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
#92화
“예, 백작님.”
대답하는 조셉의 낯에 미약한 환희가 보였다.
평민으로 태어나 황궁을 짓밟을 기회가 어디 흔하겠는가. 숫제 심장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이 위대했던 황궁이 제 손아귀 아래 무너지는 것이다.
황궁 내, 그림자처럼 숨어 있던 신수가 여기저기서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아델라이가 황제에게 불려가자 위험을 감지한 오토만 백작이 미리 준비해 둔 비밀 무기였다.
수십의 신수가 마구잡이로 달려들었다. 짐승이 인간을 덮쳐 공격하기 시작했다.
“으악!”
“악! 살려-!”
“모두 방패를 들어!”
여기저기 울부짖는 소리가 황궁을 울렸다. 거대한 송곳니가 박힐 때마다, 기사단이 입은 철제 갑옷이 우그러졌다. 인간은 납작하게 뭉개지고 바닥에 처박혔다.
황궁이 처절한 고통으로 가득했다.
“으아아악!”
“물러나지 마라! 신수의 심장을 정확히 노려!”
혼란한 틈바구니 안에 서서, 아델라이는 웃었다.
역시 오토만 백작은 제 기대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언제 이런 깜찍한 일을 준비하였는지. 이토록 신실하고 믿음직한 자가 있을 수 있나.
그녀를 붙든 기사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어느새 달려온 신수가 아델라이를 호송하던 두 기사를 덮쳤다. 기사는 볼품없이 바닥을 나뒹군 후 신음 하나 지르지 못하고 죽었다.
어느새 다가온 조셉이 허리 숙여 안부를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황녀님.”
“괜찮아.”
“다행입니다.”
아델라이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황제의 궁이 피로 물들고 있었다. 이제 이 피를 딛고 자신이 황궁의 새로운 주인이 될 것이다.
황제와 라르트를 지키며 에워싼 근위병들은 그 수가 현저히 줄어들고 있었다. 아델라이는 속으로 그들을 비웃었다.
그러게 나를 택했어야지.
조셉은 아델라이를 보필하면서도 여유로워 보였다. 수많은 신수를 어렵지 않게 제어한다. 한 마리 신수를 통제하며 식은땀을 흘리던 자 같지 않았다.
“아주 훌륭해. 네 실력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아델라이의 칭찬에 조셉은 힘의 원천인 검을 매만졌다.
“이제 신수쯤이야 손 위의 장난감입니다.”
“하지만, 조셉. 네 배 속에 있는 것을 잊지 말렴.”
마정석을 거론하며 보내는 경고였다. 넌 단지 하수인일 뿐이야. 네 목숨은 내 손아귀에 있다는 걸 절대 잊지 마.
조셉의 표정이 금세 가라앉았다. 아델라이 황녀는 웃음을 흘리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일이 끝나면 넌 남부럽지 않은 부와 권력을 갖게 될 거야. 기대해도 좋아.”
“감사합니다, 황녀님!”
조셉이 목소리를 높여 힘차게 답했다.
마정석은 우선 잊고 행복한 미래만 꿈꾸었다. 눈앞의 여자가 황제가 된다면 분명 제게도 권력이 부산물처럼 따라올 것이다.
기대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탐욕스러운 그의 눈이 반질반질 빛나고 있었다.
인간들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황궁에 가득 찼을 때였다.
뿌우우우우-.
땅을 울리는 뿔나팔 소리가 거대하게 울렸다. 동시에 조셉과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던 아델라이의 미소가 흠칫 굳었다.
몸을 굳힌 채 소리의 근원을 향해 천천히 몸을 돌린다.
나팔 소리가 멎자, 이번에는 북소리가 퍼지기 시작했다.
아델라이의 표정은 하얗게 질려 당혹으로 가득 찼다. 오토만 백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소리의 의미를 모르는 조셉만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그 둘을 번갈아 볼 뿐이다.
“무슨 일입니까, 황녀님? 백작님?”
조셉의 물음에도 그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심상치 않은 소리에 신수마저 움직임을 멈췄다. 공격받던 기사들의 눈동자 위엔 희망의 빛이 올라왔다.
