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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82화 (82/121)

# 82

#82화

침울하게 제 눈치를 살피는 에이몬을 향해 블론디나가 힘없이 손짓했다.

그는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고개를 숙였다. 곧 그녀가 그의 머리를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난 괜찮아. 말 대신 해오는 표현이었다.

변태 고양이라든가, 절제도 모르는 멍청이라든가. 그런 말이 날아올 것을 예상하고 움찔한 에이몬은 예상외로 다정한 손길이 닿아 오자 긴장이 풀린 듯 그녀를 폭 끌어안았다.

“브리디!”

사실 아까부터 꽉 끌어안고픈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던 에이몬이었다. 블론디나를 꽁꽁 가두고 여기저기 입 맞추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 안타까움으로 절절 끓고 있는 터였다.

블론디나는 뺨을 비벼 오는 에이몬의 머리카락을 사락사락 헤집었다. 부드러우면서 조금 서늘한 머리카락. 익숙한 감촉을 느끼며 가만히 웃었다.

“에이몬, 나 배고파. 뭐라도 가져와 봐.”

이틀 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으니까.

그녀의 명에 에이몬은 부리나케 몸을 일으켰다. 그런 후 바람같이 문밖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가 쟁반에 이것저것을 담아 들어왔을 땐, 블론디나가 다시 기절하듯 잠든 뒤였다.

어둠 속에 빨려 들어가듯 잠이 들면서도 그녀는 아득히 느꼈다. 눈꺼풀 위에, 뺨 위에, 입술 위에 닿아 오는 다정한 온기를. 그의 조심스러운 입맞춤을. 땀으로 젖은 제 머리카락을 느릿하게 쓸어 올리는 애정 어린 손길을.

‘네가 너무 좋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리고, 촉촉하게 내리는 비처럼, 제 마음을 한가득 적시던 그의 절실한 고백을.

저 역시 그렇다며 대답해 주고 싶었는데 점점 멀어지는 의식은 틈을 내어주지 않았다. 조심스럽고도 절실한 고백을 꿈결처럼 깔아 다시 수면 아래로 잠겼을 뿐이다.

***

일주일이 지나자 몸이 어느 정도 기력을 되찾았다.

루시가 몸에 좋다는 버섯이니, 약초를 한 아름 가져와 억지로 먹여 댔기 때문이다. 지금도 루시는, 블론디나 옆에 앉아 말린 버섯을 입안에 억지로 욱여넣고 있었다.

“더 드세요. 네?”

“아니야. 괜찮아.”

“안 돼요. 더 드세요! 드실 때까지 들고 있을 거예요!”

“……응.”

황녀를 협박하며 몰아붙이는 시녀의 윽박지름에 블론디나는 착하게 입을 벌렸다. 민망함에 얼굴이 벌게졌다. 누가 보면 중병인 줄 알 법한 시중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인가 싶었다.

‘아. 정말 창피해 미치겠네.’

그게 무슨 큰일이라고 호들갑을 떨며 앓은 건지.

인이 새겨지는 과정에서 가볍게 열이 오를 수 있다고 에이몬이 말하기는 했지만, 인간이라 다른 걸까. 가벼운 열이 아니라 타오르는 성장통에 가깝게 앓고 나니 모두 절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에이몬은 대역 죄인이 된 표정으로 블론디나의 발만 주물렀다. 블론디나는 소파에 눕듯이 앉아 에이몬의 허벅지에 제 발을 올리고 까딱거리는 참이었다.

앞에 잔 하나가 불쑥 내밀어졌다.

“다 드셨어요? 이것도 마셔야 해요, 황녀님.”

“안 먹으면 안 돼, 루시?”

“네, 안 돼요.”

단호한 루시의 말에 블론디나는 한숨을 쉬며 쓴 찻물을 마셨다.

붉은 찻물 색만큼이나 블론디나의 얼굴 역시 붉게 달아올랐다. 이 차의 효과가 무언지 알고 있는 까닭이다. 이건 정력 회복에 좋다는 다움리 열매로 만든 차 아닌가.

