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
#외전 2화
***
“마제또가 많이 서운했나 봐. 난 그것도 모르고.”
“서운할 만도 하지. 마제또는 늘 네 사랑을 받아 왔으니까.”
블론디나의 뺨을 톡 건드리며 에이몬이 답했다. 블론디나는 에이몬의 팔을 베고 누운 채 몸을 꼼지락거렸다. 배가 나와 그런지 요새 영 자세 잡기가 힘들었다.
“마제또가 그런 걱정을 하는 줄도 몰랐어.”
“마제또가 말 안 했잖아. 넌 늘 마제또를 소중히 여겼으니까 모르는 게 당연하지.”
블론디나는 그의 품 안에서 픽 웃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뱉는 에이몬의 답이 오히려 성심성의껏 답하는 타인의 대답보다 크게 다가왔다. 쉽게 하는 말이 모두 진심임을 이미 알고 있기에.
어쩌면 이렇게 잘생기고 믿음직스러운 존재가 다 있을까. 다시 코끝이 찡해져 블론디나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또 슬퍼졌어?”
그 모습마저 귀엽다는 듯,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블론디나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아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기 시작했다.
그의 다정한 손바닥이 쓸어내릴 때마다, 블론디나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예전이라면 마제또의 귀여운 걱정이라며 웃는 얼굴로 위로했을 텐데. 오늘은 왜 같이 울었을까. 그리고 지금은 왜 이렇게 슬플까. 역시 임신이라는 건 이상해.
눈을 끔뻑끔뻑. 에이몬 품에서 느릿하게 눈만 감았다가 떴다. 그 와중에도 에이몬의 가벼운 입맞춤은 계속됐고, 등을 슬슬 쓸어내리는 부드러운 손길에 수마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의 품은 넓고 이불 안은 따뜻하다.
‘내 야옹이 줍길 잘했지…….’
눈꼬리에 눈물방울을 단 채 블론디나는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의 숨소리가 점점 잦아든다. 에이몬은 등을 쓸어내리던 손을 멈추고 한동안 블론디나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고였다.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
“잘 자.”
블론디나의 젖은 눈꼬리에 살며시 입을 맞추는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
블론디나는 멍하니 누워 있었다. 낮잠 자는 에이몬의 품에 비스듬하게 기댄 채 빛나는 제 드레스를 바라본다. 사실 그녀가 응시하는 건 드레스가 아닌 그 아래 있는 볼록 솟은 배였다.
짹!
머리 위에서 마제또가 한번 지저귀자 퉁, 하고 태동이 느껴졌다.
뽀로롱!
마제또가 다시 지저귀었다. 배 속에서 화답이라도 하듯 퉁퉁, 하고 다시 울림이 돌아왔다.
‘……아무래도 우리 애가 마제또를 좋아하는가 본데.’
블론디나는 배를 다정하게 쓸어내렸다. 자그마한 태동이 이토록 감격스럽고 귀엽게 느껴지는 걸 보니 이제 정말 엄마가 되어 가나 보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배는 빵빵해질 대로 빵빵해졌다. 아이가 곧 태어날 것이다.
‘기분이 이상해.’
신기하기도 하고 조금 무섭기도 하고. 과연 어떤 아이가 태어날까.
인간일까. 아니면…….
블론디나는 시선을 내려 에이몬의 앞발을 응시했다. 비단같이 자르르 곱게 펼쳐진 털 위로, 반짝반짝 빛 잔상이 일었다.
‘어쩌면 에이몬처럼 표범 모습일지도 모르겠어. 어쨌든 낳아 봐야 알겠지.’
그녀는 제 자식이 딸이건, 아들이건, 인간이건, 짐승이건 사랑해 줄 준비가 돼 있었다. 자신을 닮았든 에이몬을 닮았든 몹시 사랑스러울 테니까.
‘그리고 아마 엄청 강할 거야.’
조셉의 검에 찔려 죽기 직전까지 갔을 때도 살아남았던 생명이다. 숨이 끊겼던 몸 안에서 이토록 건강히 생명을 이어 갔으니 에이몬만큼 강한 아이일 터다.
“아그긋.”
블론디나는 팔을 위로 늘여 기지개를 쭉 켰다. 발도 쭉 펴며 동동거리니 움직임을 느꼈는지 에이몬이 슬며시 눈을 떴다.
