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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64화 (64/121)

# 64

#64화

가볍게 던져지는 농담이었으나 속에 삐죽한 뼈가 있었다.

그리고, 당황한 얼굴인 루시를 손수 이끌어 제 자리에 앉힌 후 루베로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었다.

“어깨는 이렇게 단단한데 말이야. 위대한 기사 가문 후계자도 요샌 별 볼 일 없는 모양이야?”

소리 내어 웃으며 루베로스를 비웃은 건 다음이었다.

상대의 기분을 고려하지 않고 생각 없이 독설을 내뱉는 건 라르트 황자의 일상이었기에 루베로스는 그다지 괘념치 않았다.

다만,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다.

애초에 엇나가고 삐뚤어진 성정인 황자이다. 자신이 루시를 무시하고 압박할수록 루시를 더욱 싸고돌 게 뻔하다.

불은 바람이 불수록 더욱 거세게 타오른다지. 라르트의 불을 타오르게 하기 전, 다른 방향으로 접근해야 함이 옳았다.

루베로스는 그리 결론지으며, 회상에서 쓱 빠져나왔다.

사랑스러운 제 여동생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은 그가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 이제 그 천한 시녀를 혼내 주러 가자.”

“네, 오라버니.”

클레아 데힐 공녀는 제 오빠의 손을 꽉 맞잡고는 의지에 찬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여행이 기회였다.

주제 모르고 설치는 시녀를 제치고 다시 라르트 황자의 옆자리를 차지할 기회.

블론디나는 사뭇 기분이 탐탁지 않았다.

루시와 함께 티타임을 가지는데 난데없이 데힐 공작가 남매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라르트 황자는 때마침 아델라이와 조각상 구경을 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위대한 황족을 뵙습니다, 황녀님.”

그들은 예의 있게 인사를 전하더니 옆에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딱히 방해하거나 시비를 걸어온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눈꼬리가 뾰족해지는 건, 어제 보았던 두 남매의 눈빛 때문이다.

‘고위 귀족은 어째 눈빛이 하나같이 저렇게 더럽지?’

그들의 눈빛 속에 숨길 수 없는 경멸이 배어 있었다. 그건 반쪽 황녀인 제게, 그리고 그 황녀의 시녀인 루시를 향해 쏟아지는 것이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그들이 품은 저열한 경멸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하지만 겉으로는 차분히 예를 보이는 공작가 남매를 향해 ‘너희 지금 나 속으로 무시하고 있니?’라며 일갈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리석은 짓. 비웃음만 당할 일이다.

더군다나 그런 종류의 눈길은 어릴 때부터 지치도록 마주했던 것이니 새삼스러울 것 역시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런 양면적인 모습을 보는 것보다는, 라르트 황자처럼 차라리 대놓고 행동하는 게 나았다.

“잘 자네.”

블론디나는 마제또의 배를 건드리며 웃었다. 레몬 타르트를 먹고 잠든 마제또의 배가 통통하게 올라와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작은 짐승을 만지는 게 좋지. 손끝에 느껴지는 온기로 미소가 배어 나왔다.

루시와 단란하게 앉아 말없이 차만 마시는데, 루베로스 공자가 문득 그녀를 불러 왔다.

“그러고 보니, 황녀님. 이번 여행이 끝난 후 데힐 공작가를 방문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공작가를? 무슨 일이 있기에?”

“공작가 후원에서 로울 화공의 전시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자선 파티도 있을 예정이니 함께 즐기시지요.”

블론디나는 외부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여기저기 행사에 얼굴을 비추는 아델라이와는 퍽 다른 행보였다.

제 세력을 다지는 데 큰 욕심이 없었기에, 늘 별궁에만 처박혀 있을 뿐이다.

데힐 공작가는 아델라이 황녀와 친분이 깊은 가문이었다. 늘 아델라이 편에 서서 은근히 블론디나를 무시하고 있는 터.

블론디나는 ‘갑자기 왜?’라는 질문을 하는 대신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래. 여유가 된다면 가도록 하지.”

