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
#107화
짐승은 달리고 또 달렸다. 달빛 아래 그를 따라 죽 늘어지는 그림자처럼, 터져 나올 것 같은 흥분과 초조함이 그를 바짝 따라붙었다.
헉헉, 뜨거운 숨결을 뱉어 내며 제 속에 맴도는 목소리를 들었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목소리가 뇌리를 격렬하게 관통하고 있었다.
“난 언제나 너만 있으면 되니까.”
오래된 화석이 잠에서 깨어나듯, 제 감각에 숨어 있던 누군가의 목소리가 녹아 흐른다.
“다시 만날 수 있어. 그러니까, 울지 마. 착하지?”
머나먼 과거에 들었던 누군지 모를 이의 목소리.
절 선택했기에 죽을 수밖에 없었던 누군가의 목소리. 죽어 가면서도 제게 신력을 모조리 밀어넣고 피 흘리며 절 달래던 나긋한 목소리.
심장이 쥐어 짜이는 것 같은 고통이 요동친다.
에이몬은 어느새 멈추어 섰다. 초조한 숨소리가 적막한 숲을 울렸다.
“이렇게라도 내 옆에 있어 줄 거지?”
마지막으로 그는, 절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던 인간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나직했으나 아픔과 그리움이 처절하게 박혀 있던 목소리를.
짐승은 천천히 고개를 떨궜다. 쿵. 쿵. 쿵. 환청처럼 제 머릿속을 채우는 목소리에 가슴이 타 버리는 것만 같았다.
***
언제 다시 잠든 걸까. 블론디나는 멍하니 눈을 끔뻑거렸다.
방금 전, 에이몬이 사라진 문만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 자리에 누웠었다.
임신하면 온종일 잠이 쏟아진다더니 그 말이 딱 맞다. 바보 고양이라며 에이몬을 욕하다가 눈을 감았는데 그대로 수마에 빠져들었었다.
그리고 지금이 됐다. 뒤척뒤척, 불편한 몸을 움직이며 선잠에서 깨어, 새파랗게 빛나는 두 안광을 발견한 지금이.
“……에이몬?”
이름을 불러오자, 절 내려다보고 있던 그가 눈 아래를 일그러뜨렸다. 터져 나오는 감정을 참을 수 없는지 꽉 쥔 손등 위로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블론디나는 비로소 옅게 웃었다.
아아, 꿈이로구나.
그녀는 지금이 꿈이란 걸 아주 쉽게 알아차렸다. 새까만 짐승이 아닌, 인간 모습의 에이몬이 이렇게 곁에 있지 않은가.
절 아프게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달빛에 젖어 있었다. 분명 꿈인 게 확실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좋았다.
블론디나는 환상으로 다시 만난 반려를 향해 두 팔을 천천히 뻗었다.
“왜 울려고 그래. 이 좋은 꿈속에서.”
꿈에서조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는데, 기뻐해야지.
늘 피투성이 에이몬만 꿈에 나왔다. 제게 등 돌리고 떠나 버리는 마지막 모습만 꿈에 나왔다. 그때마다 손을 휘저으며 식은땀에 젖은 얼굴로 꿈에서 깨고는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눈앞에 이렇게 에이몬이 있는걸. 깨고 싶지 않은 행복한 꿈이었다.
곧 단단한 팔이 그녀를 잡아당겨 강하게 끌어안았다.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는 입술을 비비며 팔을 잘게 떨었다. 다시 떨어질세라 맞닿은 몸을 간절히 맞붙이고 애원하듯 붙들었다.
신을 향해 간청하는 신실한 신도처럼 그녀를 향해 빌듯이 맞붙었다.
뜨거운 덩어리가 속에서 왈칵왈칵 치밀어 올랐다.
“브리디. 브리디.”
제 속에 아주 많은 말들이 휘도는데, 그 무엇도 꺼낼 수 없었다. 입을 열면 담아내기 힘든 감정들이 폭포가 되어 쏟아질까 봐, 그녀의 이름만 간신히 부를 뿐이었다.
난잡하게 조각난 기억이 되살아났다. 텅 빈 샘에 물이 차오르듯, 그녀를 다시 끌어안는 순간 안도와 환희가 차올랐다.
