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95화
블론디나는 더없이 오만한 표정으로 사내 둘을 지나쳐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삐걱거리는 실내에 들어서자마자 오래된 마차 특유의 퀴퀴한 내음이 밀려들었다.
탁. 곧 마차 문이 닫혔다.
“하아.”
그제야 블론디나는 떨리는 숨을 간신히 내뱉었다.
마차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까와 달리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최대한 덜컹거리지 않도록 신경 써서 느린 속도로 이동한다. 보석과 함께 던진 명령이 통한 듯했다.
‘이 정도 속도라면 에이몬이 따라잡기에 무리가 없겠어.’
블론디나는 보석이 있던 자리를 문지르며 심호흡했다. 초조함으로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무서워, 에이몬. 빨리 와 줘…….”
대범하고 뻔뻔했던 황녀는 온데간데없었다. 자그마한 소녀 하나가 어깨를 떨며 제 짐승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에이몬은 달리고 또 달렸다. 목 아래까지 억센 숨이 차올랐다. 분노인지 공포인지 초조함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감정으로 호흡이 거칠게 긁혔다.
“에이몬 님, 빨리! 빨리! 빨리 가!”
에이몬의 머리 위에 매달린 마제또가 그의 털을 발로 움켜쥐었다. 표범이 달릴 때마다 작은 참새의 몸 역시 들썩들썩 움직였다.
마제또가 나는 것보다 에이몬의 달리는 속도가 더욱 빨랐기에, 작은 참새는 그에게 매달려 열심히 블론디나를 향해 가는 중이었다.
“이제 저 앞 절벽을 돌아서, 꺄악! 에이몬 님! 꺅!”
길을 안내하던 마제또가 깜짝 놀라 날개를 퍼득거렸다. 그가 절벽 아래를 향해 그대로 뛰어내렸기 때문이다.
절벽을 긁는 발톱이 거친 마찰음을 만들어 냈다. 돌덩이가 사정없이 쪼개지고 먼지가 일었을 때, 에이몬은 절벽 아래 도착해 있었다.
그는 돌먼지를 한가득 뒤집어쓴 채 다시 달렸다. 나무를 휘젓고 계곡을 넘어 말 그대로 길을 만들며 질주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그르렁거리는 호흡을 뱉으며 에이몬은 길 위에 섰다.
“마제또랑 블론디나 님이랑 여기서 헤어졌어!”
마제또가 아는 길은 여기까지다.
이제부터 순전히 감으로만 블론디나를 찾아가야만 했다. 길이 하나였기에 에이몬은 우선 다시 달렸다. 하지만 이내 다다른 갈림길 앞에서 다시 멈추고야 말았다.
“어디로 간지 모르겠어요! 어떡하지? 응? 어떡하지? 블론디나 님 어디로 갔지?”
마제또는 불안했는지 부리를 쉼 없이 달싹거렸다. 에이몬은 마제또를 무시하고 바닥만 가만히 응시했다. 흙바닥에는 마차 자국이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
그 중 어느 것이 블론디나를 싣고 떠난 마차의 것인지 알 수 없다.
“빨리! 빨리 블론디나 님 찾아내요! 얼른!”
다급하게 호들갑떠는 마제또는 에이몬을 마구 채근했다.
에이몬은 눈을 감고 침착하게 바람 내음을 좇았다. 블론디나의 내음이 나는 것 같은데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오는 터라 방향이 모호했다.
잠시 후. 에이몬은 다시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찾았어요? 응? 블론디나 님 간 데 찾았어요?”
흑표범은 말없이 발만 움직였다. 땅을 박차고 뛰어오를 때마다 흙먼지가 일었다. 그녀가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심장이 고장난 것처럼 요동치기 시작한 것이 그 방증이다.
‘아직 살아 있어.’
에이몬은 침착하게 제 흥분을 억눌렀다.
흥분은 시야를 막고 정신을 흩트리는 독이다. 비록 불안함이 절 잠식했으나 휘청이는 마음을 다잡아 계속 달렸다.
그의 판단이 맞았을까. 곧 그녀의 내음이 짙게 풍기기 시작했다.
에이몬은 숨을 몰아쉬며 한 그루 나무 앞에 섰다. 고요히 불어오는 바람에, 하얀색 레이스 천이 한들한들 흔들리고 있었다. 블론디나가 묶어 놓은 것이었다.
마차에서 내려 휴식을 취한답시고 나무에 기대었다가 가지에 남긴 흔적. 아마 자신에게 방향을 알려 주기 위한 것이리라.
에이몬은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걱정으로 소비할 시간조차 아까웠다.
길을 따라 쭉 달렸다. 저 멀리, 낡고 초라한 마차의 꽁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것이다. 저 마차에 블론디나가 있는 게 확실했다.
마차와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피가 들끓어 온몸을 들쑤셨다.
“에이몬 님, 저기! 저기! 저기!”
에이몬은 땅을 박차고 바람같이 도약했다.
마차는 부드럽게 이동했다.
