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
#외전 3화
***
에이몬은 꼬리를 슬렁 움직였다.
검은 머리의 아기, 아니쉬가 그의 꼬리를 잡으려고 손을 허우적대다가 까르륵 웃었다. 꼬리 끝으로 금발의 아기, 틸라이의 이마를 문지르자 틸라이 역시 까르륵 웃으며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
에이몬은 아이들의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멍하니 응시했다. 세상에 어쩌면 이렇게 작고 귀여운 것들이 다 있지. 아무리 제 새끼라지만 이건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에이몬의 몸에 기대어 앉아 있던 블론디나가, 그의 꼬리를 들어 아이들 목덜미를 살랑살랑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온종일 까르르 웃기만 했다.
“이게 신기하니?”
블론디나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암맘마!”
“마마마!”
아이들에게서 대답처럼 옹알이가 던져졌다.
새까만 머리카락에 자줏빛 눈동자를 가진 남자아기의 이름은 아니쉬. 금발에 은빛 눈동자를 가진 남자아이의 이름은 틸라이.
블론디나와 에이몬의 아이, 아니쉬와 틸라이가 태어난 지도 벌써 몇 달이나 흘렀다.
태어나자마자 뛰어다니는 사슴 새끼와 달리, 제 팔다리조차 버둥거리지 못하던 아기들은 이제 어느 정도 커서 옹알이도 하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이것저것을 만져 대기도 했다.
아기들이 만져 대는 건 주로 에이몬. 불시에 아빠의 털을 확 움켜잡거나 그의 주둥이를 팍팍 때리는 게 아이들의 유일한 취미 생활이었다.
아이들은 블론디나의 신력에 영향을 받았는지 우선은 인간 모습으로 태어났다.
신력에 휩싸여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들을 처음 본 루시는 감동해서 엉엉 울기까지 했었다.
“블론디나 님! 세상에서 이토록 아름다운 광경은 처음이에요!”
마치 제 자식을 낳은 것처럼.
아이들 위로 부드러운 햇살이 깔린다. 아니쉬와 틸라이는 기분이 좋은지 댕그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러다가 블론디나가 자장가를 불러 주며 가슴팍을 토닥여 주자 이내 잠들었다.
블론디나의 다정한 손길이 아이들의 통통한 배를 문질렀다. 아이들의 몸은 자그맣고, 따뜻하고, 말랑했다.
“예뻐라.”
새삼 사랑스러운 눈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던 블론디나는 저 역시 곧 눈을 감았다.
에이몬에게 폭 기대어 그의 새까만 털을 헤집는다. 볕은 따뜻했고 집 안에는 달콤한 우유 내음이 가득했다.
평화로운 하루였다.
***
평화는 짧았다.
아니쉬와 틸라이가 태어난 지 1년이 지났을 즈음. 천사같이 방긋거리던 아기들의 난동이 시작됐다.
“아바바바!”
“부바바! 으야!”
서로 마주 보고 선 아기 사이에 알 수 없는 옹알이가 터져 나왔다. 둘은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손가락의 끝에 있는 건 작은 참새. 둘 사이에 멍하니 앉아 반쯤 영혼이 사라진 눈동자의 마제또였다.
“…….”
늘 수다스럽던 마제또는 두 아이들의 옹알이 공격에 할 말을 잃었다. 늘 달싹거리던 부리 역시 꽉 다물려 있다.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 마제또는 침울해했다. 혹여 절 향한 애정이 사라지면 어쩌나. 이제 날 예뻐해 주지 않으면 어쩌지.
하지만 막상 아이들이 태어나니 애정을 너무나 받아 문제였다. 아니쉬와 틸라이가 마제또를 사이에 두고 항상 싸워 댔기 때문이다. 작은 참새의 사랑을 받기 위해 둘은 소리를 지르고 팔을 휘저었다. 마치 지금처럼.
“으먀! 으먀! 뱌뱌!”
“으뱌뱌뱌!”
“…….”
아이들의 작은 발이 땅을 콩콩 굴렀다. 잔바람이 일어 마제또의 털이 폴싹폴싹 움직였다. 아니쉬와 틸라이가 마제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야야야!”
이 귀엽고 작은 참새 삼촌은 네 삼촌이 아닌 내 삼촌이라는 뜻이었다.
아니쉬가 마제또를 향해 손을 뻗으면 틸라이가 그 손을 휙 밀쳤고, 틸라이가 마제또를 향해 허리를 굽히면 아니쉬가 틸라이의 정수리를 작은 손바닥으로 팡팡 두드렸다.
그리고,
“으아아아앙! 암마!”
“아아아아아! 암빠!”
필연적으로 소란이 벌어졌다.
아이들은 복숭아처럼 달아오른 뺨으로 블론디나와 에이몬을 부르며 울기 시작했다.
