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
#101화
샘물 안에 뿌연 달 조각이 걸려 있다. 어디서인가 날아온 반딧불이가 꼬리에 빛을 늘이며 날아들었다.
「우리 신수들은 정기적으로 이 샘을 방문해서 힘을 받는 의식을 치렀거든. 사실 실제로 힘을 얻지는 못하는 의식인데 나는 이곳에 올 때마다 조금 이상해지고는 했어.」
나직하고도 조용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마치 깊은 밤 속삭여지는 자장가처럼 다정하고 부드럽게.
무기력한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이곳에만 왔다가 가면 감정이 격해져서 스스로 날 통제하기 힘들었어. 그건 아마 라피옌…… 브리디 네가 내게 주었던 힘 때문이었나 봐.」
에이몬은 샘터 옆에 앉아, 블론디나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 올렸다. 어둠 속에 그녀의 몸이 서서히 빛나는 것을 지켜보며.
샘물 안에 연기처럼 퍼져 나가던 핏물이 이내 사라졌다. 대신 샘을 채운 건 새하얀 빛이었다. 블론디나가 태생부터 지니고 있던 힘. 검이 담고 있던 라피옌의 위대한 신력.
몇 시간 전. 라피옌의 검이 터뜨리는 빛을 본 에이몬은 생각했다. 혹시 저 검의 신력이라면, 그리고 제 신력이라면 그녀를 되살릴 수 있지 않을까.
전생의 라피옌이 마지막 신력을 쥐어짜며 자신을 살렸던 것처럼.
그 미약한 희망을 안고 에이몬은 달렸다. 블론디나를 끌어안고 정신없이 이곳으로 왔다.
발자국마다 핏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무너질 것 같은 몸을 이끌어 오르고 또 올랐다.
그리하여 결국 도착한 샘.
에이몬은 블론디나를 샘 안에 조심스레 넣은 후 라피옌의 검 역시 집어넣었다. 그것이 마지막 희망이었다.
「넌 늘 나 때문에 죽는구나. 날 만나지 않았다면 이번에는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나직한 그의 목소리는 너무도 애처롭게만 들렸다.
블론디나는 눈을 떠 아니라고 대답해 주고 싶었으나 그리하지 못했다. 온몸의 힘줄을 끊어 낸 것처럼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힘들었다.
「신으로, 황녀로 살며 네 삶을 누릴 수 있었는데. 내가 항상 망쳤어. 내가 널 욕심내지만 않았더라면.」
에이몬은 나직이 미소 지으며 그녀의 뺨에 제 뺨을 댔다.
검에 깃든 신력과 샘물의 힘으로 그녀의 생명력은 어느 정도 끌어냈으나 거기까지였다.
「사랑해, 브리디.」
눈물 맺힌 그녀의 눈꼬리에 입을 맞추며, 그는 제 힘을 모조리 그녀에게 밀어넣었다. 풀벌레마저 숨죽인 적막 속으로 파문이 인다. 공기가 떨려 풀이 납작하게 짓눌렸다.
아주 오래전. 블론디나가 브리디가 아닌 라피옌이었을 때, 그녀는 제게 남은 힘을 쥐어짜 자신에게 건네주었다.
그녀의 영혼을 찾지 못해 홀로 얼마나 후회했던가. 처절한 그리움으로 그 얼마나 힘겨워했던가.
바보같이 그녀의 신력을 삼켜버리고 영영 놓쳐 버렸다. 제 어리석음으로 그녀를 죽음으로 밀어넣은 것이다.
“다시 만날 수 있어. 그러니까, 울지 마. 착하지?”
마지막으로 들었던 라피옌의 목소리가 오래된 활자처럼 떠올랐다. 희미하게 피어올라 고통스러운 재만 남긴 채 날아갔다.
다시 만날 수 있다고 했던 그녀의 말처럼 둘은 다시 만났다. 긴 시간을 돌아 짧은 시간, 행복으로 함께했다.
