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65화
이런 상황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소심하고 보잘것없는 황녀만 알았지 가시를 세워 물어뜯는 황녀는 상상한 적이 없다.
위풍당당하게 루시를 공격했던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로베르트 공자는 두 손까지 내저으며 황급히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오해를 풀어 주십시오, 황녀님! 그저 전 황자 전하가 걱정되어-.”
그의 변명이 끝나기도 전, 고개를 기울인 블론디나가 차갑게 물었다.
“그렇다면, 내가 대화 내용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멍청이라는 말이로군.”
“아니, 그것이 아니라!”
다급한 변명마저 블론디나의 냉랭한 문장에 싹뚝 잘렸다.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지금 너희들에게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걸어오는 표독한 황녀라는 뜻일 테고.”
두 남매는 제 잘못을 포장하는 것을 포기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두 공작가 자제가, 블론디나를 향해 허리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어떻게든 상황을 무마해야만 했다. 블론디나가 황제의 딸인 이상, 제아무리 세력이 없는 황녀라 해도 그리함이 맞았다.
어찌 되었든 자신들이 황녀의 시녀에게 치욕을 주려 한 건 사실이었으니.
“황녀님께서 오해하실 상황을 만든 것조차 제 과오입니다! 무례를 용서하여 주시길!”
등 뒤로 싸늘한 식은땀이 흘렀다. 황녀의 새로운 일면을 엿본 기분이었다.
제 시녀가 무시당해도 제대로 말 하나 꺼내지 못할 소심한 이라 생각했기에 벌였던 행동이다. 한데 이건 무슨 상황인지.
신수와 무척 친분이 깊다고 하더니 혹시 그 영향도 있는 것인가.
블론디나는, 하얗게 굳은 얼굴로 서 있는 둘을 외면하고는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그대 공작가 자제들은 언동을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겠어. 다음에는 말뿐인 경고로 끝내지 않을 생각이니 염두에 두도록 해.”
어쩔 줄 몰라 하는 루시의 손을 잡고는 인사 하나 없이 차갑게 돌아섰다.
블론디나는 당당하고도 우아하게 자리를 벗어났다. 남겨진 둘은 착잡한 마음에 시선을 깔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돌아온 블론디나를 보며 어깨를 굳혔다.
블론디나는 테이블 위에 누운 새 한 마리를 쥐고는 다시 인사 없이 돌아섰다.
두 공작가 자제는 블론디나가 마지막으로 돌아서자 한숨을 또 푹 쉬었다.
한편 블론디나는 한 손에는 루시의 손, 다른 손에는 마제또의 작은 몸을 붙들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언제 화를 내었냐는 듯 평소와 다름없이 담담한 얼굴이었다.
분노한 척 성큼성큼 자리를 벗어나다가 하마터면 낮잠 자는 마제또를 잊고 갈 뻔했다.
소란에도 푹 자고 있던 마제또가 눈을 뜨고 부리를 달싹거렸다.
“응? 뭐야……? 뭐예요? 내 타르트 어디 갔어……? 지금 어디 가요……?”
빙긋 웃은 블론디나는 마제또를 향해 부드럽게 답했다.
“일어났어? 내 방에 가서 타르트 줄게.”
“응응…… 나 다시 잘래.”
마제또는 블론디나의 손바닥 안에서 다시 잠이 들었다.
그제야 루시가 주저주저 말을 이었다.
“저, 황녀님…… 저 때문에…….”
루시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블론디나가 ‘태생적 고귀함’을 거론하며 화를 냈던 건, 루시 자신을 감싸기 위함일 터. 루시는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알아챘다.
그들의 말을 오해했기에 화를 낸 게 아니라, 루시 자신이 받을 상처를 지켜볼 수 없어 직접 나선 것이 분명했다.
제가 모시는 소중한 황녀님이, 스스로 치부를 드러내면서까지 절 보호해 주었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 아프면서도 미안하고. 동시에 속상했다.
“황녀님…… 제가…… 저는…….”
루시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하지만 블론디나는 마음으로 알아들었다. 미안하다, 고맙다. 그런 말일 테지.
실상 자신이 한 건 별거 없었는데.
루시야말로, 늘 외로운 제 곁을 같은 모습으로 지켜 주지 않았나.
에이몬과 루시가 아니었다면 치열하고 힘겨운 황궁 생활을 이토록 즐거이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블론디나는 루시의 손을 장난스럽게 꽉꽉 눌렀다. 아까보다 한층 가벼운 목소리가 속삭여졌다.
“어깨 펴, 루시. 네가 저들에게 주눅 들 이유 하나 없어.”
“…….”
