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77화
폐하께서는 신수를 누구보다 경멸하던 분이 아니었나. 표면적 평화를 위해 짐승을 이용하는 것으로만 알았다. 속내는 여전히 무시로 가득한 줄만 알았다. 하지만.
황제는 굳은 아델라이의 어깨를 다정하게 다독였다.
“한데, 아델라이. 아까부터 심기가 좋지 않아 보이는구나. 걱정이라도 있는 것이냐.”
절 위로하는 목소리에 아델라이는 그제야 입술을 삐죽였다. 그래. 짐승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이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날 향한 애정은 여전하시지.
“저는 서운합니다, 폐하.”
“서운하다? 어째서이지?”
“폐하께서 절 예전만큼 사랑해 주시지 않기 때문이에요.”
“짐이?”
황제가 다소 놀란 표정으로 반문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아델라이가 하소연하듯 읊조렸다.
“오늘만 해도 그래요. 폐하의 옆이나 라르트의 옆은 늘 제자리였는데, 오늘은 그 천한 것이…….”
말끝을 흐리는 아델라이가 한숨을 푹 내쉬며 힐끔 황제의 표정을 살폈다.
황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제 딸아이가 하는 말의 의미를 단번에 알아차리고는 홀로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말없이 아델라이를 내려다보던 그가 상체를 내려 조용히 눈을 맞춰 왔다.
“아델라이. 오늘은 신수와 인간의 화합을 위한 날이다.”
“예. 알고 있습니다, 폐하.”
“그 화합의 중심에 서 있는 이가 바로 내 딸, 블론디나이지.”
“…….”
내 딸. 그가 굳이 고른 단어가 생경하여 아델라이의 어깨가 흠칫 굳었다.
“오히려 라르트 황자가 아닌 블론디나 황녀가 짐 옆에 서 있음이 옳다.”
“예?”
아델라이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흔들렸다. 블론디나 그 천한 것이 황제 폐하의 옆자리를 차지함이 옳다니? 그런 일은 황족의 수치였다.
“블론디나는 네 언니이다.”
“하지만!”
“그리고 내 고귀한 첫째 딸이지.”
황제는 그녀의 반문을 냉정하게 잘랐다.
아델라이는 목 뒤로 겨우 숨을 삼켰다. 그가 하는 말이 경고임을 눈치로 알아차린 까닭이다.
황제가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아델라이. 그 사실을 늘 잊어서는 안 된다.”
아델라이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제 아비를 응시하다가 홀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이제는 없는 금빛 목걸이의 자리를 무의식적으로 더듬으며.
침묵뿐인 아델라이 주위로 그녀를 따르는 귀족들이 모였다.
신수와 인간의 화합을 기리는 자리이기는 하지만 모두가 같은 마음인 것은 아니다. 아델라이 황녀를 중심으로 모인 귀족들은 대부분 신수를 향한 경멸을 눈빛에 담았다.
물론 자리가 자리인 이상 대놓고 속내를 드러낼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 하지만 제 감정을 숨긴 채 웃는 낯으로 상대를 깔보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마주한 잔 아래 속닥거림이 오갔다.
“역시 짐승은 짐승이지요.”
진주 가면을 쓴 후작이 말을 이었다.
“저 꼴을 보십시오. 가면으로 가려도 감출 수 없는 천박함을.”
그의 시선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모두 눈을 돌렸다. 퐁뒤를 내려다보는 샨티가 보였다. 샨티는 보글보글 끓는 치즈 접시를 보며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이거 진짜 신기하네? 중얼거리며, 치즈를 따라 고개를 움직인다.
애초에 고양잇과는 단순하고 비논리적인 움직임에 약했다. 녹아내리는 치즈를 보며 신기해하는 샨티는, 귀족 눈에 꽤 경박해 보였다.
샨티는 사람들이 꼬챙이에 고기와 빵 등을 끼워 치즈에 적셔 먹는 것을 관찰했다. 그리고 저 역시 아무 생각 없이 퐁뒤 안으로 손가락을 불쑥 넣었다.