쿵, 쿵, 쿵, 쿵. 땅을 뒤흔들며 무언가 다가왔다. 나팔과 북소리 사이로 전열을 맞춘 발소리가 공포처럼 울렸다.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오토만 백작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뒤이어 미지의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헉…….”
아델라이는 긴장으로 숨을 삼켰다.
‘저들이 어째서? 준비할 시간이 없었을 텐데!’
샛노란 석양빛 아래 금빛 갑주가 번쩍 빛난다. 황궁을 새까맣게 뒤덮은 인파는 마치 드넓은 숲처럼 무수히 펼쳐졌다.
제국 기사단의 등장이었다.
날벼락같이 바뀐 상황에 오토만 백작은 다급히 명했다.
“황제와 황자의 공격을 멈추고 제국군부터 분열시켜라! 신수들을 둘로 나누어 반은 맨 앞의 방패 부대를 격멸, 반은 뒤로 보내어 화살 부대를 몰살시켜야 한다!”
“예? ……예, 예!”
조셉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신수들을 몰았다. 제국군을 향해 달려가는 신수의 단단한 몸이, 그들 옆을 바람같이 스쳤다.
신수의 움직임을 따라 인간의 신음이 흩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개인은 쉽사리 무너졌지만, 신수의 일방적인 학살이었던 전과는 한결 달랐다.
제국군의 포위망을 뚫고 헤집는 짐승을 향해 기사 여럿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잡아! 한곳으로 몰아!”
“힘으로는 이길 수 없다! 다리를 공격하여 넘어뜨려라!”
표범과 인간이 마구 뒤엉켰다.
인간의 비명, 무기와 발톱이 맞붙는 소리, 금속 갑주 일그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신수는 여전히 잔인하게 움직였지만, 인간은 전열을 갖춰 수로 밀어붙였다.
밀고 밀리고 덮치고 몰아내는 전투가 이어졌다.
아델라이는 불안한 표정으로 손톱을 뜯었다.
제국군이 어떻게 등장한 것인지.
‘그래도 결국엔 신수가 이길 거야. 인간은 나약하니까.’
기사단을 정비하여 출정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이토록 대규모로 자신들을 포위하려면 사전에 기사단을 준비시켜 놓았어야 한다는 뜻이다.
아델라이는 당황했다. 분명 황제 폐하와 라르트는 신수의 급습을 미리 알지 못했을 텐데?
방금 전, 황궁을 뒤흔들었던 뿔나팔 소리는 전쟁 전 제국이 적에게 들려주는 경고였다.
대륙에서 가장 강인한 군대의 출격. 제국군이 전장을 잔인하게 뒤흔들겠다는 핏빛 경고.
그리하여 아델라이와 오토만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이었다. 제국군의 등장은 그들 예상에 없던 일이다.
물론, 제국군을 미리 준비한 것은 라르트의 날카로운 판단력 덕이었다.
“그러고 보니 장로님이 안 보여, 수장님.”
“이전에 오말리 아저씨도 안 보인다고 하지 않았나.”
일전에 ‘신수 몇이 행적을 감췄다’라는 에이몬과 샨티의 대화를 유심히 들은 후. 라르트는 늘 황궁 상황을 주시해 왔다. 묘한 꺼림칙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결국 신수에 의해 황궁 사용인이 하나둘 사라진다는 소문이 돌자, 아비인 황제를 찾아갔었다.
“폐하. 아무래도 상황이 수상하게 흘러갑니다.”
근거 없는 불안함이 치밀었다. 불온한 무언가가 황궁 깊숙한 곳에서 어둡게 도사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황제의 허락 하에 남몰래 제국군을 준비시켰다. 섣부른 판단일 수 있으나 필요 없는 수고를 하는 것이, 일이 벌어진 후에 후회하는 것보다는 낫다.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라르트의 예상은 맞았다.
사건은 벌어졌고 신수는 황궁을 덮쳤다. 기어이 일방적인 학살이 시작됐다. 미리 준비해 둔 병력이 아니었다면 황족은 그대로 멸족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유혈이 낭자하는 전장을 헤치며, 기사 단장은 목이 터지라 외쳤다.
“전열을 흐트러뜨리지 마라!”
불화살이 여기저기 날아든다. 아름다웠던 황궁 정원이 무자비하게 짓밟히고 있었다.