며칠을 꼬박 앓고 일어난 뒤, 블론디나는 누군가가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 쏟아지는 볕 속, 화가 난 듯한 여인의 목소리가 쨍쨍하게 울렸었다.

“제가 그냥 참으려고 했는데요, 안 되겠어요! 감히 주제넘은 참견 좀 할게요! 정말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세상에, 어떻게 하면 황녀님께서 며칠 동안 정신도 못 차리시고……!”

“…….”

“상대를 고려하셨어야죠! 보세요! 황녀님께서 얼마나 여리신지! 몸집 차이를 생각하셔야 할 거 아니에요!”

순간 눈을 감고 있음에도 한 사람과 한 동물의 시선이 제게 꽂힌 것 같기도 하다. 그들 시선 속의 자신은 젖은 빨래처럼 늘어져 있겠지.

루시의 윽박지름 뒤로 곧 에이몬의 풀 죽은 목소리가 변명하듯 울렸었다.

“나 많이 자제했어. 정말이야.”

“많이 자제한 결과가 이거예요?!”

“…….”

평소라면 에이몬에게 감히 소리 지를 수 없는 루시다. 평소라면 고개를 빳빳이 들고 루시를 오만하게 깔보았을 에이몬이다.

하지만 블론디나를 앞에 둔 둘은, 마치 딸을 시집보낸 어머니와 어머니께 혼이 난 사위라도 된 양 먹이 사슬 관계가 확실히 뒤바뀌어 있었다.

블론디나가 왜 며칠간 끙끙 앓는 건지, 에이몬이 왜 강아지 같은 눈으로 블론디나 옆에서 끙끙거리며 걱정하는지 루시는 대번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다시는 그러지 말라며. 황녀님은 신수와 달리 무척 약한 분이니, 지금처럼 하면 안 된다며 협박과 회유와 충고가 이어졌다.

둘의 대화, 아니 루시의 윽박지름을 듣는 블론디나는 감은 눈을 더욱 꼭 감았었다.

민망하니까 둘 다 그만해 줄래…… 내게도 부끄러움이란 게 있거든……?

어찌 되었든 그런 경위로 지금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루시는 전전긍긍하며 자꾸 무언가를 먹이고, 에이몬은 더욱 전전긍긍하며 걱정스레 저만 졸졸 쫓아다니는.

‘누가 보면 중병이라도 난 줄 알겠네.’

이 지경이 계속되니 이제는 그들의 걱정을 만류하는 것도 포기했다. 제발 둘 다 아기새 보호를 그만두길.

그나마 다행인 건 루시만이 사실을 알아챘다는 것이었다.

이따금 찾아왔던 라르트도 찬바람을 맞아 열이 나는 거냐며 일상적인 걱정을 건넸고 마제또는 블론디나에게서 에이몬의 향기가 난다며 의아해했을 뿐이다. 그녀의 주위를 부산스럽게 날아다니면서 그 이유를 찾기 위해 노력하면서.

정말이지 다행이었다. 모든 사람이 제 ‘중병’의 이유를 알아챈다면 침대 아래 콱 숨어 버리고 싶었을 테니까.

***

“일은 순탄한가.”

황궁에서 한 시간여 떨어진 들판. 아무도 오지 않을 커다란 바위 앞에 서서 아델라이가 물었다. 오토만 백작은 팔짱을 끼고 서서는 흡족한 듯 웃고 있었다.

“예. 일전에 신수를 하나 더 잡아 와 동시에 제어하는 방법을 연습하고 있습니다.”

“한데 조셉을 홀로 내려보내도 괜찮은 거야? 만약 죽기라도 하면…….”

아델라이의 걱정에 오토만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능력이 많이 향상됐습니다. 두 마리 정도는 눈 감고도 제어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혼자 신수 두 마리나 있는 곳에 내려가 있잖아.”

아주 깊은 구덩이 안. 폐허처럼 펼쳐진 공간 안에 신수 두 마리가 있을 터였다. 조셉은 밧줄을 타고 홀로 내려갔다. 신수를 제어하는 훈련을 하기 위함이었다.

