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외전 1화
블론디나는 뒷짐을 진 채 슬슬 걸음을 옮겼다. 적당한 운동을 하라는 의사의 조언에, 그녀는 지금 갈대숲 중앙 길을 따라 산책 중이었다.
귀엽게 볼록 나온 배를 내밀고 뒤뚱뒤뚱 걷는다. 갈대가 가득한 들판에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풀 사그락대는 소리가 정취 있게 울렸다.
‘시원하네.’
목덜미를 감아 오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블론디나는 조용히 웃었다. 유난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만삭의 몸으로 숲을 활보하는 건 위험했다. 가지를 늘인 나뭇가지나 땅 위로 불쑥 솟은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하면 곤란하지 않은가.
그래서 최근 신수의 숲 근처 들판을 걷기 시작했는데, 없는 길을 만들어 준 건 야생마들이었다. 일전에 에이몬, 블론디나와 함께 여행했었던 흰 말, 데이지 일족.
“다리 안 아파?”
걱정스러운 에이몬의 말에 블론디나는 고개만 저었다.
“괜찮아. 오늘 바람 시원하다. 그치?”
에이몬은 전전긍긍 블론디나 뒤만 따랐다. 혹여 넘어질까, 다칠까 한없이 초조한 표정으로.
그리고 그런 에이몬의 뒤를 하얀색 망아지가 졸졸 쫓았다. 에이몬은 뒤를 힐끗 돌아보더니 주둥이로 제 허리를 툭툭 미는 흰 망아지의 콧잔등을 툭툭 두드렸다.
“지금 네 아빠가 지금 나 엄청 노려보는데.”
푸릉. 흰 망아지는 상관없다는 듯 한번 울었다. 그 망아지는 데이지의 새끼였다. 제 아비 데이지와는 달리 에이몬을 무조건적으로 따르고 좋아하는.
망아지의 콧잔등을 한 번 더 어루만지자, 망아지는 에이몬의 손길이 좋다는 듯 주위를 다그닥다그닥 신이 나 돌았다.
픽 웃은 에이몬이 다시 고개 돌려 블론디나를 따라 걸었다.
“천천히 걸어, 브리디. 넘어질라.”
“그만 좀 걱정해. 누가 보면 내 아빠인 줄 알겠어.”
평화롭고도 한적한 오후였다. 갈대를 헤치며 펄쩍펄쩍 뛰는 흰 망아지를 제외하고는 아주 고요한.
석양 노을이 들판을 뒤덮자 블론디나는 그제야 산책을 멈췄다. 바람이 차가워지기 전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옆을 따라붙는 망아지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에이몬과 함께 나왔다. 들판과 숲 경계에 위풍당당히 서 있는 흰 말 한 마리가 보였다.
망아지의 아비인 데이지였다. 새하얀 갈기에 반지르르 윤기가 돈다.
“아빠가 너 기다리고 있네, 올리.”
블론디나는 데이지를 향해 손을 흔들며 웃었다.
데이지 역시 반가운지 이를 드러내며 앞발을 들어 올렸다가 뒤따라 오는 에이몬과 눈을 마주치자 눈을 부릅떴다. 에이몬의 뒤를 졸졸 쫓아오는 제 새끼 올리를 보았기 때문이다.
올리가 에이몬을 좋아한다는 점이 큰 불만인 것 같았다.
도대체 저 깡패 같은 신수를 왜 좋아하는 걸까. 크나 작으나 세상에서 제일 밉상인 놈을.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으나 자식은 원래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
데이지에게 찬찬히 다가간 블론디나가 갈기를 슬슬 쓰다듬었다.
“어떻게 날이 갈수록 이렇게 멋있어지지, 데이지는?”
단단하고 멋진 다리 근육. 햇빛 아래 반짝이는 흰 털. 강인함이 느껴지는 눈빛. 언제 보아도 참으로 우아하고 날쌘 야생마였다. 물론 에이몬 앞에서만큼은 한없이 작아지고는 했지만.
마치 지금처럼.
“야.”
데이지를 향해 에이몬의 난데없는 시비가 던져졌다. 늘 그랬듯 데이지는 고개 돌려 그를 외면했다. 상대하기 싫다는 표현이었다.
“야.”
하지만 다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결국 고개 돌려 마주하고야 말았다. 야. 짧게 던져진 단어에서 한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에이몬이 씩 웃으며 데이지의 갈기를 다정하게 매만졌다.