이 몸이었다. 블론디나였다. 한낱 짐승이 되어 숲을 배회하면서도 늘 끓어오르는 갈증으로 목이 말랐다. 메마른 사막을 이정표 없이 헤매듯 늘 혼란만이 가득했다.
제 삶에 그녀가 없었기에. 어리석게도 그녀를 잊었기에.
“에이몬?”
블론디나는 제 목덜미에 파고드는 그를 놀란 눈으로 내려 보았다. 그녀를 간절하게 끌어안았던 그는 무너지듯 허물어져 그녀의 가슴팍에 안겨 있었다.
블론디나는 그를 안아 주며 맞닿은 온기를 음미했다. 이전처럼 온몸으로 매달려 응석 부린다. 그 애정 어린 행동이 너무도 익숙하여 오히려 위화감이 들었다.
‘꿈이 이렇게 선명해도 되는 걸까. 에이몬이 정말로 돌아온 것 같아.’
이대로 꿈에서 깨어나면 밀려드는 슬픔을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한순간 맛본 행복이 너무도 선연해서.
블론디나는 이내 슬프게 웃으며 그의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쓸어 내렸다. 불안함으로 몸을 떠는 아이를 달래듯 아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있잖아. 내가 아주 오래전에 죽을 때도…… 너 아까 봤던 표정하고 똑같은 얼굴이었어. 꼭 울 것같이.”
「…….」
“변한 게 없네, 내 고양이.”
블론디나는 속삭이듯 읊조리며 그의 머리카락에 제 뺨을 기댔다. 감촉이 너무도 생생하여 오히려 슬펐다.
괜찮은 척했지만 실은 원하고 있었구나. 에이몬에게 안기기를 무엇보다 바라고 있었나 보다.
“이전 생에서도, 이번 생에서도 말해 주지 못했어. 꺼내지 않으면 네가 들을 수 없는데 내 속에만 꼭꼭 숨겨 놨었어.”
「…….」
“사랑해, 에이몬. 내가 라피옌이었을 때도, 이번 생에 널 다시 만났을 때도 늘 사랑했어.”
블론디나는 진작 말하지 못했던 고백을 터뜨리고는 제 가슴팍에 안긴 그를 꽉 마주 끌어안았다. 눈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혼자 힘들었지. 그 많은 생을 견디며 외로웠었지.”
에이몬이 홀로 헤맸을 전생의 시간을 위로해 주며, 블론디나는 그를 다독여주듯 끌어안았다.
자신이 지금 그를 잃은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에이몬은 몇 겁의 환생을 거치며 홀로 힘겹게 견뎌 냈다. 늘 블론디나 자신만 그리고 그리다가 끝끝내 홀로 외롭게 눈을 감았다.
몇백 년 전. 에이몬이 신수를 죽이고 인간마저 죽이며 광기로 미쳐 날뛰었던 것 역시 자신 때문이었다. 바보같이 이제야 기억해 냈다.
그때도 황족으로 태어난 블론디나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실수로 죽여 버린 후 미쳐 날뛴 것이다.
미리 알았다면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죄책감과 슬픔으로 광기에 휩싸인 제 짐승을 홀로 둔 채, 그때 역시 훌쩍 떠나 버렸다.
에이몬을 남겨 두고 훌쩍 사라지는 역할은 늘 제 차지였다. 남겨지는 건 늘 에이몬의 몫이었다.
‘그러니 이번 생에서는 내가 널 그리워하는 게 맞지.’
이게 속죄라면 끝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것이 이번 생, 제 쓰디쓴 몫이었다. 그동안 그를 외로움의 구렁텅이에 밀어넣었던 죗값.
불쌍한 내 고양이.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늘.
하지만 그를 향해 속으로 사죄하는 그녀 대신, 사과의 말을 속삭인 건 에이몬이었다.
“미안해.”
“응?”
“미안해, 미안해.”
블론디나는 잠잠히 몸을 굳혔다. 그의 목소리가, 꿈이라기엔 너무도 사실적이었기 때문이다.
툭 떨어지는 눈물의 열기 역시 몹시 현실적이었다. 눈가에 엉겨 붙은 눈물이 뜨거워 마음으로 열상을 입는 것 같았다.
“애초에 널 욕심 낸 것도, 네가 죽을 때 아무것도 못 했던 것도, 널 몰라보고 죽였던 것도, 다시 만나 놓고 다 잊은 것도, 다 내 잘못이야.”
