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
#108화
블론디나는 오래간만에 마주한 아름다운 남자를 넋을 놓고 응시했다.
남자의 머리카락 위로 정오의 볕이 잔상처럼 떨어진다. 살짝 숙인 고개. 내리깐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가 아른아른 빛났다.
그리고 그 섬세하게 세공된 것같이 생긴 남자는, 아까부터 자그마한 참새에게 가차 없이 공격받고 있었다.
“바보!”
분노가 대단히 밴 목소리로, 참새가 그의 정수리를 퉁당퉁당 밟았다. 남자는 눈을 내리깐 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멍청이!”
참새의 작은 발이 그의 흑발을 꽉 움켜쥐었다. 그의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헤집으며 참새는 다시 소리쳤다.
“이 쪼다놈!”
그제야 남자가 뒤늦게 반응했다.
“……놈은 좀 그렇지 않나, 마제또.”
“쪼다! 이 쪼다 같은 짐승!”
파닥파닥 날갯짓하며 마제또는 발로 에이몬의 머리끄덩이를 휘어잡았다. 꽉꽉 끌어당기고 마구 헝클어뜨렸다.
“…….”
에이몬은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대역죄인이 된 표정으로 참새의 패악질을 받아들일 수밖에.
말하자면 체념한 것이다. 어쨌든 자신이 죄를 지은 게 맞기는 했으니까. 마제또의 분노가 너무도 정당하지 않은가.
제 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숲의 최상위에 있는 포식자가 피식자에게 사정없이 공격받으면서도 가만히 참는 것이다.
마제또는 오늘 아침 놀라 까무러칠 뻔했다. 에이몬의 털을 몰래 뽑아 만든 폭신한 둥지 안에서 포근하게 잘 잔 후 일어났는데.
‘바보 멍청이가 된 신수님이 다시 멋진 인간이 되어 나타났어!’
에이몬 님이 돌아왔다. 눈빛에 총명한 지성이 담긴 인간이 되어 아주 위풍당당하게.
바로 어제만 해도 블론디나 님께 감히 으르렁대던 짐승이다. 만지려고 하면 송곳니를 내며 미약한 경계심을 놓지 않았던 짐승이었다.
기억을 찾으면 얼마나 후회하려고!
어쨌든 오늘 역시 몰래몰래 꼬리를 쪼아 버리리라 다짐하며 뒤뜰을 향해 날아갔는데.
나무에 기대어 앉은 에이몬과, 에이몬의 가슴팍에 안겨 있는 블론디나 님이 보였었다.
순간 마제또는 이게 꿈인가 싶어 옆에 있는 나무에 콩 몸통 박치기까지 했었다. 아프긴 엄청 아팠다. 현실이라는 뜻이었다.
마제또는 정신없이 날아가 정신없이 울먹거리며 “에이몬니임!” 하고 그의 이름만 불렀다.
블론디나는 감정이 격해진 마제또를 위해 쿠키를 마련하여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는데. 이내 정신을 차린 마제또가 에이몬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달뜬 분노를 온 발에 담아.
“바보! 멍청이!”
블론디나 님이 얼마나 울었는지도 모르고!
그간 에이몬의 저택, 아니 에이몬이 떠나 블론디나 홀로 차지하게 된 저택 근처에 기거하며 그녀를 누구보다 가까이 지켜보았던 날짐승이다.
그녀가 간절한 얼굴로 기억이 돌아올 에이몬을 기다렸던 것도. 차가운 달이 기울었음에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며 눈물 흘리던 것도. 슬픔을 힘겹게 삼켰던 것도 모조리 지켜보았다.
그랬기에 더욱 힘차게 에이몬을 공격하는 것이다.
‘에이몬 님은 혼나 마땅해! 블론디나 님은 쉽게 용서해 주셨지만 난 그렇게 못해!’
마제또는 파닥거리며 에이몬을 응징하다가 결국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졌다. 블론디나의 손바닥에 누워 씩씩거리면서도 계속 에이몬을 노려보았다.
“이제 화가 좀 풀렸어, 마제또?”
느긋하게 묻는 에이몬이 슬금슬금 마제또를 쓰다듬으려 했지만,
“삑!”
사정없이 손등을 쪼아 버리는 작은 새의 행동에 다시 슬쩍 손을 치울 수밖에 없었다.
“바보! 바보 멍청이예욧, 에이몬 님은!”