물론 갈 생각은 없었지만.

“꼭 와주시면 좋겠습니다. 황녀님의 흥미를 돋우기 위해, 저희가 후원하는 로울 화공의 이야기를 들려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흠뻑 웃은 루베로스 공자는 블론디나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자리를 옮겼다. 제 동생인 클레아 공녀까지 데리고 와 자연스럽게 테이블에 합류했다.

능수능란하게 상대를 파고드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귀족이 가져야 할 뻔뻔함 역시.

“로울 화공은 저희가 새로 발굴한 보석 같은 사내이지요. 주로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물을 그리고는 하는데-…….”

다짜고짜 설명을 시작한 루베로스 공자를 응시하며 블론디나는 대충 말을 흘려들었다.

할 일이 없어 심심하기는 했으나 흥미도 없는 설명을 듣는 것보다는 무료한 게 낫다.

하지만 쓸데없이 책잡히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대충 미소를 머금었다. 출신이 비천하여 예술에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며 무시당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얼마나 그렇게 혼자 떠들었을까. 신나게 말을 늘이던 루베로스 공자가 비로소 말을 멈췄다.

“-하여 저희 후원에서 전시회를 열게 된 것입니다. 아마 전시회 이후 미술계에 새로운 유행이 불어올 게 분명합니다, 황녀님.”

달칵. 찻잔을 내려놓은 그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루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헤리브 영애의 가문은 후원하는 예술가가 있습니까?”

“예?”

갑작스럽게 돌아온 화살에 루시의 눈이 동그래졌다.

귀족 사회에서 예술가를 후원하는 건,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기인한 행동이 아니었다.

예술가를 후원하고, 예술 작품을 소비함으로써 제 위세를 드러내는 것이다.

사치로 내보이는 영향력은 사교계에서 몹시 대단하게 작용했다. 그런 면에서 루시의 가문은 말 하나 끼울 수 없는 처지였다.

예술가 후원은 고사하고 그 헤리브 백작가 자체가 후원을 받아야 할 처지였으니.

애초에 모두가 피하던 블론디나의 시녀로 들어오게 된 것도, 그런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이었다.

“후원하는 예술가가 없다면, 특히 수집하는 작품이 있으신지요?”

루시의 당황을 즐기는 듯 루베로스 공자의 질문은 계속됐다.

루시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쉽게도 후원하는 예술가나 따로 수집하는 작품은 없답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클레아 데힐 공녀가 대화 사이로 파고든 건 그 순간이었다.

“황자 전하께서는 특히 오르페 화가의 화풍을 좋아하시는데. 혹시 알고 있나요, 영애? 저와 함께 전시회를 즐기고는 하셨지요.”

루시는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황자가 좋아하는 화풍이라. 알지 못한다. 황자와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나누며 화단을 거닐었지 사치나 향락에 관한 대화는 나눈 적 없었으니.

루시의 침묵을 뚫고 클레아 공녀의 말이 담담하게 이어졌다.

“황궁 생활을 그리 오래 하셨는데도, 이런 문화에 익숙하지 않아 보입니다.”

“예. 부끄럽게도.”

루시의 답은 나직했다.

귀족인 이상 사치하지 않는 건 부끄러운 일이었다. 비록 본인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현실이 그러했다.

데힐 남매의 눈빛에 언뜻 경멸이 어렸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헤리브 가문의 장원도 팔렸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예, 사실입니다.”

“마구간 하나 남기지 못하고, 모두?”

“예.”

“이런…….”

불쌍하기도 하지. 들릴 듯 말 듯 비웃은 공녀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백작가에 남은 건 수도의 주택 하나로군요?”

루시는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대답 대신 입술만 깨물었다.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으나 남매 중 누구도 타박하지는 않았다.

쯧, 혀를 차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을 뿐.

“이건 귀족이라고 부르기도 부끄러운 지경이군요.”