“…….”
“네게 모든 걸 던져 놓고 나 혼자 달아나서 미안해. 날 용서해 줘, 브리디.”
그의 고백은 폭풍우에 흔들리는 나무처럼 휘청거렸고, 폐허가 된 전쟁터처럼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은, 블론디나의 마음을 가시같이 파고들었다. 바짝 말라 쪼그라든 심장을 움켜잡고 아프게 붙들었다.
블론디나는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뜨며 제 목덜미에 뺨을 붙인 그를 내려다보았다.
‘아…….’
그제야 깨달았다.
에이몬이었다.
얇은 잠옷 아래로 그의 눈물이 스며들었다. 어깨가 뜨거운 물기로 젖어 간다.
꿈이 아니었다.
절 처음 보듯 낯선 눈빛만 올렸던 짐승이, 돌연히 제 사랑이 되어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 사랑이 무너지듯 절 끌어안으며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에이몬.”
믿을 수 없어 그의 이름만 중얼거렸다.
부질없는 환상 같았으나 온몸으로 느껴지는 온기는 그가 맞았다. 에이몬이었다. 누구보다 절 사랑해 주고 아껴주던 소중한 고양이.
제 반려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에이몬. 에이몬.”
소리 없는 흐느낌을 안고 이름만 되풀이하여 불렀다.
몸을 일으킨 에이몬이 블론디나를 품에 꼭 당겨 안았다. 블론디나는 그제야 힘겨운 숨을 뱉었다.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등을, 단단한 손이 위로하듯 쓸어 내렸다. 커다랗고 따뜻한 손바닥이 부드럽게 스칠 때마다, 블론디나는 눈물을 한 방울씩 툭툭 떨궜다.
“왜, 왜…….”
왜 이제 왔어. 원망하고 싶었지만, 원망보다 기쁨이 더 커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행복했으나 자꾸만 눈물이 나는 건, 기약 없던 아픈 기다림 때문이었다.
애타는 그리움 속에서 몇 달을 보냈다. 다시 돌아오리라 믿었으나 한편으로는 그를 영영 잃은 건 아닐까 하는 불안함으로 힘겨워했다.
하지만 다시 눈앞에 있다.
억지로 꿋꿋한 척하지 않아도 좋았다. 억지로 괜찮은 척 웃지 않아도 괜찮았다. 마음껏 울음을 터뜨리며 무너져도, 절 단단히 지탱해 줄 그가 있었기에.
“이 멍청한 고양이…….”
애써 눌렀던 원망이 사무치게 끓어올랐다.
블론디나는 주먹을 들어 올렸다가 이내 툭, 그의 가슴팍에 올려놓았다.
에이몬은 그녀의 손등을 조심스럽게 감싸 쥔 후 손가락 사이에 제 손가락을 밀어넣었다.
굳게 겹쳐지는 온기를 느끼며, 블론디나는 어깨를 움츠리고 울었다.
흐어어엉, 볼썽사납게 소리 내어 울며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쏟아 냈다. 참았던 감정이 펑 터져 버린 것처럼 밀려왔다.
“왜 이제 왔어. 왜. 왜……!”
내가 어떤 마음으로 기다린 줄도 모르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으르렁대기만 하는 널 보며 늘 얼마나 무너져 내렸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에이몬은 쏟아지는 원망을 받아 내며 그녀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미안해, 브리디. 많이 힘들었지. 용서해 줘.”
부드러운 키스와 함께 나직한 목소리가 속삭여졌다. 밤을 가로지르는 그의 고백은 차분했으나, 뜨거웠다. 문장 하나마다, 마디마디마다 물기가 배어 있었다.
블론디나는 무너지듯 안겨 그의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맞닿은 손가락을 끌어당기고, 그에게 달라붙듯 힘껏 기댔다.
그런 블론디나를, 에이몬은 끝없이 안아 주었다.
차갑게 식었던 손끝에 그제야 따뜻한 온기가 일기 시작한다.
둘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잘게 떨리는 그녀의 어깨와 간헐적으로 들리는 울음기 섞인 숨소리가 슬픈 침묵을 비집고 들어올 뿐이다.
맞붙은 둘의 몸은 새벽달이 지고, 아침 해가 뜰 때까지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두 번 다시 멀어질 수 없다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