햇살 아래 반짝이는 자홍색 눈동자가 보석처럼 녹아 반짝인다. 에이몬은 잠에서 깼음에도, 블론디나가 휘청이지 않도록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마치 그녀만의 충실하고 따뜻한 등받이가 된 것처럼.
「뭐 하고 있었어?」
“그냥 배 구경하고 있었어. 마제또가 노래할 때마다 얘네가 박자 맞춰 놀던데?”
「귀엽네.」
에이몬은 몸을 느릿하게 일으켰다. 블론디나가 앉은 자세를 추스르는 사이 새까만 털을 가진 짐승은 인간으로 변했고, 단단한 팔로 블론디나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흑표범에게 등을 기댔듯, 블론디나는 남자의 단단한 가슴팍에 제 몸을 늘어뜨렸다.
뒤에서 쑥 들어온 손이 블론디나의 배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단단한 손으로 한가득 덮고 슬슬 쓸어내린다.
블론디나는 그의 손등 위에 제 손을 겹쳐 올렸다.
“이제 정말 태어날 때가 된 것 같아.”
“그러게.”
귓가에 들리는 나직한 음성이 유독 간지러워, 블론디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표범으로 태어나려나? 너처럼 귀여운 새까만 표범.”
에이몬의 손길이 멈칫, 한번 굳었다. 블론디나는 경직된 에이몬의 손등을 손끝으로 살살 문질렀다.
그가 느끼는 긴장, 불안함의 원인을 안다.
새까만 표범. 자신과 같은 흑표범이 태어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뒤로, 그는 ‘흑표범이 태어날지도 모른다.’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같은 반응을 보였다.
늘 긴장하고, 초조해하고, 불안해했다. 에이몬. 그를 낳은 어미도. 그의 전생을 낳았던 어미들도 모두 죽었으니까.
에이몬이 지닌 신력을 이겨 내지 못한 일반 짐승들이었기에 에이몬을 낳자마자 그대로 눈을 감은 것이다.
‘혹시 나도 그럴까 봐 무서운 거겠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블론디나는 차갑게 식은 에이몬의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빗겨 올렸다. 절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 안에 걱정과 초조함이 깊게 새겨져 있었다.
이제 정말 출산이 멀지 않았으니 그의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잡아 주어야만 했다. 나는 괜찮노라고,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에이몬.”
“응.”
블론디나는 그에게 기댔던 몸을 더욱 폭 기댔다.
“불안하지? 나도 죽을까 봐.”
에이몬은 차마 아니라는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입 열어 답하면 그 말이 사실이 될까 두려운 것 같았다.
“네 마음 알아. 넌 이미 내 죽음을 여러 번 보았잖아.”
전생에도, 현생에도 그는 항상 눈 감는 절 보았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처절하게 무너져 내렸었지. 아마도, 피에 인이 박힌 것처럼 근원적인 두려움이 항상 새겨져 있을 것이다.
블론디나는 몸을 꼼질꼼질 움직여 상체를 돌렸다. 그리고 아른아른 흔들리는 에이몬의 예쁜 눈동자를 마주했다.
누구보다 강한 존재가 제 앞에 설 때면, 잔바람에 흔들리는 여린 꽃이 된다. 그 점이 사랑스럽고도 애틋했다.
“에이몬. 난 아이 낳다가 죽지 않을 거고, 널 먼저 두고 죽지도 않을 거야.”
내 예쁜 남편 두고 어딜 가, 내가.
블론디나는 선포하듯 말하며 손을 튕겼다. 새하얀 빛이 허공을 향해 빛을 그리며 날아가더니 잔상을 남기며 흩어졌다. 모래알처럼 부서진 빛이 바람결에 흐트러진다.
은하수처럼 반짝거리는 힘은 신력이었다.
놀라움으로 에이몬의 눈이 커졌다. 블론디나는 그의 눈가를 매만지며 빙긋 웃었다.
“이제 내 몸 안에 신력이 제대로 자리 잡기 시작했어.”
에이몬이 제게 준 신력. 태초의 신이 갖고 있던 전생의 능력. 그 힘이 다시 뿌리를 내렸다. 이 힘이라면 에이몬이 우려할 만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늘 불안함을 끌어안던 에이몬에게 평온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힘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없어 안타까워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젠 달라졌다. 어느 정도 신력이 자리 잡았으니 아이를 낳은 후 제대로 훈련하면, 이전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에 가까워질 수는 있겠지.
