것들이 빠르기는 어찌 빠른지 살랑거리는 꼬리가 벌써 저만치 떨어져 있다.
「하아…….」
샨티는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기력이 달려 쫓아가기도 귀찮다.
아직 아기들이라고는 하지만 신수는 신수. 화살이 날아와 봤자 위험할 건 없었다. 하지만 인간들 앞에서 발라당 배를 까고 어리광이라도 부리면 그 무슨 창피인가. 신수의 권위가 있지.
샨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나무 둥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에이몬……. 수장님, 이제 네 차례야…….」
웅얼거리는 그의 목소리에 에이몬이 그제야 눈을 떴다. 에이몬은 나무둥치에 기대어 낮잠을 자는 중이었다. 샨티와 한 시간씩 나누어 아이들을 보기로 했는데, 벌써 한 시간이 지난 모양이다.
달콤한 휴식 시간은 왜 이리 짧은지.
에이몬은 팔을 쭉 늘여 기지개를 켜더니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시선 끝에, 이제 아주 멀리 떨어져 작은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아기 표범 세 마리가 닿았다.
자그마한 발로 정신없이 뛰다가도 냥냥거리며 서로 뒤엉켜 싸우고, 그러다가 다시 벌떡 일어나 탁탁탁 내달리고 있었다.
“쟤들은 왜 저기 있어.”
「나인들 아나. 저기서 놀고 싶으시대.」
지친 목소리의 샨티가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세 아이를 홀로 돌보다가 기력이 쇠한 모양이다. 그는 이내 앞발에 머리를 푹 묻어 버렸다.
에이몬은 슬슬 걷기 시작했다. 저 망아지같이 날뛰는 표범 세 마리를 잡아 올 심산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아이들의 속도가 빨랐다. 거리가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는다.
“…….”
쯧. 에이몬은 이내 혀를 찼다. 곧 인간이 있던 자리에서 커다란 흑표범이 도약해 사냥터를 부드럽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 시각. 루시, 할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블론디나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응? 저거 우리 애들인데?”
한창 사냥대회 중인 사냥터에 익숙한 짐승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바로 본인의 아들들과 할라의 딸 말이다.
세 마리 아기 표범이 바람 빠진 공기주머니 사이를 뛰어다니며 뒹굴고 있었다. 어지간히 신이 났는지 작은 꼬리가 붕붕 난리가 났다. 화살을 쏘아야 할 인간들은 당황하여 시위를 놓았다.
“블론디나! 블론디나!”
마제또 역시 아이들을 발견했는지 블론디나의 이름을 불러 왔다. 블론디나는 이미 보았다는 뜻으로 마제또의 배를 문질러 주었다.
“나도 봤어, 마제또. 우리 아이들이 저기 있네.”
분명 에이몬과 샨티가 지켜보고 있겠다고 했는데. 왜 저기서 신나서 놀고 있는지. 물론 귀엽기는 하지만.
어쩔까, 고민하던 블론디나는 느긋하게 다시 누웠다. 수풀 너머로 시커먼 형체가 보인 덕이다. 아기들을 향해 달려오는 커다란 흑표범. 제 남편이자 아이들의 아빠이자 삼촌인 신수 수장님.
‘알아서 잘하겠지, 뭐.’
할라 역시 에이몬을 보자마자 다시 자리에 모로 누웠다. 아이들은 도망치고, 에이몬은 쫓고. 그 모습을 하루 이틀 본 게 아니라 놀랍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