하지만 오백 년 전, 신수와 인간 사이에 발발했던 전투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과거의 전투가 신수의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다면, 지금은 꽤 호각을 다투고 있다. 인간은 신수보다 나약했으나 수가 많았고 인간의 기술이 그때보다 발전했기 때문이다.
제국군과 신수의 정면 전투는 결과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짐승과 인간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뒤엉켰다. 커다란 함성과 비명, 포효가 황궁을 뒤덮었다.
콰앙! 기사의 갑주와 신수의 단단한 근육이 맞붙을 때마다 머리가 울리는 충돌음이 퍼졌다. 황궁은 이미 핏빛 전쟁터였다.
“신수를 홀로 상대하지 마라! 흩어지면 그대로 개죽음이다!”
제국군은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고 합심하여 검을 휘둘렀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기 위한 치열한 접전이 계속됐다.
라르트는 검으로 제 얼굴 옆을 스친 발톱을 내리쳤다. 챙! 발톱과 금속이 맞붙었음에도 마치 쇠와 쇠가 긁히는 듯한 소리가 났다.
‘예상대로 아델라이가 바라한의 후예를 찾아낸 거야. 신수들이 조종당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미쳐 날뛰는 신수를 마주하자마자, 라르트는 제 가설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신수의 눈동자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간 신수를 가까이 마주했던 라르트는 알 수 있었다. 분명 저것은 이성이 깃든 눈빛이 아니다. 난폭한 공격에는 두서가 없었다.
황제 폐하께 ‘바라한의 후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필시 아델라이가 그를 찾아내어 신수를 조종하고 있는 게 확실했다.
‘에이몬 님은 어디에.’
끼기긱! 발톱과 맞붙은 검을 비틀어 돌리며 라르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에이몬이라도 있었다면 사태가 이렇게까지 악화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블론디나를 찾기 위해 황궁을 떠나간 그의 부재가 무척이나 절실해졌다.
하지만 에이몬의 부재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는 섣불리 판단하기 힘들었다.
‘에이몬 님 역시 바라한의 후예에게 조종을 당한다면…….’
라르트는 근육이 파열되는 것 같은 고통을 참으며 검을 휘둘렀다.
과연 이 사태가 어찌 마무리될 것인가. 만약 에이몬 님마저 바라한의 후예에게 조종당한다면 그를 죽여야 하는가. 그렇다면 블론디나는.
신수와 인간 충돌의 승부는 아직 팽팽했다. 라르트는 걱정과 불안을 날려 보내고 현재에 집중했다. 지금 자신이 할 일은, 짐승들에게서 황궁을 지키는 것이었다.
한편 아델라이는 불안한 얼굴로 손톱을 쥐어뜯었다. 삐죽삐죽 두서없이 망가진 손톱이 그녀의 심중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왜 제압하지 못하는 거지?!”
조셉을 채근했으나 조셉 역시 별다른 수는 없었다. 조셉 자신은 신수를 조종할 뿐, 그 뒤는 신수의 능력에 달린 것이다.
오토만 백작 역시 초조함을 숨기지 못했다.
“상황을 역전시켜야만 합니다!”
늘 침착했던 그의 표정이 평소와 달리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오토만은 제 속을 들쑤시는 흥분으로 이를 악물었다. 신수는 강하다. 인간에게 쉬이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승리만을 점치기도 어려웠다.
자칫 최악의 상황에 당면하여 황족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면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된다. 그것도 제 일가족까지 모조리.
권력만을 위하여 모든 걸 버리고 달려왔거늘!
신수를 끌어내어 황궁을 덮쳤을 때만 해도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 상황은 무어란 말인가.
‘내가 아델라이, 저 오만한 것 아래 엎드려 충실한 개가 된 이유가 뭔데!’
그건 차후에 쥘 달콤한 권력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꿈이 이제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예측하지 못했던 제국군의 개입으로 인하여.
오토만이 조셉의 어깨를 움켜쥔 채 충혈된 눈으로 명했다.
“신수의 공격을 한군데로 몰아! 황제와 라르트 황자를 집중공격하여 죽여 버려!”
어떻게든 상황을 반전시켜야만 했다.
그의 말을 들은 아델라이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