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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67화 (67/121)

# 67

#67화

수면 아래 모든 게 깊숙이 잠겼다.

가라앉는 도중, 제 주변 얼음이 부서지고 깨어지는 소리. 사정없이 출렁이는 물의 난폭한 파동을 느낀 것 같기도 하다.

제 몸을 휘감는 무언가를 느끼는 순간 블론디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당장 찾아와!”

격분한 황제가 턱을 파르르 떨었다. 팽팽하게 힘줄 돋은 주먹을 쥐며 고개 숙인 이들을 향해 다시 고함쳤다.

“온 바다를 뒤져서라도 찾아오란 말이야!”

황제가 창문을 향해 화병을 던졌다.

쨍그랑! 부서져 내린 유리창 사이로 성난 바람이 휩쓸려 불었다. 새까맣게 물든 창밖 어둠이 안으로 밀려드는 것만 같다.

초조함으로 황제의 목구멍이 바짝 말랐다. 메마른 호흡 사이로 신음이 흐른다.

분노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던 황제가 곧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하늘빛 망토가 올라와 있었다. 얼음 위를 뒤지던 기사들이 들고 온 것으로, 블론디나가 마지막에 입고 있던 것이었다.

홀로 눈 위를 나뒹굴던 망토의 의미를 알기에. 어디에도 보이지 않은 제 딸의 행방을 이미 마음으로 알고 있기에. 황제는 무력한 얼굴로 망토만 비틀어 쥐었다.

“……모두 나가.”

방금까지 격정을 터뜨렸던 것과 달리, 가신들을 물리는 황제의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소리를 내지르며 당장 찾아오라 분노했음에도 이미 알고 있다. 시리게 푸른 얼음 바다 아래 무엇이 잠겨 있을지.

어금니만 아프도록 베어 물고는 고개를 숙였다.

처음으로 여행에 데리고 온 제 딸을, 푸른 바다 아래 깊숙이 처박은 것이다. 영영 잃은 것이었다.

라르트 역시 제 방을 부산스럽게 돌아다녔다.

의자에 억지로 앉아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벌떡 일어났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가에 다가가 창틀을 비틀어 쥐며 멍하니 밖을 응시했다.

깊이를 모르는 어둠 밖으로 새하얀 설원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제 누나를 삼켜 버린 차가운 설원이.

씨근덕거리며 숨을 몰아쉬던 라르트가 결국 방을 뛰쳐나왔다. 무어라도 해야 했다. 죽은 몸이라도 찾아야만 한다. 그것이 가능하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반드시.

그래야 이렇게 타는 가슴이라도 내려갈 것만 같았다.

“썰매를 대기시켜.”

“위험합니다, 황자님!”

“네게 의사를 물은 것이 아니다. 명한 것이지. 어서 준비해.”

싸늘하게 일갈하며 초조하게 외투를 여미는데, 뒤에서 아델라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까지 얼음 속에 처박히고 싶어?”

라르트는 옷을 여미던 손을 멈추고는 조용히 뒤돌았다.

아델라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얼굴 위에 어둑한 그림자가 묵직하게 침전해 있다.

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초에 가족이 아니었던 황녀다. 내칠 수 없기에 억지로 황궁 귀퉁이에 처박아 놓았던 황녀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쓰다 버린 패만도 못한 황녀. 한데 어찌하여 모두가 저리 초조해하는 것인지.

블론디나를 향한 걱정보다 분노가 밀려왔다. 절 향한 사랑을 모두 빼앗아 간 황녀. 아버지와 동생의 관심을 앗아 가더니 기어코 죽을 때까지 이런 식으로.

아델라이가 라르트를 억지로 방에 밀어 넣었다.

“위험한 행동 하지 말고 얌전히 기다려. 그 여자애의 시체가 올 때까지.”

라르트 역시 죽으면 제가 황제가 될 수 있으니 어쩌면 득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치사하게 황제 자리에 오르고 싶지는 않았다.

제 실력으로, 당당하게. 제가 찾은 이로 신수를 라르트를 억누르고 위대한 자리에 오르고 싶었다.

라르트는 가만히 아델라이를 응시했다. 그러다가 걱정이라고는 전혀 담겨 있지 않은 무감정한 눈동자를 마주하며 허탈하게 웃었다.

“나와 피가 섞였어. 내가 어떻게 얌전히 기다릴 수가 있겠어.”

“아니. 폐하와 섞였지 우리와는 아니야.”

“…….”

“애초에 있어서는 안 될 존재였어. 정신 차리고 냉정을 되찾으란 말이야.”

