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98화
“죽이려면 나부터 죽여라.”
블론디나가 날카로운 도자기 조각으로 제 가슴팍을 스스로 겨누었다.
“한 사람이라도 죽는다면 나 역시 죽겠어.”
블론디나는 제 목숨에 여인들의 목숨을 걸었다.
그녀는 확신했다. 마부들이 절 죽이지 않고 살렸듯, 이 자 역시 절 살리리라고. 절 제외하고 모두 죽이라 했으니 분명 그 예상이 맞을 것이다.
아마 제 판단이 틀렸다면, 이대로 죽음을 맞이하겠지.
그녀의 판단은 옳았다. 조셉이 신수를 멈춰 세웠다.
“그 무슨 멍청한 짓이냐!”
“멍청한 짓?”
블론디나는 픽 웃으며 그의 말을 되새겼다가 이내 표정을 지웠다.
“다른 이들을 해치지 않는다면 내 순순히 따라가 주지. 하지만 누구 하나라도 다친다면 이 자리에서 목숨을 끊겠어.”
“…….”
“내 못할 것 같은가.”
블론디나는 떨리는 손에 힘을 주었다. 가슴팍을 찌르자 상처 아래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렀다.
어린 시절, 초라하게 살며 험한 꼴은 다 보았다. 여관 주인에게 질릴 만큼 맞아도 보았다. 제 몸을 자해하며 상대의 돈을 뜯던 자해공갈단 역시 무수히 보아 왔다.
건너 배운 못된 짓이다. 제 백성의 목숨이 달려 있는데 이런 짓 하나 못할쏘냐.
도자기 조각을 움켜쥔 블론디나의 손바닥에 피가 고였다.
조셉은 당황한 얼굴로 블론디나를 만류했다.
“잠깐! 멈춰!”
세상에 이런 미친 여자는 처음 보았다. 뒷골목을 구르는 시정잡배도 두려움은 안다. 심지어 눈앞의 여인은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귀한 황녀 아닌가.
표정을 보아하니 그녀의 말이 말뿐인 허세는 아닌 것 같았다. 황녀는 제 검이 알려 준 ‘쓸모 있는 패’였다. 여기서 죽는다면 모든 희망이 부서질 게 뻔했다.
“좋아! 모두 살려 줄 테니 당장 그것을 내려!”
“…….”
블론디나는 그제야 가슴팍을 겨누었던 조각을 찬찬히 내렸다. 하지만 여전히 강하게 붙들었다. 여차하면 다시 제 목숨을 볼모로 반항하겠다는 뜻이었다.
조셉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팔뚝을 낚아챘다.
“어리석은 짓 그만둬! 모두 살려 줄 테니!”
블론디나는 경계를 지우지 않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절 만류하는 루시의 손을 놓았다.
“황녀님! 안 돼요! 황녀님을 죽일 거예요! 가시면 안 돼요!”
루시의 눈물 섞인 애원에 블론디나는 옅게 웃었다.
하지만 루시. 이렇게 하지 않으면 네가 죽어. 그리고 난 에이몬이 어떻게든 구해 줄 거야. 그렇게 믿어.
블론디나는 엉엉 울며 달라붙는 루시를 냉정하게 내쳤다. 그리고 공포로 굳어 있는 여인들을 지나쳐 밖을 향해 나갔다.
조셉을 따라 피비린내 나는 길을 걸었다. 공포로 몸이 빳빳이 굳었으나 의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이따위 사내에게 초라한 모습을 보이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한편 밖으로 나온 조셉은 이내 기분이 좋아졌다.
‘귀여운 것 같으니.’
제 허리춤에 매달려 잘게 진동하는 검을 쓰다듬는다. 자신에게 거대한 힘을 부어 준 검은, 결국 황녀까지 제 손에 쥐여 주었다.
착각에 빠진 그는 콧노래마저 부르며 폐허가 된 황제의 뜰 앞에 도착했다. 전투는 여전히 치열해 보였다.