“야. 너 나 싫지.”
히힝.
데이지는 부정도 긍정도 아닌 대답을 던졌다. 그리고 에이몬이 만지는 것조차 치가 떨린다는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물론 에이몬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답지 않게 부드럽고도 상냥한 손길로 갈기를 쓰다듬었을 뿐이다. 네가 싫어하면 내가 안 만지냐, 더 만지지.
“그런데 어쩌지. 네 아들은 나 좋아하던데.”
그것도 아주 많이. 매우. 몹시.
히힝-!
에이몬이 이죽거리며 던진 말에 데이지는 광분하여 푸륵거렸다. 그 와중에도 데이지의 아들, 망아지 올리는 눈치도 없이 에이몬의 옷자락을 질근질근 씹으며 노는 중이었다.
블론디나는 데이지의 갈기를 배배 꼬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래도 요새 에이몬이 데이지를 놀리는 데 흥미가 붙은 듯하다. 하기야 데이지가 저렇게 눈에 보이는 반응을 딱딱 보여 주니 재미있을 법도 하다만…….
아기 야옹이일 때나 다 큰 지금이나 하는 짓은 어쩌면 저렇게 똑같이 괴팍한지.
‘아가야. 저 성격 삐뚤어진 짐승이 바로 네 아빠란다. 좋지?’
블론디나는 배 속 아기에게 말을 붙이며 에이몬을 향해 다가갔다.
“에이몬. 그만해.”
이제 에이몬의 즐거운 시간을 마무리 지어야 할 때였다.
데이지 그만 놀리고 가자. 숲을 향해 눈짓하자, 에이몬은 그제야 데이지의 등을 꽉 눌렀다. 무언의 신호에, 커다란 말이 그대로 무릎을 굽혔다.
블론디나가 몸을 낮춘 데이지 갈기를 문지르며 속삭였다.
“이번에도 잘 부탁해.”
블론디나는 몸을 더욱 낮추는 데이지 등에 조심스레 올라탔다. 타각타각 조심스러운 발길이 숲길을 가로질러 가기 시작했다.
블론디나는 안장 위에서 중심을 잡으며 고삐를 움켜쥐었다. 확실히 에이몬의 등보다는 안정적이고 편안하다.
숲에서 들판으로 나올 때 늘 그녀는 데이지의 도움을 받았다. 걸어가기엔 산세가 험하고 에이몬의 등을 타기엔 움직임이 심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데이지는 블론디나를 무척 좋아했으며 그녀를 태우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데이지. 늘 고마워.”
짐승의 갈기를 매만지며 고마움을 전했다. 블론디나의 인사에, 데이지는 기분이 좋은지 푸르륵거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에이몬이라는 괴팍한 신수만 없다면 무척이나 행복하고 완벽했을 여정이었다.
돌아오니 테이블에 홀로 앉아 축 늘어져 있는 마제또가 보였다.
블론디나는 저택을 벗어나는 데이지와 올리를 향해 손을 흔든 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마제또에게 다가섰다. 음울한 그림자가 참새 얼굴에 그득 깔려 있었다.
“마제또. 왜 그래?”
마제또의 꽁지가 힘없이 축 내려갔다. 블론디나는 의자에 앉아 마제또의 배를 간지럽히며 다시 물었다.
“내 예쁜 새야. 무슨 일 있어?”
최근 여자 친구가 생겼다며 짹짹 노래를 불러 대더니. 아무래도 헤어진 걸까.
마제또는 부리를 뻐끔거리며 고민하다가 이내 날개를 들썩이며 입을 얼었다.
“블론디나 님. 내가 너무 시끄러워? 내가 말이 많아요? 응?”
“…….”
확실히 그 말에는 부정하기 힘들었다.
마제또는 자신이 아는 참새 중에서, 아니 자신이 아는 온 생명체를 통틀어 가장 말이 많은 새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귀여운 수다쟁이.
“응? 내가 그래요? 나랑 같이 있기 싫고 피곤하고 그래요? 응? 응?”
“아니야. 전혀 아니야.”
블론디나는 고개를 휙휙 내저으며 강하게 부정했다. 마제또의 짹짹거림이 과할 때도 있기는 하지만 언제나 애틋하고 사랑스러운 참새다. 같이 있기 싫고 피곤하다니, 어떻게 그런 말을.
블론디나가 손끝으로 마제또의 정수리를 꼭꼭 쓰다듬었다.
