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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80화 (80/121)

# 80

#80화

“오늘 이렇게 함께 자리할 수 있어 기쁘다는 말씀을 다시 드립니다.”

의외로 형식적인 감사 인사가 나왔다. 에이몬을 향한 말이었다. 에이몬은 무감각한 표정으로 황제의 인사를 듣고만 있었다. 황제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오늘, 진정한 화합을 위한 중대한 발표를 할 수 있어 더욱 기쁩니다.”

중대한 발표? 귀족들의 목이 앞으로 쭉 나왔다. 황제는 시선을 돌린 후 블론디나를 향해 미소를 건넸다.

“차후 있을 약혼을 축하한다, 블론디나. 신수님과 언제나 행복하기를.”

헉, 하고 숨을 삼킨 귀족들의 눈이 뎅글 돌아갔다. 약속이나 한 듯 모두 블론디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 시선을 한 몸으로 받는 블론디나는 태연자약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녀에게서 나직하고도 우아한 답인사가 나왔다.

하지만 막상 블론디나의 마음속은 폭풍우였다.

‘약혼? 내가? ……나?!’

그간 마르고 닳도록 배웠던 테이블 매너만 아니었더라면 분명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을 것이다. 동그랗게 뜬 눈에 경악을 잔뜩 담아.

몸으로 배운 매너가 눈물나도록 고마운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반쪽 황녀를 그나마 고귀하게 포장할 수 있어서.

에이몬이 태연자약하게 잔을 들어 올렸다. 황제 곁에 있던 라르트도 잔을 올렸다. 뒤이어 귀족들 역시 약속이라도 한 듯 잔을 들기 시작했다.

블론디나의 귓가에 에이몬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스몄다.

“브리디. 잔 들어야지.”

“……응?”

멀쩡한 척했으나 실상은 혼란이었나 보다. 모두 제 행동을 기다리고 있는데, 잔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에이몬이 잔을 향해 눈짓했다.

“인간은 기쁜 날에 함께 축배를 든다고, 네가 알려 줬잖아.”

그제야 블론디나는 텅 빈 눈으로, 하지만 몸짓만은 누구보다 기품 있게 잔을 들었다.

곧 황제와 황후를 시작으로 모두 잔을 맞댔다.

“축하드립니다, 황녀님!”

“즐거운 날을 위해, 축배를!”

축하의 말이 블론디나를 향해 쏟아졌다. 블론디나는 여유롭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이를 갈듯 속삭였다.

“에이몬. 너…… 약혼해?”

나랑?

에이몬이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응.”

무슨 당연한 말을 묻고 있어. 타박하듯 건너온 담담한 답이었다.

블론디나는 잔을 든 그 상태로 굳었다. 고상하게 올렸던 미소마저 딱딱하게 경직됐다. 하지만 곧 아래를 바라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무슨…….’

황당과 당황이 한계치를 넘어가니 오히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텅 빈 입속에서 어, 어, 하는 바보 같은 당황만이 맴돌았을 뿐이다.

그녀를 응시하는 에이몬의 고개가 슬쩍 기울어졌다.

“아까 나랑 키스도 했잖아.”

조용한 목소리가 유독 선명히 꽂혔다. 블론디나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했지. 했어. 난 당한 거에 가까웠지만.

“나 갖고 논 거야, 브리디?”

“…….”

갖고 놀다니. 이번에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에이몬은 기어이 그녀의 답을 유도해 내야겠다는 듯, 사정없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네가 말했잖아. 인간은 그런 행위를 아무하고 하는 게 아니라고.”

“…….”

“반려는 하나만 있어야지 여럿을 만나면 난봉꾼, 바람둥이, 호색한이라며.”

“그랬지…….”

블론디나는 부드럽게 압박되는 기분에 물 흐르듯 멍하니 답했다. 마치 순진한 양을 꾀듯, 길 잃은 양을 몰듯, 에이몬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구석으로 몰고 있었다.

“우리가 서로에게 난봉꾼, 바람둥이, 호색한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결혼할 수밖에 없잖아.”

“그렇지…….”