마제또의 날로 달로 쌓인 분노는 당분간 풀릴 것 같지 않았다. 한때 신수를 다스렸던 숲의 지배자가 자그마한 참새에게 안절부절못하며 눈치를 살폈다.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는 블론디나는 결국 제 배를 문지르며 웃었다.
“보여? 아빠가 지금 귀여운 참새에게 혼나고 있어.”
쩔쩔매는 에이몬도, 화를 내는 마제또도 모두 사랑스러울 뿐이었다.
***
석양이 산 너머로 모습을 감추는 시간이었으나 태양이 마지막으로 터트리는 빛은 아직 눈부시게 빛났다. 찬란히 부서지는 금빛 햇살이 유리창 위로 녹아내린다.
“황녀님!”
“블론디나!”
해질녘 빛을 해치고 들어선 둘은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휘청이는 몸을 가누지 못해 한 사람은 테이블을, 한 사람은 수납장을 붙들고 몸을 지탱했다.
그 둘의 정체는 루시와 라르트. 둘은 마제또에게 ‘에이몬 님이 돌아왔다’라는 소식을 듣고 마구 뛰어온 참이었다.
제국의 위대한 황제와, 황제의 약혼녀가 체통 따위는 날려 놓고 정신없이 이곳으로 달려왔다. 라르트의 구두는 흙투성이가 됐고 루시의 드레스는 여기저기 주름이 갔다.
둘은 가쁜 호흡을 진정시키지 못해 한동안 헉헉거렸다. 그러다가 저들에게 조용히 물잔을 건네는 한 남자를 보고 동시에 꽥 소리쳤다.
“에이몬 님!”
“에이몬 님?!”
에이몬은 두 인간의 외침에 머리가 아프다는 듯 미간을 살며시 좁혔다.
잠시 후. 조금 진정이 됐는지, 루시와 라르트는 다시 의연한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언제 호들갑을 떨었냐는 듯 허리를 쭉 펴고 고고하게 자세를 잡는다.
에이몬이 기억을 되찾았다는 소리를 듣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달려오기는 했으나, 실상 본인들은 제국에서 가장 위엄을 보여야 할 신분이었다.
라르트는 황제였고, 루시는 차후 황후가 될 신분 아니었던가.
저택 밖. 보이지 않는 수풀 안에는 저들을 따라 마구 달려온 호위기사들이 대기하고 있을 터였다. 아마 영문 모를 표정으로 자신들을 보고 있겠지.
루시는 블론디나가 건넨 찻잔을 받아 조심스레 입술에 대었다. 찻잔 위로 드러난 눈이 마주 앉은 에이몬을 파헤칠 듯 응시했다.
담담했던 루시의 눈빛 안에 미약한 원망이 담겼다.
우선 기뻐 달려오기는 했으나, 제 황녀님을 속상하게 한 에이몬 님을 마냥 반길 수만은 없었다. 마음 같아서야 욕이라도 한 바가지 해 주고 싶었는데 감히 그럴 수 있을 리가.
속만 부글부글 끓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불손한 눈으로 그를 주시하는 것뿐.
따뜻한 찻물을 목 뒤로 넘기며 에이몬을 향해 눈빛 한 번. 쿠키를 향해 손을 내밀며 눈빛을 또 한 번.
에이몬은 덤덤하게 루시의 눈빛을 받아 넘겼으나 결국엔 저 역시 차를 마시며 그녀의 눈을 피했다.
그 와중에 에이몬이 마신 차는 라르트의 것이었다. 졸지에 찻잔을 빼앗긴 라르트는 황당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으나 에이몬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저기, 에이몬 님.”
탁. 찻잔을 내려놓은 루시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에이몬은 대답 대신 저 역시 라르트의 찻잔을 내려놓은 후 시선을 들었다.
“정말…… 정말 죄송하지만, 에이몬 님. 하나만 간청 드려도 될까요?”
“말해.”
덤덤히 답하는 에이몬의 허락에, 루시는 에이몬의 머리 위를 주시했다.
짹! 짹! 아까부터 마제또가 에이몬의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쥐어 비틀고 있었다.
해 질 무렵, 에이몬이 블론디나와 함께 저택에 들어가자 마제또의 공격 역시 끝났었다. 하지만 루시와 라르트가 등장하여 밖으로 나오자마자 공격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짹짹짹! 부리를 뻐끔거리는 마제또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던 루시가 기어이 용기를 냈다.