“네 뒤에는 내가 있잖아. 나 블론디나 륜 아테스는 무한 권력을 가진 황제 폐하의 딸이라고.”
“황녀님…….”
“심지어 내 뒤에는 에이몬이 있어. 신수 수장님까지 계신 거지. 세상에, 이처럼 믿음직스러운 황녀가 어디 있어?”
“…….”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기 위해 블론디나의 어조가 한층 장난스러워졌다.
“게다가 너라면 끔뻑 죽는 얼빠진 황자 전하도 있잖아?”
루시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블론디나를 빤히 응시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툭툭 떨어질 것처럼 눈 아래 물기가 고여 있었다.
루시의 손을 다정하게 꽉 붙들며 블론디나가 눈으로 웃었다.
“루시 헤리브. 다른 이들의 말 같은 건 신경 쓰지 마. 내 사람이니 내 말만 들어. 넌 사랑스럽고, 어여쁘고, 소중한 내 루시니까.”
“네…….”
루시는 울먹울먹 입술을 삐죽였다.
고맙다고, 위안이 된다고 대답하고 싶었는데 입을 열면 울음이 터질 것 같아 억지로 집어삼켰다.
그 누가 감히 블론디나의 태생을 운운하며 비웃는가. 블론디나 륜 아테스는 누구보다 황녀다운 이였다.
제가 모시는 이라 하는 말이 아니었다. 제국에 이토록 상냥하고 너그러우며 다정한 황녀는 없을 것이다.
블론디나 황녀님은 자신의 빛이었고 제국의 광명이었다.
모두가 피했던 황녀님의 시녀로 들어오게 된 건 제 생애 가장 큰 행운이었으리라고, 루시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블론디나의 손을 잡고 걷고 있노라니, 귓가를 스치는 제르반 제도의 냉기조차 따스하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
아델라이는 눈으로 뒤덮인 벌판에 선 채 자그마한 활시위를 죽 늘여 당겼다. 담담히 뜬 눈에서 싸늘하게 냉기가 흘렀다.
“그래서 내 조심하라고 경고했잖아.”
아델라이가 시위를 놓았다. 핑-! 화살이 새하얀 눈밭 위를 빠르게 날아갔다.
사냥을 위해 쳐놓은 경계 안. 앙상한 나무 사이를 오가던 검은 토끼 몸에 화살이 박혔다. 토끼는 소리 하나 없이 바닥에 픽 널브러졌다.
루베로스 데힐 공자, 클레아 데힐 공녀, 두 데힐 공작가 남매는 찬사를 보내며 손뼉을 마주쳤다.
“멋지십니다, 황녀님!”
꽁꽁 얼어붙은 눈 위로 토끼의 새빨간 핏물이 퍼지기 시작했다.
가시처럼 비죽 솟은 바위산과 그 아래 펼쳐진 가파른 벼랑. 돌 절벽 사이로 드문드문 박혀 있는 나무를 뒤로하고, 아델라이가 등을 돌렸다.
“블론디나 그 비천한 것을 만만히 보면 안 된다고 했잖아. 순진한 척 여간 간악한 게 아니란 말이야.”
아델라이는 장갑을 벗어 루베로스의 가슴팍에 던졌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마차를 향해 손짓하자 마차가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에스코트 필요 없어.”
직접 문을 열고 마차 안에 들어서는 아델라이 뒤를, 데힐 공작가 남매가 따라붙었다.
탁. 곧 마차 문이 닫혔다. 혹독한 겨울과 아늑한 마차 사이 경계선이 생겼다.
따뜻한 실내 공기에 아델라이의 두 뺨이 발그레 물들었다.
오늘 아침, 두 남매는 블론디나 사이에 있던 일을 아델라이 황녀에게 낱낱이 고해바친 터였다.
루시를 욕보이려다가 되레 블론디나에게 호되게 혼났다는.
평소의 아델라이라면 분노를 터뜨리며 블론디나의 행동에 대해 이를 갈았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쩐지 유한 반응을 보였다.
자신이 가진 패가 확실하기에 마음에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바라한의 후예. 그를 손에 넣었다. 그의 배 속에 심어 놓은 마정석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조금 시간이 걸리기에 기다리고 있기는 하나 조만간이다.
‘비밀스러운 일’을 끝마친 후엔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주겠다며 살살 꼬드기고 있으니 이제, 곧.
한가득 쥐여 준 보석에 정신이 팔려 입을 헤 벌리는 꼴을 보아하니 영 어리석어 보였다. 휘두르기 딱 알맞은 이였다.
회상을 끝낸 아델라이가 마차 의자에 등을 기대며 물었다.
“분하지, 루베로스?”
