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70화
예쁘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설표는 예뻤다. 에이몬보다는 아니지만 매끄러운 선을 그리는 몸이라든가 쫑긋거리는 귀라든가, 모든 게 귀엽고 예뻤다.
에이몬은 신수이지만 인간보다는 표범에 가까운 존재 아닌가. 새롭고 예쁜 표범에게 끌릴지도 모른다.
불안하게 일렁이는 질투로 속이 달았다. 하지만 그 속내를 표현할 수 없는 건, 인간인 자신이 신수를 두고 표범과 겨룰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블론디나는 씩씩거리며 긴장을 삼켜야만 했다.
블론디나가 밖으로 나오자 무신경했던 에이몬의 표정이 대번 달라졌다. 에이몬은 슬금슬금 밖으로 나오는 블론디나를 향해 다정하게 웃었다.
“내가 사냥해 왔어. 구워 줄 테니 안에서 기다려.”
하지만 블론디나는 에이몬의 제안처럼 착하게 안에서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둘러쓴 모포를 더욱 꽉 둘러매고는 쿵쿵 발을 굴려 에이몬을 향해 다가갔다. 발자국을 만들며 몇 걸음 걷는데, 에이몬 뒤에 있던 설표가 휙 튀어나와 달라붙었다.
“어머?”
위협은 아니었다. 설표는 블론디나의 허벅지에 얼굴을 문지르며 갸르릉거리기 시작했다.
에이몬이 손질하던 고기를 툭 떨어뜨린 건 그와 동시였다.
언제 부드럽게 웃었냐는 듯 표정을 단단히 굳힌 그가 거침없이 다가왔다.
“어디서, 감히.”
에이몬은 바닥을 긁는 듯한 목소리로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비비적거리는 설표를 번쩍 들어 가차 없이 내던졌다. 졸지에 짐처럼 던져진 짐승은 눈밭을 데굴데굴 구르더니 꺙! 하고 억울한 듯 울었다.
당황한 블론디나가 에이몬의 손을 톡 쳤다.
“왜 그래?”
에이몬이 갑자기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설표에게 호감이 있는 건 아니었나 보다. 다행이었다.
에이몬은 대답 대신 뒤를 휙 돌았다. 그런 뒤 바닥에 움츠리고 있는 설표를 향해 형형한 눈빛을 보냈다.
꺼져. 안 꺼져?
목 아래에서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울린 것 같기도 하다. 찔끔한 설표는 차마 둘을 향해 다가오지 못했다.
고개 돌린 에이몬이 블론디나를 진지하게 내려다보며 이를 갈 듯 물었다.
“쟤가 나보다 예뻐?”
“뭐?”
갑자기 무슨 소리야. 블론디나는 영문 모를 표정으로 에이몬을 올려만 보았다.
“나보고 매일 귀엽다고, 예쁘다고 했잖아. 세상에서 내가 제일 아름답다며.”
“어?”
“쟤 보니까 쟤한테 더 시선이 가?”
아무래도 에이몬은 술기운에 발갛게 달아오른 블론디나의 두 뺨을 오해라도 한 모양이었다.
블론디나는 반쯤은 술기운으로, 반쯤은 에이몬을 향한 감정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저 미소 정도면 끝날 것 같았는데 하하하, 하고 튀어나오는 웃음소리를 듣자 하니 아무래도 제가 정말 취하긴 취했나 보다.
어쩜 세상에 이렇게 귀여운 짐승이 다 있지? 몸은 커다래서는 제 품에 안겨 있던 새끼 고양이 때만큼, 아니 그보다 더 귀여운 것 같다.
블론디나는 초조하게 절 내려다보는 에이몬의 옷깃을 붙잡고 웃음기 어린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뒤이어 허리를 편 블론디나가 한가득 웃으며 답했다.
“난 새하얀 눈보다 새까만 밤이 더 좋아.”
“…….”
“별처럼 반짝이는 이 눈이 세상에서 제일 예뻐. 내 취향이 그래.”
손을 들어 에이몬의 눈가를 더듬자 서늘히 잠겼던 에이몬의 표정이 풀렸다.
“……정말?”
“응. 네가 최고야.”
에이몬은 블론디나가 만지기 편하도록 뒷짐을 진 채 상체를 약간 숙였다.
그리고 괜히 바닥을 보는 척 눈을 내리며 입꼬리를 애써 내렸다. 치미는 감정을 참기가 힘들어 영 머쓱한 모양이었다.