“앗, 뜨!”
뒤이어 커다란 비명이 울렸다. 샨티는 뜨거움에 깜짝 놀라 뒤로 펄쩍 뛰어올랐다. 떨그렁! 난데없는 소동에 퐁뒤 그릇 역시 바닥을 굴렀다.
귀족들이 다시 웃는 얼굴로 험담을 시작했다.
“저 경박한 행동을 보세요. 누가 짐승 아니랄까 봐.”
“숲이나 뒹구는 짐승과는 격이 맞지 않지요. 저들은 근본이 없지요.”
“그럼요! 폐하께서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속닥거림이 악의적으로 뭉쳤다. 악의적인 목소리가 음악 소리에 묻힌 게 퍽 다행이었다.
평소 두려움의 대상인 신수였지만 오늘 직접 마주하자 생각이 달라졌다.
신수들은 생각보다 평화로운 존재 같았다. 몸집은 컸으나 가면 아래 미소는 온화했으며 인간과 어울리며 쉽게 담소를 나눴다.
더불어, 샨티를 비롯한 몇몇 신수의 행동은 소위 말해 경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인간의 물건이 신기한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궁금해했고 샨티처럼 이런저런 실수를 연발하기도 했다.
그러자 몇몇, 그러니까 주로 아델라이의 측근들은 크나큰 착각에 휩싸였다.
‘생각보다 위험한 존재가 아닐 수도 있겠어.’
신수에 대한 공포가 오랜 시간 학습된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며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겁도 없이 험담을 내뱉는 건 그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저들끼리 웃으며 비웃고 있을 때. 샨티는 손에 묻은 치즈를 모조리 핥아 먹은 뒤였다. 깔끔해진 손날을 내려다보며 샨티가 히죽 웃었다.
“수장님. 들려?”
“응.”
마제또를 향해 체리를 건네던 에이몬이 심드렁히 답했다. 샨티는 귓가를 긁적거리며 장난스럽게 중얼거렸다.
“한 입 거리들이 귀엽게 노네.”
청력이 인간에 비할 바 없이 뛰어났기에 그들의 모든 말을 알아들은 터였다. 천박하다는 이야기부터 격이 맞지 않는다는 험담까지, 완벽히.
“저기, 수장님아.”
샨티의 부름에 에이몬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샨티가 그를 부르는 이유는 하나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허락의 요구.
“그래. 물어.”
에이몬의 답이 끝나자마자, 샨티가 있던 자리에서 커다란 표범이 훌쩍 뛰어올랐다.
인간들이 놀랄 새도 없이, 몇 번의 도약으로 단숨에 귀족 무리와 거리를 좁힌 샨티는 중심에 서서 절 욕하던 귀족을 그대로 덮쳐 버렸다.
그림자처럼 은밀하면서도, 놀라울 만큼 날쌘 공격이었다.
“꺅!”
“으악!”
깜짝 놀란 일행이 잔을 떨어뜨리며 다급히 물러섰다.
방금까지 신나게 샨티를 흉보던 후작은 혼비백산한 표정으로 바닥을 구르는 참이었다. 테이블이 넘어갔고 와장창 유리잔이 깨졌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인간들은 딱딱하게 굳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샨티를 응시했다. 갈색 표범이 후작의 가슴팍을 거대한 앞발로 꾹 누르고 있었다.
크르릉…….
샨티의 목에서 위험한 소리가 울렸다. 당장이라도 살을 찢어 낼 듯 발톱이 비죽 나왔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모두 긴장을 꿀꺽 삼켰다.
저 멀리 있던 샨티의 연인, 할라는 살포시 머리를 짚었다. 저거 결국 일 쳤네.
수장의 명은 절대적이었기에 괜히 에이몬의 동태를 살폈다. 다행히 별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 같지 않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에이몬의 허락하에 벌어진 일인가 보다.
한편, 샨티에게 눌린 후작은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다. 무거운 앞발에 짓눌려 이만 다닥다닥 떨었다.