“등 뒤에 신수를 업어 그런지 아주 자신만만하더군요. 그 짐승 때문에 차마 블론디나 황녀를 건드릴 수 없었습니다.”
코웃음을 친 아델라이가 차창에 팔을 걸치며 데힐 공녀를 향해 손짓했다.
“넌 아직도 라르트 그 멍청이가 좋아?”
“예, 황녀님.”
데힐 공녀는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시절부터 품어 온 상대다. 황자비가 되리라 확신하며 자라 왔기에 아직은 절 부정하는 라르트를 인정할 수 없었다.
아델라이가 쯧, 하고 탐탁지 않게 혀를 찼다. 그 가볍고 어리석은 애가 뭐 그리 좋다고.
“신수가 없다면, 블론디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하찮고 보잘것없지.”
“그렇지요.”
하지만 그 신수가 너무도 막강하여 ‘아무것도 아닐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 사실이 고까워 늘 아델라이는 얼굴을 구기고는 했다. 하지만 지금은 신수 이야기를 먼저 꺼내면서도 사뭇 밝은 얼굴로 차창을 툭툭 두드렸다.
“걱정하지 마, 데힐. 넌 라르트 황자와 결혼할 수 있을 거야.”
“네? 하지만 황자께서 그 시녀를 너무도 원하시는 것 같던데.”
그 시녀를 없애 버리기엔 황녀, 그리고 황녀가 등에 업은 신수라는 뒷배가 너무도 크다. 데힐은 그 말을 차마 할 수 없어 입술을 깨물었다.
데힐이 하고픈 말이 무언지 알기에, 아델라이는 그저 웃었다.
습관적으로 목 언저리를 만졌으나 열쇠는 없었다. 이제는 필요 없어졌으니 풀어 놓았는데 버릇이 되어 그런지 자꾸만 손이 갔다.
만져지는 건 허공에 있는 공기뿐.
“흐음.”
아델라이는 빈자리를 더듬으며 기분 좋게 목을 울렸다.
제 하인으로 위장시킨 바라한의 후예 조셉을 떠올리며 흠뻑 웃는다.
이제 곧 그토록 고대하던 날이 올 것이다. 절 가로막는 모든 걸 치운 후 자신이 황태녀가 될 그날이.
‘어쩌지? 라르트의 부인이 되어도 넌 절대 황후가 될 수 없을 텐데. 황제 자리는 내가 차지할 테니까.’
눈빛 속에 비웃음을 담아 데힐 공녀를 응시하다가 이내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각다각, 말발굽 소리와 함께 새하얀 벌판이 휙휙 지나가고 있었다.
아델라이는 옆자리에 있던 자그마한 주머니를 들어 루베로스를 향해 건넸다.
“내일 얼음 강으로 초상화를 그리러 간단 말이지? 블론디나가 썰매에 올랐을 때-…….”
아델라이는 악의적인 말을 건네며 붉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모든 일이 뜻대로 굴러가고 있다고는 하나, 기고만장하고 건방진 블론디나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는 것.
‘골려 주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신수를 조종해 죽이는 것까지는 아직 못 하지만 그 정도는 할 수 있다.
아델라이는 내일 벌어질 일을 상상하며 기분 좋다는 듯 웃었다.
아델라이에게 주머니를 건네받은 루베로스 공자가 흥미로운 얼굴로 주머니에 코를 박아 킁킁거리고 있었다.
***
“황녀님, 고개를 좀 더 들어 주십시오.”
멀찍이 떨어진 화공의 말에, 브론디나는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절로 비집어 나오는 한숨을 애써 삼킨다. 벌써 한 시간째다. 얼음 강 위, 호화로운 개 썰매를 탄 채 앉아만 있는 게.
블론디나만이 아니었다. 라르트 황자도, 아델라이 황녀도 썰매 위에 앉아 정면을 향해 도도한 시선을 주고 있었다.
초상화를 그린단다. 초상화야 황궁에서도 그릴 수 있는 걸. 굳이 왜 여기까지 와서 그리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름다운 설원을 배경으로 초상화를 그려 황족의 고고함을 부각한다나.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힐끔 눈만 돌려 라르트를 살폈다. 라르트 역시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이었으나 허리를 빳빳하게 세운 채 제대로 응하고 있었다.
블론디나는 썰매 고삐를 꽉 움켜쥐었다.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커다랗고 새하얀 개들이 보였다.
‘저 개나 쓰다듬고 놀았으면 좋겠다. 얼른 그리고 들어갔으면.’
장갑을 꼈음에도 손가락 사이에 찬바람이 스미는 것만 같았다. 날씨는 슬슬 추워지고 작업은 평탄하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사건은 마지막에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