에이몬은 그것으로 만족했다. 절 안아 주던 온기. 품에 안기던 따스함. 블론디나에게 사랑받았던 그 시간이라면 충분했다.
늘 주제에 넘는 욕심을 냈기에 그녀를 잃었고 다시 또 잃으려 한다. 제 욕심으로부터 빚어진 어리석은 반복은 이쯤에서 끊어 낼 시간이었다.
라피옌이 죽기 직전 주었던 신력. 다시 태어나고 태어나며 품었던 태초의 힘을,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할 때다.
블론디나의 뺨이 장밋빛으로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에이몬은 그녀의 뺨을 쓰다듬으며 애원하듯 속삭였다.
「너만 행복할 수 있다면 날 잊어도 괜찮아.」
잘게 떨리는 마지막 말은 너무도 희미해서, 연기처럼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제 안에 맴도는 신수의 힘, 그녀가 주었던 권능을 다시 돌려주며 그는 블론디나에게 입을 맞췄다. 입술에 맞닿는 그녀의 온기를 잊고 싶지 않다는 듯 아주 오랫동안.
아스라한 별빛마저 막막하게 잠긴 밤. 에이몬은 홀로 눈을 감았다.
블론디나의 입술 틈으로 미약한 숨결이 새어 나왔다.
뿌옇게 죽은 잿빛 하늘이 보인다.
블론디나는 하늘을 뒤덮은 구름을 올려다보며 깜빡깜빡 눈꺼풀을 움직였다. 낯선 힘으로 충만한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제어되지 않는 감각이 몸을 들쑤신다.
“읏…….”
그녀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샘 밖으로 기어 나왔다. 자신이 어쩌다가 낯선 샘물 속에 있었는지조차 모르겠다. 숲 안에 우중충하게 깔린 나무 그림자마저 비현실적이었다.
어디서 에이몬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깜빡. 눈을 감았다가 뜰 때마다 익숙한 힘이 몸에 휘감겼다. 제 것이지만 제 것이 아닌. 다스릴 수 없는 힘이 세포를 폭력적으로 움켜쥐었다.
“읏.”
고통으로 심장 부근을 움켜쥐고 블론디나는 몸을 웅크렸다.
잠들어 있던 기억이 잔물결을 타고 찬찬히 밀려들었다.
아주 머나먼 과거. 숲에서 처음 만났던 흑표범. 죽음. 환생. 그를 만나지 못해 끊긴 시간. 그러다 다시 만나 행복했던 지난 시간.
“아…….”
간신히 몸을 일으켜 천천히 움직였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비틀거리며 나무에 기대 호흡을 다스렸다.
지척 없이 깔리던 어둠이 밀려나고 달빛이 쏟아져 내린다. 잿빛 하늘이 환히 피어오르고, 뿌연 잔상이 선명해졌을 때, 블론디나는 뒤늦게 알아차렸다.
“……에이몬?”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새까만 짐승을.
“에이몬!”
정신없이 달려가 표범의 목덜미를 부둥켜안았다. 죽은 듯이 쓰러져 있었으나 살아 있었다. 목 아래 두근두근 뛰는 생명력이 느껴졌다.
블론디나는 뒤늦게 북받쳐 오르는 설움을 쏟아 냈다.
“에이몬. 에이몬.”
애끊는 슬픔으로 오열이 터져 나왔다. 흐느끼며 그의 이름만 주문을 걸듯 읊조렸다.
분명 살아 있는 제 반려를 눈앞에 두고 있는데 초조함이 치밀었다. 이 불안한 감정이 어디에서 기인한 건지 모르겠다.
블론디나는 비로소 완벽히 깨달았다. 눈앞의 존재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기억. 제 삶이자, 환상이자, 과거이자, 현재인 제 반려였다.
“에이몬…… 에이몬…… 너였어. 너였어…… 내 고양이…….”
오랜 시간을 돌아 겨우 만났는데 알아보지 못했었다. 그녀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자신을 자책하며 눈물만 흘렸다.