블론디나는 쿵쿵 뛰어오는 가슴을 더듬었다. 왜 이렇게 심장이 두근거리지? 납치당하고 있어 그런 건가. 하지만 이건 두려움과는 조금 다른 감정 같았다.
그녀는 홀린 듯 창문을 열어 마차 뒤를 응시했다.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안도와 흥분이 뒤섞인 얼굴로 블론디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에이몬!”
에이몬이 와 줬어! 기다리기는 했지만 막상 그를 마주하자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녀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마부가 고삐를 움켜쥐었다. 히히힝! 말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덜컹덜컹 흔들렸다.
점처럼 보였던 흑표범은 이제 형체가 보일 만큼 거리가 가까워졌다.
블론디나는 차창을 꽉 붙들고 이어 외쳤다.
“안 돼, 에이몬! 죽이지 마!”
에이몬의 눈에 예리한 살기가 배어 있었다. 당장이라도 마부 둘을 산 채로 짓이길 것만 같은 눈빛이었다.
우선은 막아야만 했다. 절 납치하여 위협하기는 했으나, 두 마부를 죽이는 건 마음이 쓰였다.
블론디나는 자신을 겨누었던 단검의 떨림을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감 없이 머뭇대던 그들의 목소리 역시.
“아무리 명령이라지만 따르기 싫단 말이야!”
“하지만 안 하면 다 죽인다잖아! 네 부인이 죽는 꼴 보고 싶어? 난 싫어!”
상부의 명을 어길 수 없는 불쌍한 자들이다.
어릴 적, 그런 이들을 블론디나는 골목에서 많이 보아 왔다. 살기 위하여, 악한 이의 명을 어쩔 수 없이 따르다가 결국은 초라한 죽음을 맞이하는 자들.
어리석으나 마냥 어리석다 할 수 없는 안타까운 이들.
그러는 사이 에이몬은 더욱 가까워졌다.
“으아악!”
“짐승! 짐승이!”
뒤를 힐끗 돌아본 마부가 정신없이 말을 채찍질했다. 어서 달려! 어서! 하지만 말조차 공포에 굳어 버렸다. 멀리서부터 풍기는 신수의 기운에 발이 꽁꽁 묶여 버린 것이다.
마차의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뭐 하는 거야! 어서 달리지 못해?!”
공포에 젖은 눈으로 말을 채근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마차는 결국 삐그덕 멈추고야 말았다.
에이몬은 마부를 덮쳐 내팽개친 후, 곧장 마차 문을 뜯어내 날려 버렸다.
마차 안. 블론디나의 금발이 희미하게 보였다. 분노로 어그러지고 초조함으로 짓뭉개진 정신이 그제야 돌아왔다. 광적으로 달아오른 눈빛이 그제야 풀린다.
“에이몬!”
튀어나온 블론디나가 그대로 짐승의 품에 안겼다.
“에이몬, 에이몬!”
그녀는 정신없이 그의 이름만 부르고 또 불렀다.
에이몬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품 안의 상대를 확인했다.
블론디나였다. 블론디나가 맞았다.
블론디나가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했는데도, 불쾌하게 뛰어 대는 심장 박동은 여전했다. 한순간 절 잠식했던 아찔함과 공포로 온몸이 절어 있는 것 같았다.
에이몬은 고개 숙여 블론디나의 정수리에 제 뺨을 문질렀다.
「많이 놀랐지. 빨리 오지 못해 미안해.」
언제 흥분했냐는 듯 나직한 목소리였다. 마치 잠이 든 아기에게 속삭이듯 더없이 낮고 차분한.
블론디나는 어느새 흐느끼고 있었다.
의연한 척 마부들을 다루고 당당한 척 허리를 편 채 앉아 있었으나 혼란스러웠다. 무서웠다. 언젠가 올 에이몬을 기다리며 자신을 겨우 다잡았을 뿐이었다. 말하자면, 억지로 버텨 낸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에이몬이 와 줬어.’
늘 그랬듯 선물같이 나타나 절 구해 주었다. 따뜻하고도 커다란 품에 안기자 그제야 아비 품에 안긴 아이처럼 엉엉 울어 버렸다.
사실은 두려웠어. 널 다시 볼 수 없을까 봐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
억지로 눌러 놓았던 공포가, 에이몬을 마주하자 비로소 쏟아지기 시작했다.
“에이몬, 에이몬…….”
「응. 나 여기 있어, 브리디.」
에이몬은 나직이 그녀를 달랬다. 자그마한 블론디나의 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목덜미에 뺨을 비비고, 젖은 눈가를 핥으며 흐느끼는 그녀를 달랬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공포와 두려움마저 꽉 안아 모두 품었다.
블론디나는 축 늘어졌다. 다정한 온기와 애정이 긴장이 녹아내린 것이다.
그녀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에이몬. 날 공격한 건 신수였어.”
“……알고 있어.”
에이몬이 돌덩이에 짓눌린 것 같은 목소리로 답했다.
블론디나가 사라진 후, 에이몬은 그녀의 별궁에서 신수의 발톱 자국을 발견했다.
