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94화
“지도를 봐봐.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가야 맞다니까! 눈이 멀기라도 한 거야?”
“나도 보고 있어! 무서워서 눈이 흐릿한 걸 어떡해! 이 뒤에 기절한 황녀님이 계시다고!”
“쉿! 조용히 해!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이 숲에서 누가 우리 말을 듣겠어? 아무튼, 난 무서워 죽겠어. 아무리 명령이라지만 따르기 싫단 말이야!”
“조용히 해! 나도 무서우니까! 하지만 안 하면 다 죽인다잖아! 네 부인이 죽는 꼴 보고 싶어? 난 싫어!”
곧 길은 험악해졌고, 두 사내의 목소리는 덜컹거리는 바퀴 소음에 묻혔다.
블론디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마부석에 앉아 있는 저 둘은, 누군가의 명을 받고 자신을 납치한 모양인데.
‘날 죽일 생각이었다면, 벌써 죽였겠지. 날 살려서 데려가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황녀인 자신을 살려 둔 채 이렇게 달리고 있지는 않을 터. 위험을 감수하느니 죽여 파묻어 버리는 편이 그들에게는 쉬웠을 게 분명하다.
홀로 무언가를 생각하던 블론디나는 안정을 찾은 참새를 소중하게 쓰다듬었다.
“마제또. 넌 이곳을 벗어나.”
“싫어. 블론디나 님이랑 같이 갈 거야!”
“안 돼. 난 저들을 이길 수 없어서 위험해. 마제또는 가서 에이몬을 불러와.”
“하지만, 하지만, 내가 갔다 오는 사이 마차는 저 멀리 가 있을 거잖아! 블론디나 못 찾으면 어떡해!”
마제또가 짹짹거리며 울먹였다.
블론디나의 말처럼 에이몬을 불러오기는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리하면 필연적으로 마차를 놓치게 되지 않은가. 블론디나를 영영 잃게 될지도 모른다.
“에이몬은 어떻게든 날 찾아올 거야. 이대로 더 멀리멀리 가 버리면, 정말 죽을지도 몰라. 부탁할게, 마제또.”
블론디나는 작은 새를 다정히 설득시켰다.
마부 둘은 당장 절 죽일 생각은 없어 보였으나, 상황이 어찌 될지 아무도 모를 일. 최악의 사태를 가정하며 블론디나는 창문을 열었다.
마제또는 블론디나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결연한 표정으로 창문을 향해 날아갔다.
“알겠어! 나 빨리 올게요!”
마제또의 마지막 말은 파닥거리는 날갯짓과 함께 흩어졌다.
얼마 전, 아델라이는 두 황궁 마부에게 명했다.
‘수도를 벗어나자마자 블론디나를 바로 죽여.’
명을 받은 마부 둘은 벌벌 떨었다. 아무리 제가 충성하는 아델라이 황녀님의 명이라지만, 납치 상대는 황족 아닌가. 이를 어찌해야 하는지.
‘명을 따르지 않으면 너와 네 가족을 모조리 죽여 버릴 거야. 네가 주위에 말을 흘려도 마찬가지야.’
아델라이 황녀님이 제 가족의 목숨을 빌미로 협박하고 있으나 두렵고 또 두려운 일이었다.
고민하며 주저하는 사이 오토만 백작이 남몰래 찾아왔다. 그리고 음험한 목소리로 속삭였었다.
‘아델라이 황녀님은 내가 잘 설득할 테니 블론디나 황녀님을 살려 두어라. 내가 알려 주는 별장으로 데리고 가 잘 감시해.’
그 후 건네진 지도 한 장.
그리하여 마부들은 정신없이 달리는 중이었다. 오토만이 일러준 별장을 향하여. 황녀님을 납치하기는 했으나 죽이지는 않았으니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덜었다.
아델라이는 제 악의로 블론디나를 죽이고자 했지만, 오토만 백작은 남몰래 막았다. 그가 생각하기에 블론디나는 죽여서는 안 될 좋은 패였기 때문이다.
블론디나 황녀는 흑표범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유일한 약점이다. 그렇기에 블론디나를 살려 두면 분명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으리라 그는 확신했다.
덜컹. 마차가 다시 크게 흔들렸다.
마차는 어느새 갈림길에 다다랐다. 그쯤 되자 블론디나는 마부가 절 죽이지 않으리라는 제 판단에 목숨을 걸어 보기로 했다.
그녀는 창문을 거칠게 열어젖힌 후, 착 깔린 목소리로 외쳤다.