더듬더듬 대답하는데 달싹거리는 입술 위로 쪽, 하고 가벼운 입맞춤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블론디나는 급습이라도 당한 병사처럼 깜짝 놀라 뒤로 훌쩍 물러났다.

아주 가벼운 키스였는데 불덩이가 지나간 것처럼 입술이 화끈거렸다. 아니, 화끈거리는 건 입술뿐만이 아니었다. 눈에 보일 만큼 그녀의 귓가가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블론디나의 뺨을 톡 건들며 에이몬이 눈으로 웃었다.

“그럼 네가 이렇게 놀랄 이유가 없네. 이건 결혼할 사이에 하는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행위이니까.”

블론디나는 착한 학생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아까는 아주 진한 키스까지 했는걸.

그 순간 멀리서 샨티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주위 사람들과 무슨 대화를 하는지 호탕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블론디나는 현실로 확 끌려 들어왔다.

블론디나는 테이블 아래 에이몬의 허리를 꽉 꼬집었다. 물론 단단한 살은 손가락으로 잡히지조차 않았다.

“그래도, 미리 말하지! 너무 놀랐잖아!”

몹시 뒤늦은 타박이었다.

“미리 말했어. 내가 청혼했을 때 좋다고 대답했잖아.”

“뭐? 내가 언제?”

블론디나로서는 팔짝 뛸 지경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에이몬은 제게 청혼을 한 적이 없었는데. 미리 알았더라면 이렇게 바보 같은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롯한 행복과 기쁨을 누리며 에이몬과 함께 이 시간을 누렸겠지.

숫제 억울하기까지 한 눈으로 에이몬을 노려보자 에이몬 역시 짐짓 서운하다는 듯 묘하게 삐죽거렸다.

“정말 기억 안 나?”

“뭘?”

“나만 계속 예뻐해 달라고 했더니 평생 예뻐해 준다며.”

그리고 서운하다는 듯 시선을 내려 힘없이 중얼거렸다.

“네가 나 평생 책임진다고 했잖아. 진심이 아니었어?”

“…….”

아까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하고 오만한 신수님이시더니, 다시 제 풀 죽은 고양이가 됐다. 블론디나는 보이지 않는 귀를 축 늘어뜨린 것 같은 에이몬을 향해 웃음기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어쩌면 좋을까. 이 사랑스러운 고양이를.

그날 밤. 둘만의 무도회를 열었던 별궁에서의 밤. 자신을 끝까지 책임지라며 절실하게 협박한 것이 청혼이었나 보다. 이 경우 없는 표범의 무지막지한 표현이었나 보다.

그것도 모르고 ‘내 고양이가 응석을 부리네.’라며 웃어넘겼지. 청혼을 받아 준 것에 너무나 기뻐 펄쩍 뛰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어쩐지 그날 밤 혼자 잠을 이루지 못해 한참이나 끙끙거리며 들썩거리더니. 그런 줄 알았더라면 함께 기뻐하며 머리라도 밤새 쓰다듬어 주는 건데, 매정하게도 혼자 태평하게 잠만 잘 잤다.

블론디나는 진심으로 서운해하기 시작한 에이몬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의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끼워 넣으며 힘주어 눌렀다. 에이몬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약혼 축하해, 에이몬. 이어질 결혼도.”

“……브리디…….”

그제야 에이몬의 표정이 달라졌다.

이미 기정사실화된 결혼이었으나, 블론디나에게서 확정받자 새삼스러워지는 모양이다.

눈을 느릿하게 감았던 에이몬이 눈꼬리를 예쁘게 말며 슬며시 웃었다. 봄볕 아래 꽃잎을 틔우는 꽃봉오리처럼, 더없이 환하고 깨끗한 미소였다.

처음 마주하는 미소도 아닌데, 블론디나의 심장이 뜬금없이 쿵 떨어졌다. 블론디나는 난데없이 붉어지는 뺨을 가리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에이몬이 손을 움직여 그녀의 손을 꽉 움켜잡아 왔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제 손가락을 끼워 넣고 단단히 맞물었다. 그리고 온기가 얽히자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 긴 숨을 내쉬었다.