달밤 아래 얼마나 울었을까.
뜨겁게 떨어지는 슬픔이 짐승을 적셨을 때.
짐승은 다시 눈을 떴다.
블론디나는 조용히 미동하는 에이몬의 움직임을 느꼈다.
“에이몬?”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매달렸던 몸을 일으켜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다시 만난 제 연인을 절실하게 응시했다.
하지만.
크르르릉…….
그녀가 마주한 건 절 향해 굶주린 맹수처럼 이를 드러내는 흑표범이었다. 지성을 잃은 짐승이 낯선 인간을 향해 차가운 적개심을 내뿜고 있었다.
“아…….”
블론디나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신력을 잃고, 기억을 잃은 에이몬의 눈에서 새파란 안광이 튀었다. 당장 제게 달려들어 목덜미를 물어도 이상하지 않을 살기다.
“에이몬…….”
그의 이름을 가쁘게 부르며 가까스로 손을 들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짐승을 끌어안고 단단히 경직된 근육에 제 뺨을 비볐다.
날카로운 송곳니와 칼날 같은 발톱조차 두렵지 않다는 듯 무너지는 제 몸을 그에게 모조리 기댔다.
제 연인이 절 잊었다는 공포로 온 세상이 휘청였다. 믿을 수가 없었다. 눈물조차 모습을 감췄다.
에이몬은 몸을 훌쩍 물려 그녀를 억지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바닥에 주저앉아 절 멍하니 올려다보는 그녀를 향해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눈앞의 인간을 덮쳐 피를 보지 않는 건, 제 속에 가라앉은 어렴풋한 본능 때문이리라.
그녀를 다치게 해서는 안 돼.
세포 하나하나가 경고하는 짓눌린 본능.
“에이몬, 제발…….”
블론디나는 입술을 떨며 애원했다. 하지만 그녀의 애처로운 목소리에도 에이몬은 미동 하나 없었다. 목을 낮게 울리는 짐승의 안광 속에 새파란 불꽃이 튄다.
한동안 그녀를 응시하던 짐승은 곧 등 돌려 그녀를 떠났다.
“안 돼, 안 돼!”
그제야 정신을 차린 블론디나가 휘청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새까만 짐승은 이미 어둑한 숲 그림자 안으로 사라진 뒤였다.
“에이몬, 제발! 가지 마!”
이제 겨우 만났는데. 겨우 다시 찾았는데. 몇 번의 윤회 끝에 이제야 마주했는데.
블론디나는 에이몬의 핏자국을 따라 정신없이 발을 움직였다. 숲을 빽빽하게 뒤덮은 나무로 숲은 달빛 하나 비치지 않는 암흑이었다. 캄캄한 길을 헤치고 축축하게 젖은 낙엽을 밟았다.
“에이몬! 에이몬!”
힘겹게 움직이는 걸음마다 눈물이 떨어졌다.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그의 핏자국마저 사라졌다.
깊은 밤이 깨어나 새벽이 다가온다. 블론디나의 외침에 잠을 깬 산새가 푸드득 날아올랐다.
‘에이몬이 죽을지도 몰라.’
나뭇가지에 긁혀 핏방울 맺힌 몸으로 블론디나는 계속 달렸다.
에이몬은 상처투성이였다. 신력을 잃은 짐승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상처다. 그 난도질 된 몸으로 죽음을 향해 훌쩍 떠나 버린 것이다.
맨발로 숲을 헤매는 통에, 그녀의 발바닥은 피투성이였다. 온전히 자리잡지 못한 신력이 통제를 벗어나 몸을 거칠게 훑었다.
“안 돼. 안 돼, 에이몬…….”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다가 결국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그대로 누워 끝없이 울음을 삼켰다.
다시 잃었어. 내 고양이를 다시 잃었어.
울음조차 나오지 않는다. 소리조차 죽은 절망이 가득 고였다.
블론디나는 한참 후에야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흐느꼈다. 비집어 나온 눈물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