주먹을 말아쥔 아니쉬가 마제또를 소유할 수 없음에 울음을 터트리자, 틸라이 역시 덩달아 함께 울기 시작한 것이다.
“블론디나 님, 에이몬 님, 구해 줘요…….”
우는 아이들을 두고 홀로 떠날 수 없는 마제또는 포록포록 날아다니며 아이들을 달래려 애를 썼다.
그 시각, 블론디나와 에이몬은 낮잠에 빠져 있었다. 밤새 아이들에게 시달리다가 ‘아이들은 내게 맡기세욧!’이라고 호언장담한 마제또의 배려 덕이었다.
하지만 눈을 감은 것도 잠시. 두 아이의 울음이 터져 나오자 주문에 걸린 사람처럼 눈을 번쩍 떴다. 의식이 아득해진 순간에도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벼락같이 꽂히는 탓이다.
「배! 배가 고픈가!」
“졸리니?!”
커다란 흑표범 한 마리와 인간 한 명이 아이들을 향해 부리나케 달려갔다. 눈가에 서린 잠기운을 미처 깨치지도 못한 채.
하지만 황급히 다가간 둘의 눈에 보이는 건, 인간이 아닌 새까만 흑표범 새끼 두 마리였다.
「꺙!」
「컁!」
블론디나의 손바닥보다 조금 큰 아기 표범 두 마리가 서로를 덮치고 있었다. 솜덩이 두 개가 앞발을 허우적대며 바닥을 뒹군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신수는 신수. 아니쉬와 틸라이는 감정이 격해질 때면 흑표범으로 변하고는 했다. 예를 들어 배가 고프다거나, 졸리다거나, 격하게 짜증이 난다든가 할 때.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에이몬 꼬리를 갖고 놀던 틸라이가 까륵까륵 웃다가 갑자기 표범으로 변해 에이몬의 꼬리를 앙앙 물었을 때 그 얼마나 놀랐던가.
인간 모습으로 태어나 평생 두 발로 걸을 줄 알았는데. 심지어 신수와 달리 이마에 변환석조차 없던 아이들이.
냥! 냥냥! 아이들은 여전히 손톱보다 작은 송곳니를 내밀어 뒹구는 중이었다. 최대한 위협적으로 보이려 콧잔등을 일그러뜨렸으나 그 무엇보다 깜찍하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
「…….」
블론디나와 에이몬은 멍하니 제 아들들을 응시했다. 자그마한 앞발이 퉁퉁 서로의 뺨을 때렸다. 그럴 때마다 꺙꺙거리는 울먹임도 함께 터져 나왔다.
이걸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우선 귀여우니까 내버려 둘까. 어느 정도 흥분이 가라앉으면 그때 떨어뜨려 놓을까. 어떻게 해야 하지. 짐승은 이럴 때 어떻게 하나.
“에이몬. 우리 애들 말려야 하나?”
짐승의 법을 잘 모르겠어. 인간은 우선 말릴 텐데 표범은 아닌가. 고민하는 블론디나의 종아리를, 꼬리로 슬렁슬렁 감으며 에이몬이 답했다.
「내버려 둬. 저러면서 크는 거야.」
“하기야 네가 아기였을 때도 샨티, 할라와 엄청 싸웠으니까.”
「…….」
에이몬과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하며 블론디나가 픽 웃었다. 자그마한 풀숲에서 홀로 냥냥거리던 작은 고양이. 다리가 다친 채 찡찡거리던 걸 주워 치료해 줬었지.
만약 그때 에이몬이 친구들과 싸워 다치지 않았더라면, 아마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네가 그때 할라, 샨티와 싸워서 다행이다. 그치?”
그래서 나와 만날 수 있었으니까. 빙긋 웃으며 말하자 에이몬 역시 새삼스러운지 블론디나의 복숭아뼈를 간지럽히며 웃었다.
「그러게. 절벽 구르기를 잘했네.」
그 와중에도 까맣고 작은 짐승들은 앙앙거리며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었다. 아기들 주위를 팔락팔락 날아다니는 마제또의 짹짹임이 터져 나왔다.
“그만해! 그만하라고, 이 짐승들아!”
블론디나가 에이몬의 꼬리를 툭 밀어냈다. 저 작은 짐승들을 말려 보리는 뜻이었다. 그녀의 의중을 알아차린 에이몬이 슬렁슬렁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양탄자 위에 데굴데굴 엉켜 있는 제 아이들에게 다가간 에이몬은, 앞발로 새끼 표범들의 몸을 톡톡 밀었다.
꺙! 겹쳐 있던 솜덩이 둘이 떨어졌다. 새카맣고 작은 짐승이 바닥 위를 도로록 굴렀다.
크르르르……. 에이몬이 목을 울렸다.