“에이몬 님. 저도 욕 한 번만 하면 안 될까요? 이대로는 잠 못 잘 것 같아서요…….”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동시에 무척이나 겁이 치미는 얼굴로, 그러나 이대로는 절대 물러날 수 없다는 강경한 눈빛으로, 루시는 간청했다.
사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욕설과 폭력을 퍼붓고 싶은 충동을 강렬히 느끼고 있던 바였다. 하지만 차마 그리할 수 없어 눈으로만 욕하며, 마음껏 행동하는 참새를 부러워한 루시다.
황녀님이 홀로 얼마나 힘들어했는데. 홑몸도 아닌데 기억 잃은 짐승을 지켜보며 얼마나 울었었는데. 이대로 지나가면 평생 가슴만 쿵쿵 치며 살아갈 것 같았다.
“…….”
에이몬의 침착한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선전포고 아닌가.
그 와중에도 마제또는 계속해서 에이몬의 머리끄덩이를 붙들었고, 작은 새의 공격은 난폭하게 계속되고 있었다.
에이몬은 머리를 쥐어뜯기며 고민하다가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행동으로 표현하는 허락이었다.
평소 그라면 상상하지 못할 선택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죄인인 상태였다. 자그마치 제 반려를 기억에서 지우지 않았는가.
작은 새에게 머리끄덩이를 잡혀도, 참새보다는 크나 그래도 자그마한 인간에게 욕을 먹어도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는.
천하의 오만하고 위대한 신수님이 절 향해 분노한 이들에게 한없이 관대해졌다.
조용히 일어선 루시가 조심조심 에이몬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굳은 얼굴로 치맛자락을 비틀어 쥐더니 가만가만 속삭이는 것이었다.
“나쁜 놈.”
“…….”
“천하의 나쁜 새끼.”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던 처음과 달리 두 번째 ‘나쁜 새끼’는 어조가 꽤 격렬해졌다.
나직한 루시의 힐난에 도리어 당황한 건 라르트였다. 그는 어쩔 줄 몰라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식은땀만 흘렸다.
세상에! 신수님에게! 내 애인이? 이제 겨우 신수와 인간 사이에 평화가 도래했는데?!
만약 자신이 에이몬에게 ‘나쁜 놈’이라고 내뱉었다면 나무에 매달려 반쯤 죽은 상태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루시는 그런 황제 폐하의 속 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다시 입을 열려 했다.
에이몬이 침착하게 그녀를 막았다.
“한 번만 한다며.”
루시는 이미 욕을 두 번이나 한 상태였다.
에이몬은 바로 고개 돌려 제 곁에 앉은 블론디나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고개 숙여 그녀의 귓가에 입을 맞추며 부드럽게 말을 건넨다.
“웃고 싶으면 그냥 웃어.”
블론디나의 귓가에 다정한 제안이 속삭여졌다.
그녀는 아까부터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상태였다. 손수건을 말아쥔 손이, 자그마한 그녀의 어깨가 웃음을 참기 위해 파들파들 떨렸다.
괜찮다고, 웃고 싶으면 웃어도 좋다고, 마제또에게 여전히 공격당하며 속삭이는 에이몬의 말에 블론디나는 결국 고개를 들었다. 그런 후 소리 내어 웃으며 에이몬의 품에 제 얼굴을 묻었다.
이 상황에 웃는 게 미안해서 간신히 참았다만, 속에서부터 간질간질하게 솟는 유쾌함을 더 억누를 수 없었다. 에이몬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웃음소리를 작게 감추는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에이몬은 제 옷을 붙들고 웃는 블론디나의 등을 가만히 토닥거렸다. 여전히 마제또는 그의 정수리 위에 앉아 에이몬을 나름 깔아뭉개고 있었다. 마치 신수를 지배하듯 위풍당당하게.
짹! 참새가 한번 소리쳤고, 루시는 에이몬을 몰래 노려보았으며, 블론디나는 숨죽여 웃었다.
제 배를 습관적으로 문지르며 달뜬 웃음을 흘린다.
에이몬을 되찾은 이후로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모든 것이 행복하기만 했다. 흑백으로 어둡게 침전된 현실이 아름답게 피어오른 기분이었다.
에이몬이 있기에. 에이몬이 돌아왔기에.
이제 둘이 함께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