그쯤 되자 블론디나는 눈빛에 싸늘한 냉기를 품고 둘을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저들이 절 전시회에 초대한답시고 합류하여 루시에게 난처한 질문만 던지는 저의가 빤히 보였다.

경계와 경고였다. 넌 상류층과 맞지 않으니 주제넘은 자리를 넘보지 말라는.

하지만 간악한 저들의 말에 흥분하여 루시를 어설프게 감싸 주다가는 오히려 루시를 더욱 곤경에 처하게 할 것이다.

눈을 가느다랗게 뜬 블론디나가 고요히 노려보건 말건, 두 남매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공격을 계속했다.

텃세 아닌 텃세. 위세 아닌 위세였다. 틈을 쫙 벌리고 드러난 루시의 상처를 독하게 파고들어 거칠게 물어뜯었다.

“혹시 알고 계십니까. 귀족 영애가 가져야 할 건 예쁜 얼굴만이 아닙니다. 흉내 낼 수 없는 태생적 고귀함이 필요하지요. 그것이 없다면 주위의 비웃음만 사게 되는 것입니다.”

조언처럼 말하며 루시를 아프게 후벼 팠다.

“앞으로 적응하실 수 있겠습니까? 황자 전하께 부끄러움이 되지는 않겠습니까, 영애?”

그 말뜻은 스스로 물러나라는 의미였다.

주제넘은 자리를 넘보지 말고 곱게 네 자리로 돌아가라는 경멸 섞인 경고. 황자의 걸림돌이 되지 말라는 냉정한 일갈.

블론디나는 불쾌함으로 어금니를 물었다.

루시의 죄라면 힘이 없는 제 시녀가 된 것뿐인데. 라르트 황자의 접근을 내버려 두었던 것뿐인데.

속에서 착착 분노가 깔렸다. 제게 조금만 더 힘이 있었다면 루시가 이런 치욕스러운 상황에 맞닥뜨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블론디나는 자신이 개입하기로 했다. 제 치부를 훤히 드러내는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어떻게든 루시를 보호해 주고 싶었다.

블론디나가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불쾌해.”

“예?”

시선을 들어 두 남매를 훑으며 블론디나는 미간에 신경질을 새겨 넣었다.

“내가 초대하지도 않은 자리에 주제넘게 앉더니. 감히 황제 폐하의 딸인 날 무시하기까지 해?”

“……예? 무시라……니……?”

절 무시하냐는 갑작스러운 말에, 공작가 남매의 얼굴 역시 급히 굳었다. 자신들이 한 말이라고는 시녀를 욕보인 것밖에 없는데 이 무슨 말인지.

세력 없는 황녀의 시녀를 돌려 공격할 수 있을지언정 황녀를 대놓고 무시할 정도로 간이 크지는 않다.

비천한 핏줄이기는 하나 블론디나 역시 고귀한 황족이었기에.

“오해이십니다. 저희는 황녀님을 절대 무시한 적이-…….”

“태생적 고귀함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나. 앞으로 잘 적응할 수 있겠느냐며 내 출신을 빗대어 비웃은 걸 똑똑히 기억하는데. 내 귀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인가.”

어물어물 던져지는 클레아 공녀의 변명을 가로막고 낮게 일갈했다.

루베로스 공자가 고개를 다급히 내저었다.

늘 상냥히 웃던 블론디나만 보아 오던 공작 남매라, 퍽 당황하고야 말았다.

그 말은 루시라는 시녀에게 한 것이니 황녀에게 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블론디나 황녀를 미천하다고 생각하고 있기는 하나 그 속내를 밖으로 내보일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블론디나 역시 황녀는 황녀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황녀님을 향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너희 고귀한 귀족들은 돌려 말하는 데 귀재 아니야. 지금 내 시녀에게 하는 말인 척, 내 출신이 미천하다고 에둘러 날 비하한 것이 아닌가.”

블론디나의 싸늘한 눈빛이 가릴 수 없이 쏘아졌다.

억지에 가까운 힐난임에도 두 남매의 얼굴은 파리하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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