에이몬은 홀로 외로운 싸움을 이어 가고 있었다. 자칫 방심하면 당장 목덜미를 물어뜯길 것이다.
짐승 사이에 매서운 공격이 오갔다. 잘 벼려진 검처럼 날카로운 발톱을 들이밀며 신수는 에이몬을 향해 달려들었다.
조셉과 함께 걷던 블론디나는 발이 꼬여 휘청거렸다.
‘어째서? 어째서 에이몬 홀로?’
안전한 곳에 가 있으라며 절 밀어넣더니, 본인은 왜 혼자 피를 흘리고 있는가.
속 모를 원망까지 차올랐다.
‘차라리 도망가지 그랬어! 외면하고 홀로 살아남지 그랬어!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걱정에 기인한 이기적인 원망이 비죽 차올랐다.
조셉은 휘청이는 블론디나의 팔뚝을 험악하게 붙들었다. 쓰러지기 직전의 그녀를 마구 끌고 오토만 곁에 바짝 붙었다.
조셉이 자리를 그림자처럼 떠났듯, 돌아왔을 때 역시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모두 멈춰라!”
조셉이 크게 외쳤다. 한낱 하인의 비루한 고함이었기에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 기사가 블론디나를 발견했을 때, 황궁 내 안전하게 있어야 할 황녀님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힘겹게 서 있는 것을 알아챘을 때, 상황은 달라졌다.
“황녀님!”
“황녀님께서 반역자들에게 붙잡혔다!”
그제야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바닥을 거칠게 구르며 전투 중이던 신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블론디나라는 이름이 들리자마자 에이몬은 피에 젖은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블론디나가 진실로 그들 곁에 있음을 확인하자마자 분노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멈춰! 네가 오면 이 황녀도 죽는다!”
조셉이 블론디나의 목덜미에 단검을 갖다 대며 외쳤다.
당장이라도 땅을 박찰 듯 성나게 부풀었던 에이몬의 근육이 일순 굳었다. 기사들은 당황하여 검을 내렸고, 신수들은 조셉의 명에 발톱을 숨겼다.
조셉이 바라한의 귓가에 속삭였다.
“백작님을 위해 가져온 희생양입니다. 곧 백작님의 전리품이 될 황녀이지요.”
백작에게 건네는 충성의 말이었다.
배 속에 있는 마정석 때문만이 아니다. 오토만 백작을 따라야 할 이유는 많았다.
자신이 아무리 신수를 조종하는 바라한의 후예라고는 하나 황제가 될 수는 없었다.
분에 넘치는 욕심은 헛된 꿈이라는 걸 산적일 때부터 몸소 배웠다. 귀족의 옷을 훔쳐 입더라도 알맹이는 그들이 될 수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사실 황제 자리에 관심조차 없었다. 명예보다는 부와 권력. 의무보다는 권리만 누리는 것이 그의 목표였기 때문이다.
오늘, 오토만 백작을 황제로 만든다. 그리고 그의 곁에서 평생 권세를 누린다. 그것이 조셉이 꿈꾸는 장밋빛 미래였다.
조셉의 충성을 확인한 오토만이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폐허가 된 전쟁터는 숨소리만 가득한 적막이었다.
그는 정지 상태에 들어선 전장을 향해 여유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손가락으로 제 옆에 선 조셉을 가리키며.
“나를 따르는 이 자는, 신수를 다스리는 힘을 가졌다. 위대한 신, 바라한의 후예라는 뜻이다!”
그 말의 방증으로, 신수가 모두 복종의 자세를 취하며 엎드렸다.
기사들은 숨을 들이켰다. 저 비루한 자가 바라한의 후예라니.
“너희는 선택해야 한다! 현 황제를 따라 개죽음을 맞이할 것인지! 새로운 황제인 나를 맞이하여 평화로운 제국을 맞이할 것인지!”
오토만 백작 역시 황족의 방계로, 황제가 되기에 충분한 신분이었다. 더불어 신의 후예까지 등에 업으니 명분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제국군은 제 충정을 바칠 상대를 쉬이 바꾸지 않았다.