“…….”
에이몬은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놀란 눈으로 빛 잔상만 남은 허공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 내려 블론디나를 응시했다. 벅차오르는 기쁨이 두 눈동자에 가득 담겼다.
블론디나 역시 행복해져 뺨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안심해도 돼. 에이몬. 난 너랑 평생 행복하게 살 거야.
에이몬은 블론디나를 조심스레 끌어안으며 긴 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는 듯. 긴긴밤을 돌아 비로소 아침을 맞이한 이처럼 평온히.
***
그르릉……. 흑표범은 발톱으로 저택 문을 벅벅 긁었다. 애타는 발짓에도 문은 결코 열리지 않았다.
에이몬은 송곳니를 까득거리며 몸을 웅크렸다. 문 안쪽에서 미세한 신음이 새어 나온다. 일그러진 그의 미간이 더욱 일그러졌다.
“어때욧? 무슨 소리 들려요, 에이몬 님?!”
에이몬의 목덜미에 앉아 있던 마제또가 날개를 파닥거리며 물었다. 에이몬은 들린다는 표시로 고개만 힘없이 끄덕였다.
하지만 들리면 뭐 하나. 들어갈 수도 없는걸.
안에서 들려오는 신음은 블론디나의 목소리였다. 바로, 아이를 낳고 있는 신수 반려의 신음.
오늘 아침, 블론디나에게 갑자기 진통이 찾아왔다. 저택 근처에 임시 거처를 만들었던 의사와 루시가 한달음에 뛰어왔고, 출산 경험이 있는 할라 역시 황급히 방문했다.
그리고 아이의 아빠가 될 에이몬과, 마제또 역시 함께 방 안에 있었으나.
“둘 다 나가 주세요!”
곧 루시의 엄한 명령에 쫓겨나고야 말았다.
마제또의 죄목은, ‘호들갑 떨며 날아다녀 블론디나 님의 정신을 사납게 한 죄’ 에이몬의 죄목은 ‘온종일 초조한 얼굴로 블론디나 님의 불안함을 더욱 야기시킨 죄’였다.
천장을 빙빙 돌며 삑삑 비명을 질렀던 마제또. 블론디나 옆에 붙어 식은땀 나는 그녀의 이마를 훔치고, 맞잡은 손을 매만지고. 떨리는 손으로 기도하듯 그녀를 붙들었던 에이몬.
둘 다 거슬렸던 블론디나가 결국 엄포하고야 말았다.
“정말 미안하지만 둘 다 나가 주었으면 좋겠어…….”
그리하여 행동 대장인 루시의 명에 힘없이 밖으로 나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있나. 걱정되어 미치겠는데. 혹여 아프지는 않을까, 힘들지는 않을까, 염려로 몸이 달아 죽겠는데.
꼬리를 팍팍 흔들며 온몸으로 초조해하던 에이몬이 결국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마제또를 등에 단 채 이동해 창문 앞으로 갔다.
창틀 위로 슬며시 얼굴을 올려 본다. 들키지 않게끔 아주 조심스럽게.
새까만 귀를 쫑긋거리며 지켜보았으나 아쉽게도 커튼이 내려진 침대 안은 도통 보이지 않았다.
「브리디…….」
에이몬은 귀를 움찔거리며 블론디나의 이름을 불렀다. 보이지도 않을 안을 투시하듯 뚫어지라 응시하며.
“블론디나 니임…….”
마제또 역시 에이몬의 정수리에 앉아 힘없이 짹짹거릴 따름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뭇가지 끄트머리에 걸렸던 해가 중천에 다다랐을 무렵, 우두커니 안을 들여다보던 에이몬이 슬렁 꼬리를 움직였다.
안쪽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분위기가 부산스럽고 다급해졌다. 졸지에 에이몬 역시 긴장된 숨을 꼴깍꼴깍 삼키며 그들의 동태를 주시했다.
“으애앵!”
“애앵!”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공기를 찢어 낼 듯 강하게 터져 나오는 목소리. 방금 태어난 두 아이의 울음소리였다.
「브리디!」
결국, 에이몬은 참지 못하고 창문을 깨부수며 안에 들어서고야 말았다. 흑표범이 두 아이의 아빠가 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