블론디나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저렇게 떡 벌어진 어깨로, 커다란 몸으로, 피 묻은 손으로 귀여울 수가 있다니.
배 안에서부터 간지러운 감정이 피어올라 픽픽 웃고 있으려니 상체를 기울인 에이몬이 블론디나의 뺨에 입을 맞추며 내음을 맡았다.
“술 마셨어?”
“응. 조금.”
그래서 빨갰구나. 에이몬은 다시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비로소 가만히 웃었다.
하얀 눈 위에 선 에이몬이 눈을 반짝거리며 웃자 왠지 눈앞이 아득해졌다. 황궁이 아닌 이 추운 숲속에 그와 서 있는 현실이 새삼스러웠다.
왠지 속이 벅차올라 뚫어져라 에이몬만 바라보는데, 그 마음도 모르는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발목을 내려다보다가 그녀를 번쩍 들어 안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추우니까 들어가 있어. 발목 시큰거린다며.”
“네 옆에 있고 싶은데.”
“나중에.”
방금까지만 해도 칭얼대던 표범이, 다시 의젓한 척하며 달래 왔다.
블론디나는 에이몬의 목덜미에 매달려 있다가 오두막 안에 쑥 밀어 넣어졌다.
“금방 구워 올게, 조금만 기다려.”
에이몬의 다정한 말과 함께 탁, 하고 나무문이 닫혔다.
시린 바깥 공기가 차단된 실내는 묵직한 온기로 가득했다. 창가에 있던 마제또가 포르르 날아왔다.
“나 심심한데 나랑 놀아, 블론디나! 발목 아프다면서 왜 자꾸 나가요!”
블론디나는 제 차가운 뺨에 몸을 비비는 참새를 톡톡 쓰다듬었다.
뭐랄까……. 마제또와 이 안에서 에이몬을 기다리고 있노라니 마치 단란한 가정이라도 꾸민 것만 같았다.
그건 심장 안이 저릿하게 따뜻한, 퍽 묘한 감정이었다.
에이몬이 구워 온 고기를 빠르게 해치웠다. 배가 고파 그런 걸까. 그저 구웠을 뿐인데도 황궁에서 먹던 식사보다 훨씬 맛있게 먹은 것 같다.
자리를 정돈한 후 미지근한 물에 몸을 씻었다.
원래라면 차가운 얼음물로 씻어야 했으나 무슨 방법을 썼는지 뜨거운 물을 데워 온 에이몬 덕에 덜덜 떨며 찬물을 끼얹는 건 면했다.
다리가 아플 테니 자신이 씻겨 주겠다며 갑자기 열의에 찬 얼굴로 억지를 부리는 에이몬을 말리는 건 힘들었지만.
발목이 아픈 것과 씻지 못하는 게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고?
어쨌든 혼자 잘 씻고 나온 블론디나는 노곤한 햇살을 받으며 창가에 앉았다.
오두막 주인이 모은 것인지 자그마한 인형이 주르륵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다.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에이몬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에이몬은 말없이 블론디나의 발목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뭐 해?”
“빨리 나으라고.”
블론디나가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내쳤으나 요지부동이었다.
‘아무튼, 힘은 더럽게 세가지고.’
블론디나는 제 발목을 문지르는 에이몬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다시 인형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무시하기로 한 것이다.
에이몬이 따 온 겨울 열매를 먹던 마제또가 포르르 날아왔다.
“블론디나 님! 저 예쁜 표범 또 왔어!”
마제또가 창문을 부리로 콕콕 찍었다.
블론디나는 인형을 내려놓고는 창문을 향해 주욱 몸을 뺐다. 어쩐지 블론디나의 발목을 잡고있는 에이몬의 손아귀 힘이 더욱 강해지는 것 같다.
“있잖아, 에이몬.”
“응.”
무뚝뚝하게 답하는 에이몬은 창문 한번 올려다보지 않았다.
“저 표범이 너 좋아서 계속 오는 거 아니야?”
“…….”
답 없이 눈을 내리깔고는 블론디나의 발목만 조물락거렸다.
에이몬에게서 설핏 어이없다는 웃음이 샜다.
쟤 수컷이야. 수컷이라고, 브리디. 네 냄새 맡고 좋아서 온 거야.
차마 그 대답을 할 수 없어 블론디나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뽀얀 발목을 들여다보다가 조심스럽게 들어 복숭아뼈에 입을 맞춘다.
“응? 뭐 해?”