출구는 없었다. 인간도, 신수도 탈출할 수 없었다. 이제 조셉을 구해 줄 것은 한 시간 뒤에 다시 내려갈 밧줄뿐이었다.

오토만 백작은 느긋하게 웃으며 아랫배를 습관적으로 매만졌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황녀님. 조셉은 아주 잘 살아 있습니다.”

아델라이의 눈동자에 일말의 불안함이 올라왔으나, 그녀는 이내 웃었다.

오토만 백작은 허튼소리를 할 위인이 아니다. 저 당당한 태도에 근거가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기에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조셉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 어떤 존재보다 위험한 신수를, 손안의 고양이처럼 휘두를 소중한 노예를.

***

최근 에이몬은 별궁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이전에는 눈치 보는 척이라도 하며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방문했는데, 지금은 거의 눌러살다시피 했다.

이제 곧 두 달 후 약혼식을, 일 년 후 결혼식을 치를 예정이었다. 정해지기만 했을 뿐 사실상 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각인까지 단숨에 새겨 버린 후 하루가 멀다고 찾아왔다.

그간 어찌 참았는지, 일단 고삐가 풀리자마자 일사천리였다.

“이제 정말 내 거야. 내 거라고.”

올 때마다 그녀에게 밴 제 향기를 맡으며 한가득 기뻐하고, 슬렁슬렁 블론디나만 따라다녔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마제또와 놀고 있는 블론디나에게 다가와 참견하다가 괜히 마제또 부리에 한번 쪼였다.

에이몬이 따가운 손등을 문지르며 물었다.

“브리디. 황궁 밖에 시장이라는 곳이 있대.”

“시장? 응. 있지.”

블론디나가 황녀가 되기 전, 질리도록 다녀 본 곳이 시장이었다. 더러운 흙바닥을 달리며 이런저런 심부름을 했었으니까.

에이몬이 제 가슴팍에 등을 대고 있는 블론디나를 향해 고개를 내렸다. 그녀의 콧잔등에 입을 맞추며 웃는다.

“나가서 놀고 오자. 심심한데.”

블론디나는 의외의 제안이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에이몬과 외출을 해본 적이 거의 없지 않은가. 늘 별궁에서만 놀았으니까.

폐하께 허락을 받거나 호위를 신청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아주 잠깐 들었으나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에이몬과 함께 있는데도 위험한 상황이 닥친다면, 그 어떤 호위가 붙어 있더라도 죽은 목숨이라는 뜻일 거다.

그녀는 기왕 말이 나온 김에 바로 움직이겠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에이몬의 손을 잡아끌었다. 둘만의 데이트가 시작될 참이었다.

커다란 수레 위, 붉은 장미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켜켜이 쌓인 꽃 뭉치에서 향기로운 내음이 피어난다.

“한 송이에 2슬란! 열 송이에 15슬란!”

꽃 장수의 커다란 목소리가 수더분하게 울렸다. 수도 중심에 있는 가장 큰 시장에 온 블론디나는 장미 수레 앞에서 멈춰 서서는 품을 뒤졌다.

“한 송이만 주세요.”

“열 송이 사시면 15슬란인데 한 송이만 사실 겁니까?”

“네. 하나만.”

블론디나는 꽃장수에게 장미꽃 밑동을 잘라 달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반쯤 핀 봉오리를 받자마자 에이몬의 망토 브로치 사이에 끼워 넣었다.

“예쁘다.”

에이몬은 고개 내려 장미를 만지작거렸다. 절 예쁘게 치장하고 있는 꽃송이가 조금 생경한데, 블론디나의 선물이라 차마 거부할 수 없는 듯했다.

블론디나는 에이몬의 손을 끌어 내려 잡으며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색해하는 에이몬의 얼굴이 귀여웠다.

처음 만났을 땐, 자신이 싫어하는 건 곧 죽어도 안 하던 고집쟁이더니 언제 이렇게 사랑스러워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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