“당장 마차를 멈춰라.”
사내 둘은 깜짝 놀라 흠칫 뒤를 살폈다. 별장에 도착하기 전까지 죽은 듯 기절해 있어야 할 황녀의 목소리가 들린 탓이다. 하지만 그녀의 명대로 마차를 멈춰 세우지는 않았다.
그러자 블론디나는 아예 문고리를 움켜쥐고 창문 밖으로 몸을 불쑥 내밀었다.
“멈추지 않으면 이대로 뛰어내리겠어. 내가 이대로 떨어져 죽어도 상관없는가!”
화들짝 놀란 사내가 말고삐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먼저 정신을 차린 갈색 머리 사내가 그를 저지했다. 고개 돌려 블론디나를 살피며 속닥거린다.
“멈추지 마! 도망갈 수도 있잖아! 설마 진짜 뛰어내리겠어?”
“하지만, 하지만! 다치시기라도 하면!”
“그냥 말로 겁주는 거야. 귀하게 크신 분이 어떻게, 아니, 아니! 잠깐!”
멈추지 말라고 설득하던 사내는 화들짝 놀라 도리어 저가 말고삐를 잡아당기며 말을 세웠다. 블론디나가 창문 밖으로 불쑥 상체를 내밀었기 때문이다.
낭창한 몸이 당장이라도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그녀가 그대로 낙하한다면 목뼈가 부러지거나 어디 다쳐도 크게 다칠 게 뻔했다.
“뛰어내리지 마세요!”
“멈췄어요! 멈췄습니다!”
두 사내의 다급한 목소리와 히히힝거리는 말 울음소리가 뒤섞였다. 마차는 곧 정지했다.
블론디나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아 다행이야.’
자칫하면 정말 마차에서 떨어져 죽을 뻔했다.
말이 온전히 멈추어 서자, 사내 둘은 황급히 마부석에서 내려왔다.
“뭐 하는 짓입니까!”
그리고 황녀를 납치하는 주제에, 그녀의 위험한 행동을 나무랐다.
블론디나가 창문 밖으로 내밀었던 상체를 수그리며 픽 웃었다.
“그대들은 날 죽일 생각이 없는 게로군.”
곧 마차 의자에 편히 기대어 앉은 그녀가 마부들을 향해 까딱, 오만하게 손짓을 보냈다. 문을 열어 저를 마주하라는 것이었다.
남자 둘은 얼결에 마차 문을 열어 그녀를 마주하고는 마차 앞에 조아리듯 섰다.
분명 납치된 건 그녀이고 위험한 것 역시 그녀인데, 의도적으로 고압적인 행동을 취하는 그녀의 태도에 왜인지 기가 죽었다.
블론디나는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돈이 필요했는가.”
“…….”
“황족을 납치하다니, 간도 크지. 그래, 얼마를 받기로 했지? 내가 그대들이 받기로 한 금액에서 무조건 다섯 배를 주도록 하지.”
물론 이 납치가 돈 때문은 아니라는 걸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단순한 이유로 이런 위험한 일을 벌일 리가 없다. 자신은 일개 귀족도 아닌 황족 아닌가. 발각될 시에는 그들의 죽음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더군다나 그들의 바짝 움츠러든 어깨가 두려움을 말해 오고 있었다. 스스로 확신 없이 벌이는 일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돈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게다가 갈색 신수는 아까 왜 내 별궁을 공격한 거지?’
알 수 없는 것투성이었다. 하지만 블론디나는 계속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 그들을 압박하여 에이몬이 올 때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버는 것.
쓸데없는 말을 해서라도 상황을 끌어야만 했다. 아까 마제또와 헤어졌던 곳에서 가능하면 가까워야 한다.
“누구의 사주이지? 네놈들 독단적인 행동은 아닐 텐데.”
찔끔한 사내 둘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블론디나는 그제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우아하게 마차 밖으로 한 걸음 발을 내디디자, 당황한 사내 둘이 다가왔다
“나, 나오지 마십시오!”
하지만 블론디나는 들은 척도 않고 한쪽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하라는 것이었다.
당황한 남자 둘이 황족을 향한 배려를 보일 리 만무. 그들이 얼어 있건 말건 블론디나는 아예 마차 밖으로 나와 버렸다.
사내 둘은 그녀에게 완벽하게 휘둘리고 있었다. 황족은 모두 이렇게 당당한 것일까. 마치 저들을 찍어 누르는 듯한 그녀의 우아함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결국, 갈색 머리 사내가 단검을 치켜들고야 말았다.