비정하면서도 냉담한 얼굴로 아델라이는 경고했다. 라르트는 슬슬 열이 오르는 눈으로 그런 제 누나를 가만히 노려볼 따름이었다.

***

“으음…….”

블론디나의 입술 사이로 나약한 신음이 흘렀다. 얇게 저며진 냉기에 뒤덮인 느낌이다.

잔혹한 고통이었다. 시리게 밀려오는 아픔으로 몸이 뒤틀렸다.

“브리디.”

생기 잃은 목소리가 제 이름을 애타게 불러 오는 것 같다.

블론디나는 입을 열어 응, 하고 대답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억센 갈증이 달라붙은 것같이 목 안이 답답했다.

벗은 등 위로 커다란 손이 끊임없이 닿았다. 뜨거운 그 손은 혹독하게 얼어붙은 몸을 애끓게 쓸어내리고 안타깝게 어루만졌다.

어떻게든 온기를 나누어 주는 듯 연신 몸을 매만져 왔다.

초조하게 떨리는 손이 부드럽게 문지르는 곳마다, 애타게 스치는 살갗마다 미약한 열기가 돌았다. 몸 안에 영영 머물러 있을 것 같은 한기가 스르륵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힘겹게 내쉬던 숨결에도 온기가 담기는 듯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추위로 주체할 수 없이 파들파들 떨리던 몸이 늘어지기 시작했다. 바짝 굳은 긴장이 슬슬 풀렸다.

블론디나의 손가락에 온기가 돌자, 에이몬은 연신 그 손끝에 조심스레 입을 맞췄다.

당장이라도 사그라질 것 같은 목소리가 울렸다.

눈 떠봐, 브리디…… 응?

하지만 블론디나는 눈을 뜰 수 없었다. 의식이 몽롱해졌다. 한없이 한없이, 깊은 저편으로 끌려 들어갔다.

막막한 심연을 부유하며 블론디나는 무의식 속에 숨어 있던 기억의 조각을 건드렸다.

지금으로부터 아주 머나먼 과거.

소녀는 금발을 휘날리며 천천히 숲길을 거닐었다.

권태로운 하품이 났다. 제가 빚은 아름다운 숲이었으나, 보기 좋은 광경도 언젠가는 지루해지는 모양인지.

계절이 변하는 걸까. 초록 이파리들이 물감 번지듯 은은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얼음이 녹아 흐른 자리. 푸릇한 들풀이 차지한 길을 거닐며 나무가 드리운 긴 적막을 가르고 있을 때였다.

크르릉…….

어디서인가 상처 입은 짐승의 울음이 들려왔다.

소녀는 걸음을 멈췄다. 언뜻 들어도 맹수의 소리였다.

나무가 우거진 숲은 위험한 짐승이 출몰하기 적당한 곳이다. 당장 뒤돌아 달아나야 할 상황이었으나 소녀의 은회색 눈동자 안에는 두려움 하나 없었다.

훈풍이 지나간 수풀을 지나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흐음……. 너구나.]

소녀는 고개를 기울이며 웅크린 짐승을 응시했다.

집채만 한 크기의 흑표범이 소녀를 고요히 노려보고 있었다. 새까만 앞발에 붉은 피가 묻어 있다. 제 것인지 다른 짐승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크르릉…… 표범의 목 아래, 다시 위협적인 소리가 울렸다. 소녀는 역시 동요 하나 없었다.

절 향해 발톱을 드러내는 흑표범을 향해 찬찬히 다가갔다.

경계하며 송곳니를 내밀던 흑표범이 흉포하게 공격하려 했으나,

[착하지.]

조용히 손을 들어 절 향해 달려들려던 표범의 이마를 톡, 건드렸다.

표범은 마치 굳은 것처럼 자리에 우뚝 멈췄다. 알 수 없는 힘에 묶인 듯 앞발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이 숲에서, 아니 숲을 비롯하여 이 대륙에서 저보다 강한 짐승은 없을 텐데.

크게 뜬 자줏빛 눈동자가 나뭇잎 틈새로 내비친 햇살 아래 반짝 빛났다.

소녀는 단단히 굳은 짐승의 콧잔등을 문질렀다.

[이렇게 새까만 털은 처음이야. 예쁘다.]

마치 어린아이 칭찬하듯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어렴풋이 네 소문은 들었어. 이렇게 태어난 걸 보니…… 내 숲의 힘에 영향을 받은 모양이지?]

[…….]