별궁을 공격한 존재는 아마 신수일 것이다. 남겨진 흔적과 냄새 모두 그 의구심이 사실이라 말해 오고 있었다.
이게 무슨 사건인지 실마리조차 잡기 힘들었다. 도대체 왜. 어찌하여 신수가.
생각에 잠긴 에이몬의 눈에서 잔인한 독기가 뚝뚝 떨어졌다.
***
다시, 현재.
황궁은 혹독한 전쟁터였다. 검날과 창끝이 쏟아지고 비명이 난무했다. 짐승의 울부짖음과 인간의 외침이 마구잡이로 얽혔다.
인간은 신수를 틈 없이 포위하여 밀어붙였고, 신수는 제국군의 전열을 헤집으며 공격했다. 다친 자들과 피 흘리는 자들이 널브러졌다.
아름다운 볕이 내리쬐던 황궁은 폭력의 잔해로 뒤덮여 고통과 신음이 넘실거리는 폐허가 됐다.
“신수 둘을 옮겨 저쪽을 공격하게 하라.”
아델라이의 피가 흥건히 묻은 손으로, 오토만은 제국군을 향해 손짓했다. 고개 숙인 조셉이 힘을 집중하자 곧 신수 둘이 날뛰며 제국군을 덮쳤다.
아델라이가 오토만 손에 죽은 후, 조셉은 온전히 오토만의 수족이 됐다. 그의 명에 따라 신수를 제어하고 제국군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토만은 곪고 썩은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 아델라이마저 죽인 이상 두려운 것이 있을 리 없다.
그는 추악한 탐욕을 그대로 드러내어 미소마저 보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모든 권력은 내 차지야.’
황제가 되는 것.
아델라이를 모시며 은밀히 감추었던 욕망이 꿈틀대며 날개를 펴고 있었다.
“지금이다! 볼라를 던져라!”
기사단장의 말에 창병 뒤에 있던 기사들이 나와 착착착 위치를 잡았다.
그들은 궁병의 수호를 받으며 철제공이 매달린 볼라를 휙휙 돌리다가 신수를 향해 던졌다. 신수 대부분은 피했으나 소수에게는 적중했다.
추가 달린 줄이 신수의 발을 묶었다. 쿠당! 묵직한 소리와 함께 신수가 넘어지자 기사단장이 곧장 외쳤다.
“그물을 펼쳐!”
볼라를 던졌던 기사들이 뒤로 숨자, 이번에는 그물을 든 기사들이 뛰어나왔다.
그들은 비호를 받으며 넘어진 신수를 향해 그물을 던졌다. 소 심줄과 고래 심줄을 섞은 줄로 만든 단단한 그물이었다.
볼라에 발이 묶여 넘어진 신수는 그물 안에 갇혀 거세게 몸부림쳤다. 발톱으로 그물을 긁어 잘라 내면 다시 다른 그물이 던져졌고 여러 겹의 끈이 그를 움직일 수 없게 옭아맸다.
평소라면 신수가 이토록 어이없이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신수들이 제 의지가 아닌 조셉의 제어로 휘둘리고 있었기에 평소보다 속도나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조셉! 어서 신수들을 빠져나오게 해!”
“하지만, 백작님! 워낙에 줄이 단단하여……!”
오토만 백작의 채근에, 조셉은 다시 힘을 부었다. 이마 위로 땀방울이 흘렀다. 하지만 단단한 조셉의 제어에도 신수는 끈을 쉽사리 풀어내지 못했다.
쓰러진 몇몇 신수를 향해 움직이며 기사들은 외쳤다.
“죽여라!”
“일반 검이나 창으로는 그들 살가죽에 생채기조차 낼 수 없다! 마력 검을 가져와!”
“심장 부근을 정확히 꿰뚫어야 한다!”
다른 신수들은 겁박당한 신수를 구하지 못했다. 조셉의 제어에 텅 빈 동공으로 전장을 헤집을 뿐이다.
의지 하나 없이 명령에만 움직이는 괴물. 인간을 해치는 것만이 그들의 유일한 목적이 됐다.
마력 기사는 제국군의 비호를 받으며 신수를 향해 조심스레 다가섰다. 제압당한 신수는 그물에 갇힌 채 발톱으로 땅을 긁으며 날뛰고 있었다.
붉은 마력이 창날 위에 넘실거린다. 기사가 창 자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신수를 향해 내리꽂으려던 순간,
……크르렁!
저 멀리, 짐승의 포효가 들려왔다. 땅을 울리며 퍼지는 소리가 인간의 발을 단단히 움켜잡는다.
신수를 공격하려던 기사들이 우뚝 멈추어 섰다. 손끝이 덜덜 떨리고 오싹한 냉기가 등골을 타고 흘렀다. 신체가 보내는 본능적인 공포 반응이었다.
으르렁거리는 쇳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적막이 드리운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새까만 맹수.
제국의 수호자이자 숲의 지배자, 신수의 왕 에이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