제 아비의 경고에 찔끔했는지 아기 표범들은 털을 부스스 세우며 몸을 움츠렸다. 그 작은 것들도 짐승은 짐승인지 에이몬의 장난 같은 압박에 본능적인 공포를 느낀 모양이다.
곧 에이몬은 둘의 목덜미를 한꺼번에 물고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풀밭으로 나가 나비나 쫓고 놀라며 던져 놓을 생각이었다.
에이몬이 저택을 벗어나자 비로소 마제또가 블론디나의 어깨 위에 날아 앉았다. 그녀의 목덜미에 진이 빠진 목소리가 울렸다.
“아……. 애 키우기 정말 힘들다…….”
마제또의 귀여운 한탄에 블론디나는 결국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
샨티는 기도하듯 눈을 감았다.
「가끔 버거울 때가 있어.」
중얼거리는 샨티의 앞발에 자그마한 아기 표범이 달려 있다. 아이는 나무통같이 커다란 샨티의 앞발에 매달려 이를 박아 앙앙대고 있었다. 그 작은 짐승은, 두 살이 되어 가는 그의 딸, 카리였다.
신수가 조셉의 제어로 황궁을 공격했을 때, 카리를 임신한 할라는 요양 차 숲을 벗어나 있던 상태였다. 아이를 무사히 출산한 것도 우연 같은 행운이라 할 수 있다.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심드렁하게 답하는 에이몬의 머리 위에서 무언가 툭 떨어졌다. 그의 아들 아니쉬였다. 틸라이는 에이몬의 정수리부터 목덜미까지 타고 내려와 등 아래로 미끄럼틀을 타는 중이었다.
에이몬의 콧잔등이 한번 움찔거렸다.
「…….」
「…….」
멍한 표정의 샨티와 담담한 표정의 에이몬은 서로 말이 없었다. 남모를 눈빛을 교환하며 동질감을 느끼고 있을 따름이다.
육아 고통.
다른 짐승들은 그저 던져 놓으면 알아서 먹고 알아서 잘 큰다는데, 신수 새끼라 그런지 지능도 높고 관리할 것도 많아 하나하나 손이 갔다.
특히나 샨티의 아이는 이제 말을 배우기 시작하여 시도 때도 없이 질문을 해 왔다. 대답하다 보면 기가 다 빨려 온몸이 녹진녹진해진다고 하소연할 정도였다.
「아빠! 저기 가면 산딸기 있어!」
샨티의 앞발 위를 뒹굴거리던 카리가 말했다.
「어, 그래. 가자.」
샨티는 멍한 표정으로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에이몬과 대화 중이라는 사실조차 잊은 것 같았다. 소중한 따님이 산딸기를 따러 가자면 가야지. 제 엄마를 닮아서 아무튼 산딸기는 되게 좋아해서는.
「아빠! 저기 가면 산딸기 있어! 근데 산딸기 뭐야?」
「산딸기, 먹는 거. 너 뭔지 알잖아.」
「산딸기 뭐야?」
지치지 않고 반복하는 질문에, 샨티는 체념하여 멍하니 답했다.
「먹는 거. 새콤하고 달콤하고…… 맛있고…….」
「산딸기 뭐야아?」
「그런데 표범은 산딸기보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샨티는 기계적으로 답하며 제 딸을 이끌고 걸음을 옮겼다. 커다란 몸이 휘청휘청 몽유병 환자처럼 걸었다.
샨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에이몬이 고개를 돌렸다. 제 몸을 정신없이 타고 놀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보였다. 두 아들을 향해 에이몬이 물었다.
「너희도 산딸기 먹으러 갈래?」
「냥!」
「꺙!」
아이들은 산딸기가 무언지도 모르면서 우선은 대답했다. 최근 옹알이를 벗어나 말인지 무언지를 하기 시작하기는 했는데, 사실 말이라기보다는 냥냥거리는 것에 가깝기는 했다.
에이몬은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땅에 큰 그림자가 지고, 몸 위에서 뒹굴던 두 솜덩이가 땅으로 톡톡 떨어졌다.
앞발로 바닥을 뒹구는 두 아들을 대충 추스린 에이몬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아이들은 걸어가는 에이몬의 꼬리에 작은 송곳니를 박아 매달렸다.
작은 두 몸이 에이몬의 꼬리에 매달려 질질 끌려가듯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것마저 재미있는지 아이들은 꼬리를 휙휙 흔들며 까르륵거렸다.
에이몬은 제 꼬리를 물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걸었다. 꼬리에 두 솜덩이를 단 것 정도는 그저 일상이라는 듯.
몸을 간지럽히는 풀잎의 감각. 흐트러지는 초록 향기. 눈앞에 보이는 태산같이 커다란 아빠. 내리쬐는 따뜻한 햇살. 아이들이 행복해하며 웃을 이유는 오늘도 한가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