[혼자가 편하니? 모두를 적으로 삼으면 다치기만 할 뿐이야. 봐. 피가 나잖아.]

표범의 눈동자에는 야생의 난폭함이 일렁거렸다. 표범의 콧잔등이 움찔 험악하게 떨리자, 소녀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짐승의 이마를 톡 두드렸다.

[네가 말을 못 한다는 걸 깜빡했어. 이제 됐니?]

표범은 몸이 풀렸음에도 소녀를 향해 섣불리 달려들지 못했다.

[네가 뭔데.]

다만, 당장이라도 소녀의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아 넣을 듯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을 뿐이다.

소녀가 손가락으로 제 가슴팍을 가리켰다.

[나? 내가 뭐기는.]

그리고 절 위협하는 표범의 눈을 응시하며 부드럽게 답했다.

[대륙의 빛이자, 보호자이자, 네 ---이지. 이 귀여운 고양아.]

순간, 표범의 오만한 눈동자에 미약한 경배심이 일었다.

쏴아아- 그들의 주변으로 가느다란 나뭇잎이 돌풍에 휘몰려 지나갔다.

타닥타닥. 나무 타는 소리가 들려왔다. 숨소리도 눈물도 숨을 죽인 밤. 블론디나는 찬찬히 눈을 떴다.

무언가 꿈을 꾼 것 같은데……. 꿈이라기보다는 마치 기억을 더듬는 듯한 묘한 감각이었다. 하지만 꿈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모든 게 다시 오래된 명화처럼 색을 잃었다.

희미한 어둠이 안개처럼 깔려 있다. 어디서인가 붉은빛이 너울너울 흔들렸다.

여기가 어디일까. 내가 있던 곳은 숲인데.

어렴풋하게 사라진 꿈을 더듬으며 블론디나는 손끝을 움찔 떨었다.

코끝에 청량한 풀 내음 대신 묵직한 재 냄새가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선명히 흘러들어 오는 건, 익숙하고도 향기로운 에이몬 내음. 언제 맡아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향기.

깜빡, 깜빡,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누군가의 팔뚝이 제 허리를 아플 만큼 세게 휘감고 옥죄어 끌어안고 있었다.

언제 차게 식었냐는 듯, 몸에 뜨거운 열기가 휘돌았다.

두 몸이 틈 없이 맞닿았다. 두 사람을 한꺼번에 감싸 안은 모포 안으로 미열이 포근포근 흘렀다.

뺨에 닿은 상대의 가슴팍이 단단하다. 뺨 뒤로 쿵쿵쿵 느릿한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절 끌어안고 있는 이는 분명 사내였다. 온몸으로 안아 주고 있으나 마치 매달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상대는 남자였다. 낯선 인간이었다.

하지만 블론디나는 놀라지 않았다. 잔잔히 고개 들어 상대를 여유롭게 확인했을 뿐이다.

“에이몬.”

이 향기와 체온은 에이몬이 분명했다. 제 커다란 고양이가 절 바짝 끌어안고 있는 것이었다.

여기는 천국인가. 죽음으로 가기 전, 가장 행복한 기억을 안고 가라고 신이 주신 환각인가.

환각이라 해도 좋았다. 이 순간 에이몬과 몸을 맞대고 있는 현실이 더없이 행복했다.

‘죽기 전에 널 떠올릴 때마다 널 정말로 만나게 돼. 이건 무슨 마법일까.’

곰과 마주했던 숲에서 그랬으며, 얼음 강에 빠진 다음, 지금이 바로 그랬다.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목소리에 찬찬히 눈을 떴다.

“…….”

자신이 들은 게 진짜로 그녀의 목소리가 맞는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목울대를 꿀꺽 움직이더니 무표정했던 얼굴을 천천히 일그러뜨렸다.

에이몬의 눈 아래 짙은 그림자가 자욱하게 깔렸다. 북받치는 감정으로 눈 아래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브리디.”

힘겹게 뱉어 내는 이름 속에 처절한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널 잃는 줄 알았어. 네가 죽는 줄 알았어. 네가 눈을 뜨지 않아서…….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는 속내가 뜨겁게 끓어 가슴 안으로 삭아 들어갔다. 참을 수 없이 새는 감정 때문인지 에이몬의 눈가가 점점 더 뜨거워졌다.

블론디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에이몬의 눈가를 더듬었다.

절 바라보는 그의 눈 아래 그늘이 깊게 감겨 있다. 숨겨진 눈물을 금방이라도 툭툭 떨구어 낼 것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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