“헛소리하지 마라! 황궁을 침략한 반역자에게 충성이란 없다!”
검을 고쳐 잡은 기사단장은 이내 오토만 백작을 향해 달려들려 했다.
오토만은 입술을 짓쳐 물었다.
제국군은 반드시 제 편으로 만들어야만 한다. 흑표범을 제압한다고 하여 상황이 끝나는 게 아니었다. 신수가 제국군에게 패배한다면 낭패 아닌가. 신수와 함께 죽음의 벼랑으로 몰리게 되는 일이다.
신수를 제어하여 흑표범을 죽인 후, 제국군을 제 편으로 이끄는 것. 그것만이 황좌에 앉을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였다.
“나 역시 황족의 핏줄을 쥐고 태어났다!”
오토만의 열띤 목소리에 제국군이 다시 주저했다.
오토만은 얼굴을 기울여 조셉에게 속삭였다. 신수를 조종하여 어서 흑표범을 공격하라.
곧 눈을 번뜩이는 신수들이 다시 에이몬을 향해 달려들었다. 에이몬은 제대로 된 반격을 하지 못했다. 블론디나가 여전히 오토만 백작의 손아귀에 있었기 때문이다.
오토만은 빙긋 웃었다. 모든 상황이 제 손 위에서 놀고 있는 것만 같아 흡족했다.
“너희는 황실을 배신하는 것이 아니다. 죄책감 따위 느끼지 마라! 황실의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는 것뿐이다!”
그는 제국군의 마음을 들쑤시며 호소하듯 이어 외쳤다.
“현 황제는 그릇된 판단으로 위험을 몰고 왔다. 짐승과의 평화를 지껄여 인간의 피를 몰고 왔지! 그 죄, 죽음으로 갚아야 할 것이다!”
몇몇 제국군의 눈빛은 흔들렸고 몇몇은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헛된 평화를 노래하는 대신, 인간의 힘으로 신수를 밟고 제국의 위대한 역사를 꽃피울 것이다!”
오토만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승리의 깃발이 저에게 넘어오는 것만 같았다. 다시 차분해지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그는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내게 충성한다면 인간의 희생은 없을 것이다! 저 흑표범을 죽이고 황궁의 평화를 다시 되찾아야 한다!”
오토만은 호소했다.
제게 치켜든 검을 내려 제게 충성하라고. 그리하면 다시 평화를 되찾을 수 있노라고.
몇몇 제국군은 고민했다. 자신들 편에 선 흑표범은, 반려인 블론디나 황녀가 인질로 잡혀 있어 이제 허수아비가 되었다.
그녀의 목숨이 걸린 한 흑표범은 행동하지 못할 것이며 결국 패배하여 죽게 될 것이다. 그리하면 제국군과 신수 사이에 다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건 당연한 사실.
한편, 에이몬은 뜨거운 피를 흘리면서도 냉정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이 죽는다고 하더라도 오토만 백작은 결국 블론디나를 죽일 것이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오토만. 그는 태생적으로 비열하고 야비한 인간이다.
「…….」
에이몬은 어렵게 결론지었다.
곧 숨죽여 웅크리고 있던 새카만 짐승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절 향해 달려드는 신수를 모조리 내치고는 그대로 도약한다.
판단을 내리자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피 웅덩이를 밟고, 제국군을 뛰어넘어 조셉과 오토만 백작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황녀를 살리려면 반항하지 마라!’
오토만은 그리 말해 왔지만, 자신이 반항하든 반항하지 않든 그는 반드시 블론디나를 죽일 것이다. 그렇기에 에이몬은 최악인 동시에 최선인 방법을 택해야만 했다.
저들을 어떻게든 죽여 버리고, 블론디나를 되찾아 온다.
에이몬의 눈동자가 분노로 거세게 타올랐다. 인간과 신수를 훌쩍 뛰어넘어 내달릴 때마다 겁에 질린 두 인간과의 거리가 점점 좁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