어디서인가 불어온 바람에 꽃잎이 흩날린다. 블론디나는 붉어진 뺨을 문질렀다. 따뜻하고 청량한 바람 속, 제 손을 꽉 잡아 오는 손아귀 힘이 더할 바 없이 믿음직스러웠다.

언제나, 어디에서나, 같은 모습으로 절 꼭 잡아 주고 있을 것만 같아서.

***

“음, 기분 좋다.”

블론디나는 창문을 활짝 열고 밤공기를 맞았다.

무도회가 끝난 후, 신수들은 떼 지어 숲으로 돌아갔다. 귀족들은 숲 경계까지 와 배웅했으며 어둑한 숲 안으로 그림자처럼 사라지는 그들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많은 일이 벌어진 날이었다. 신수와 인간, 둘 사이에 평화가 도래했으며, 더불어.

“……나 진짜 결혼하나 봐.”

그녀의 결혼이 확정됐다.

꺄아. 벅찬 비명을 지른 블론디나는 폴짝폴짝 뛰어 침대에 폭 누웠다.

물론,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당황한 건 사실이었지만 그럼에도 기뻤다. 늘 고대하고 꿈꿔 왔던 일이기에 더욱 꿈만 같았다.

“몰라! 어떡해! 너무 좋아!”

침대에 누워 발을 팡팡 구르던 블론디나는 이내 베개에 얼굴을 푹 묻고는 눈을 감았다.

“너무 좋다, 진짜…….”

오늘 온종일 심적으로 신경을 많이 썼는지 금세 잠기운이 몰려왔다. 곧 그녀는 높낮이가 고른 숨을 내쉬며 수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밤이 얼마나 흘렀을까. 선잠이 든 것 같기도, 얕은 꿈에 빠진 것 같기도 했다.

아득하게 가라앉아 가는 의식 끝으로 다정한 온기가 느껴졌다. 느릿느릿하게 닥쳐오는 수마 속에서 누군가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브리디.”

블론디나는 수마를 밀어내고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한 시선 속에 다정한 눈동자가 보였다.

달빛을 한가득 받으며 선연하게 빛나는 예쁜 눈동자. 에이몬이다. 그가 느릿하게 블론디나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리고 있었다.

“음…… 이거 꿈인가.”

블론디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분명 에이몬은 숲으로 돌아갔는데. 왜 눈앞에 있을까.

“꿈이라니. 절대 안 돼. 우리가 오늘 밤 할 게 얼마나 많은데.”

사락사락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유독 부드러웠다. 멍하니 누워 깜빡깜빡 눈만 감았다가 뜨는데,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손이 내려와 눈가를 슬슬 문질렀다.

그 손길이 묘했다.

조용하고 느릿하게 만져 오는데도, 온 감각이 에이몬에게만 쏠려 있어 그런지 감각이 예민해진다. 그의 손끝이 속눈썹을 훑고 뺨을 스칠 때마다 목덜미에 솜털이 돋았다.

“에이몬. 오늘 신수들끼리 모여서 회의한다고 하지 않았어……?”

“하고 왔어.”

블론디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그의 눈길이 상냥하다. 마치 세게 쥐면 쉽게 바스러지는 것을 대하듯 한없이 조심스럽게 쓰다듬다가 이내 얼굴을 내려 뺨에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입맞춤과 함께 귓가로 나직한 숨결이 와 닿았다.

“브리디. 인간은 결혼해야 밤을 보낼 수 있다고 해서 난 늘 기다리기만 했거든.”

반쯤 수마에 잠겨 있던 그녀의 정신이 점차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낮은 목소리가 간지러워 어깨를 움츠리자 입맞춤이 뺨을 타고 느릿하게 내려왔다.

에이몬은 그녀의 턱 끝에 쪽, 키스하며 혼잣말하듯 느릿하게 속삭였다.

“우린 거의 한 것과 마찬가지잖아. 만인 앞에서 선포했으니까. 그렇지?”

허리를 끌어안은 팔이 그녀를 부드럽게 끌어당겨 제게 틈 없이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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