“마제또. 진짜 무슨 일이야?”
이미 이유는 알 것 같지만 우선은 물어보았다. 분명 여자 친구 참새와 헤어졌을 테지.
에이몬의 저택에 둥지를 틀어 힘에 영향을 받은 탓일까. 마제또는 일반 참새보다 똑똑하고 말이 많아 다들 버거워했다.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평범한 새는 아니었으니.
“나랑 같이 있으면 다들 자꾸 멀리 날아가. 내가 싫은가 봐.”
시무룩한 마제또의 말 만큼, 참새의 깃 역시 축 늘어졌다.
블론디나는 속으로 안타까움을 삼켰다. 역시. 헤어졌구나.
“아니야. 마제또. 마제또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새인걸. 그런 생각 하지 마.”
짹……. 마제또는 부리를 한번 뻐끔거리더니 이내 더욱 고개를 숙였다.
“있잖아, 블론디나 님.”
“응, 마제또.”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만 귀여워할 거야?”
“응?”
그 말의 저의를 파악하지 못해 블론디나는 잠시 굳어 있었다. 블론디나에게서 대답이 나오지 않자 마제또의 머리 깃은 한결 더 착 가라앉았다.
탁. 블론디나 앞에 따뜻한 차를 내려놓은 에이몬이 옆자리에 앉았다. 뺨에 닿는 입술과 함께 나직한 속삭임이 그녀의 귓가에 울려 왔다.
“브리디. 마제또가 서운한가 본데.”
그는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배를 덮어 슬슬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지금 우리 아이가 태어나면 자기에게 주는 관심이 줄어들까 봐 걱정하는 거 아니야. 저 귀여운 놈이.”
“……뭐?”
“마제또는 널 무척 좋아하니까.”
아! 블론디나는 입을 탁 벌렸다.
여자 친구와 헤어져서 우울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왜 미처 눈치채지 못했는지. 에이몬도 알아차린 사실을 왜 본인만 몰랐을까. 스스로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저 귀여운 참새가 그래서 요새 기분이 저조했구나.
블론디나 역시 슬퍼졌다. 임신 이후 감정이 본인 모르게 격해질 때가 많았는데 지금이 그랬다.
마제또. 네가 그런 생각을 하다니. 내 사랑스러운 참새가 이렇게 슬퍼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난 바보야.
“마제또. 아이가 태어나면 네게 줄 애정이 줄어들까 봐 걱정한 거야?”
블론디나는 두 손으로 마제또를 부여잡고 제 뺨에 비볐다. 뺨에 닿는 참새 깃털이 보드라웠다.
“그럴 리 없잖아, 마제또. 너는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참새인걸.”
마제또는 블론디나의 뺨을 날개로 착 끌어안았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면 다 바뀌잖아요. 샨티 님하고 할라 님도 그렇고…….”
“아니야, 아니야, 마제또. 마제또가 얼마나 소중한데. 네 마음 몰라줘서 미안해. 그간 걱정 많이 했어? 서운했어? 응?”
마제또가 어떤 마제또인가.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귀여운 참새이자, 절 위해 얼음 강에도 뛰어들었던 참새다. 마부들에게 납치당했을 땐 절 구하려 쫓아오기까지 했었다.
그런 마제또를 서운하게 하다니. 내가 나빴어.
블론디나는 왜인지 감정이 격해져 울먹이며 마제또의 보드라운 배를 뺨에 비볐다. 마제또 역시 날개를 파닥거리며 블론디나 뺨에 착 붙었다.
“마제또.”
“블론디나 님!”
그리고.
“…….”
서로 뺨을 맞대고 우는 인간과 참새를 보며, 인간 모습을 한 표범은 가만히 턱을 문질렀다. 난 이제 뭘 해야 하지. 그냥 이렇게 앉아 있으면 되는 건가. 그건 좀 그런데.
우두커니 둘을 응시하던 에이몬이 곧 두 팔을 벌려 마제또와 블론디나를 한꺼번에 끌어안았다.
블론디나는 제가 사랑하는 반려였고 마제또는 제가 아끼는 참새다. 어찌 되었든 두 소중한 존재를 어떻게든 위로해야만 했다.
“난 브리디 너도 사랑하고, 마제또 너도 사랑해. 그러니 그만 슬퍼해.”
하지만 에이몬의 위로에도, 블론디나와 마제또는 그의 품 안에서 한참이나 울먹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