절 내려다보는 짐승의 얼굴에 본능적인 공포가 파도처럼 절 덮친다. 어리석게도 잊고 있었다. 그들의 본모습이, 자신들이 두려워하던 신수라는 사실을.
「내 태도가 경박스러워? 그렇다면 경박스러운 짐승에게 눌린 기분이 어때?」
인간의 공포를 마주한 샨티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고작 이따위 위협에 벌벌 떠는 주제에 입을 놀리다니.
「그럼 어디부터 물어 줄까…….」
장난치듯 눈을 반짝거렸다. 여전히 인간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이런 주제에 무슨.
그때 뒤에서 두려움의 내음이 밀려왔다. 적막 속에 숨죽인 공포가 깔려 있었다.
샨티는 가볍게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새까만 표범이 침묵을 가르고 찬찬히 다가오고 있었다. 묵직한 걸음마다 위압감이 배어 있는 것 같았다.
샨티와 후작에게 가까이 온 에이몬이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에이몬의 쏟아지는 시선을 마주하자 후작은 오금이 저려 손에 닿는 풀을 움켜쥐었다.
「인간. 넌 짐승의 예법을 얼마나 알고 있지?」
귓가에 박히는 음색이 서늘하면서도 차분하다. 나직한 목소리였으나 후작은 두려움이 일어 몸을 떨었다. 대답 대신 튀어나오는 건 신음뿐이었다. 숨만 겨우 삼켰다.
샨티가 그의 가슴을 꾹 누르며 이죽거렸다.
「강한 존재를 따르는 게 짐승의 예법이야. 난 그래서 수장님을 따르지. 만약 수장님을 경배하지 않으면? 죽는 거야.」
“…….”
「자. 이제 짐승의 예법을 지킬 준비가 되어 있어?」
감히 신수를 욕보였으니 짐승의 예법으로서 죽을 준비가 되어 있냐는 경고였다.
공포로, 후작의 눈동자가 꺼멓게 죽었다. 절 바라보는 두 눈빛에 몸이 납작하게 눌리는 기분이었다.
“죄송, 커흑, 죄송합니다!”
압박감으로 기침을 내뱉으며 후작이 빌었다. 신수를 비웃던 의기양양했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초라하게 바들거리는 몸짓만 남았다.
멀리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라르트는 홀로 중얼거렸다.
“저거 언젠가 보았던 장면 같은데.”
자신 역시 겪었던 일이다. 어릴 적 블론디나에게 화살을 날렸다가 에이몬에게 호되게 당한 적이 있지 않은가.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행동이었는데, 그땐 무슨 정신으로 그랬는지.
“나야 어린애였다 치지만, 저 후작은 다 커서 왜 저러는 거야.”
동정하는 듯 비웃는 듯 라르트가 읊조렸다.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눈치만으로 파악했다. 보나 마나 겁도 없이 행동하다가 혼나고 있는 게 분명해. 마치 과거의 자신처럼.
어쨌든 지금 신수가 밟고 있는 자는 아델라이의 측근이었다. 신수와 어울리는 무도회 자체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세력 중 하나다.
저들끼리 무슨 말을 쉽게 지껄였을지는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쉽게 나올 답이다.
‘나 대신 혼내 주는 게 고맙기는 한데.’
그들은 아델라이와 친밀한 만큼, 라르트와는 조금 척을 졌다.
라르트는 황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신수가 오히려 저렇게 나와 주었기에, 뒤에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댈 이들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있다. 입 한번 잘못 놀리면 목숨에 위협을 받는데 감히 입방아를 찧을 리가.
하지만 이 자리는 화합을 위하여 모인 자리 아닌가. 소동이 길어지면 그 또한 곤란했다.
라르트의 시선을 알아차린 황제가 들고 있던 잔을 시종에게 건넨 후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굳은 채 소동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고개 돌려 황제를 응시했다. 이제 사태가 어떤 식으로 마무리될 것인가.
그리고, 후작을 짓밟던 샨티의 눈빛이 달라진 건 그 순간이었다. 멍하니 풀린 동공으로 샨티는 송곳니를 내밀어 후작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