깜짝 놀란 블론디나가 머리카락을 잡아끌었으나 에이몬은 그녀의 종아리를 느긋하게 올라오며 계속 입을 맞췄다.
샨티가 했던 말을 상기한다.
“그 인간은 왜 그렇게 향기가 좋지?”
샨티뿐이 아니었다. 블론디나를 숲으로 처음 데리고 왔을 때, 유독 그녀의 향기에 관심을 보이고는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하기야 브리디의 내음에 나만 미치는 건 아니겠지.
깨물면 핏방울이 배어 나올 것같이 연약한 살갗. 달콤하게 흘러나오는 향기를 맡고 있노라면 심장 안부터 근질거리는 묘한 충동이 닥쳐오고는 했다.
이따금 그렇게 폭력적인 충동이 들 때면 그대로 이를 박아넣어 새하얀 살을 짓씹고 싶기도 했으나…….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무릎에 입을 맞췄다. 훌쩍 올라간 드레스 자락 사이로 뽀얀 다리가 그대로 드러났다.
자신은 결코 이 부드러운 인간을 아프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블론디나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 발가락만 움찔거렸다.
“마사지해 주는 거라면서. 이게 무슨 마사지야.”
입술로 여기저기를 지분거리는 게 야릇하기 짝이 없다.
“내버려 둬. 좋은 냄새 나서 맡는 것뿐이야.”
마치 남 일 말하듯 에이몬은 덤덤히 답했다.
허벅지에 얼굴을 박고 잘근잘근 여린 살을 씹어 오는데, 그의 숨결이 닿을 때마다 몸이 흠칫 떨렸다.
“이렇게 예쁘고 부드럽고 말랑하고 향기까지 좋은데 누구나 좋아하는 건 당연해.”
혼잣말인지 무언지 모를 말이 옅은 키스와 함께 나직하게 떨어졌다.
에이몬은 창밖의 설표를 떠올리며 허벅지를 잘근 씹어 아프게 빨아 당겼다. 쪽쪽거리는 젖은 소리가 울렸다.
따끔한 감각에 블론디나가 다리를 움츠렸다.
“따가워, 에이몬.”
“하지만 아무한테도 못 줘.”
천천히 입술을 떼자 블론디나의 허벅지 위에 붉은 자국이 선연했다. 에이몬은 그보다 더욱 위쪽에도 울혈 자국을 새기기 시작했다.
인간도, 표범도 싫었다. 블론디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생명체는 벌레라 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성별과 종을 아우르는 편견 없는 질투라고 할 수 있겠다.
블론디나의 다리에 얼굴을 묻은 에이몬의 머리카락이 하늘하늘 흐트러졌다. 먼지가 반짝거리며 부유했다.
어디서인가 달려온 마제또가 테이블 위에서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뭐 해요?”
에이몬은 곧장 손을 뻗어 마제또를 콱 움켜쥐었다. 블론디나의 드레스를 휙 내린 그가 중얼거렸다.
“보지 마.”
“뭘! 뭘 보지 마욧!”
에이몬의 손아귀 아래 파닥거리며 마제또가 반항했다.
“브리디 다리 보지 마.”
“볼 건데? 볼 건데?! 볼 거, 악! 아이고오-! 표범이 참새 괴롭히네!”
놀리듯 반항하던 마제또는 꺅꺅거리며 버둥거렸다. 에이몬이 손아귀에 힘을 더욱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프게 할 의도는 없었기에 답답함으로 몸을 뒤틀 뿐이었다.
찡찡거리는 마제또를 손에 쥔 채, 다른 손으로 블론디나의 옷자락을 툭툭 단장해 준 에이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느슨해진 손아귀 틈으로 마제또가 폴폴 날아 도망쳤다.
“이 깡패! 신수님은 깡패야!”
박제된 사슴 머리 뿔에 앉아 마제또가 억울한 듯 외쳤다. 물론 에이몬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깡패니 성격이 더럽다느니 소리를 듣는 건 이미 이골이 난 일이다. 눈 하나 깜빡할 리 없다.
블론디나는 허벅지 부근을 문지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에이몬에게 씹힌 자국이 따끔따끔하다. 붉게 상처 난 자리를 만질 때마다 기분이 이상했다.
아까 에이몬이 매달렸을 땐, 아픔보다 묘하게 야릇한 감정이 치밀어 진심으로 밀칠 수가 없었다.
아프게 하는데 기분이 좋다니. 나도 변태인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