“움직이지 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단검 끄트머리가 달달 떨렸다. 날카로운 단검 끝이 블론디나의 목 아래 닿았다. 감히 황족을 향해 들이민 시퍼런 칼날이었다.
블론디나는 표정에 균열 하나 없이 턱을 도도하게 들었다.
“찌르고 싶어? 좋아. 찔러.”
“…….”
“용기 있으면 하래도?”
갈색 머리 사내는 결국 단검을 내리고야 말았다.
그제야 블론디나 역시 떨리는 숨을 삼켰다.
‘다행이야. 역시 날 죽일 수는 없는 모양이지. 그럼 시간을 어떻게 더 허비해야 하나.’
그녀는 초조함을 목 뒤로 몰래 삼켰다. 대범한 척 목을 들이밀었으나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제 목숨이 눈앞에 보이는 두 사내 손에 달려 있는데 의연할 수가 있을까.
‘이제 뭘 하지.’
그들을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시간을 죽여야 한다.
블론디나는 주위를 느릿하게 둘러보다가 사내 둘을 향해 조곤조곤 말을 건넸다.
“속이 좋지 않아. 쉬었다 가야겠어.”
“…….”
사내 둘은 서로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블론디나가 눈동자만 올려 그들을 쏘아봤다.
“이게 다 네놈들이 억지로 먹인 약 때문 아닌가. 따라오라고 했다면 순순히 따라갔을 텐데. 내게 싸구려 약을 먹인 게 분명해.”
“아, 아닙니다!”
“바람 좀 쐬다가 괜찮아지면 마차에 탈게. 고분고분 따라가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그녀의 목소리는 잔잔한 호수처럼 나직했다. 평화로움이 깃든 그 음색은 부탁같이 들렸지만, 명령에 가까운 어조였다.
사내들은 눈짓을 교환하다가 결국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는 가느다란 몸을 가진 아름다운 황녀다. 저 몸으로 무얼 하려 해 봤자 위험할 건 없어 보였다.
“아주 잠시만입니다, 황녀님.”
“그래.”
블론디나는 그들을 지나쳐 나무 곁으로 다가갔다. 마부들은 긴장한 채 단검을 쥐고 그녀를 가까이 따라붙었다.
‘이대로 도망칠까.’
블론디나는 잠시 고민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약을 먹어 아직 머리가 멍한 데다가 몸 상태 또한 좋지 않았다.
이 상태로 도망가 보았자 그들을 따돌리기는커녕 감정만 자극할 뿐이리라.
그녀는 나무를 짚은 후 호흡을 느릿하게 갈무리했다.
‘마제또를 보낸 후 갈림길이 나왔었지…….’
소매 레이스를 찢어 나뭇가지에 단단히 묶었다. 짐승만이 맡을 수 있는 인간의 향이 바람결에 찬찬히 흩어졌다.
“황녀님?!”
“무얼 하시는 겁니까! 허튼짓을 하시면 저희도 더 기다려 드릴 수 없습니다!”
뒤에서 그녀의 모습만 살피던 사내들이 버럭 외쳤다. 다행히 그녀가 한 행동의 의미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블론디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뒤돌아 웃으며 자신이 예쁘게 묶은 리본을 톡 건드렸다.
“어때? 내 별궁에서 보던 화병 리본 장식과 비슷하지? 아, 너희는 보지 못했던가?”
두려움이라고는 조금도 모르는 철부지처럼 가벼운 태도였다.
사내들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아무래도 연극 같은 시간을 질질 끄는 건 이제 무리 같았다.
블론디나는 가슴팍에 있는 보석 장식 두 개를 툭툭 떼어 내어 그들을 향해 가볍게 던졌다. 사내들은 엉겁결에 받은 보석을 들고 눈을 끔뻑였다.
“마차가 싸구려인지 정신없이 덜컹거려서 불편해. 황족을 모실 마차라면 더 신경을 썼어야지.”
블론디나는 턱을 도도하게 치켜들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부디 천천히, 살살, 교양 있게 몰아 주었으면 좋겠어. 그대들이 지금 모시는 자가 제국의 황족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돼.”
황족임을 잊어서는 안 돼. 그 말은, 그들에게 제 신분을 부각시켜 경각심을 주기 위한 경고였다.
난 네놈들이 쉽게 죽일 만한 상대가 아니야. 위대한 제국의 황족이야.
‘황족’
그 단어가 갖는 무게를, 네놈들은 절대 간과해서는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