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63화
하지만 그때만 해도 그저 스쳐 지나는 흥미라고 모두 생각했다.
그러나 라르트 황자가 루시라는 시녀를 보기 위해 블론디나의 별궁을 하루가 멀다 하고 드나든다는 소문이 황궁을 시끄럽게 돌고, 결국 여행지에서까지 시녀를 끼고 노닥거리는 모습을 보이자 상황이 짐짓 묘해졌다.
‘혹시 라르트 황자께서 진심이신 걸까?’
속닥거리는 호들갑을 듣고는, 공작가 남매는 사태를 좌시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자존심에 퍽 금이 가는 일이다. 한미한 백작가 자제 따위가, 감히 권세 높은 공작가 영애를 제치고.
심지어 데힐 공작가 안주인은 현 황후의 사촌이 아닌가.
세로 보나, 명분으로 보나, 무너져 가는 백작가 영애보다야 데힐 공작가의 아름다운 영애가 황자비가 됨이 옳다.
‘……더러운 것.’
데힐 공자는 블론디나 뒤에 선 루시를 보며 비웃었다.
루시 헤리브라고 했던가. 아름답기는 하나 그뿐이다.
아름다운 꽃이야 지천으로 널렸다. 제 여동생보다 나은 게 하나도 없는 비천한 여자였다.
저 고운 입술로 황자를 유혹하고 천박하게 꼬리를 쳐 내 여동생을 욕보였겠다? 네까짓 게 감히.
“오라버니. 라르트 황자님께서 더는 제 편지에 답장을 주지 않으셔요…….”
언젠가 침울하게 속삭였던 여동생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데힐 공자는 루시를 노려보았다.
어릴 때부터 라르트 황자만을 올곧게 바라보던 여동생이다. 황자비가 될 날만을 기다리며 기대에 부풀어 있던 가엾은 아이다.
사랑스러운 동생에게 상처 준 루시 헤리브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그간 마주할 일이 없기에 잠자코 있었다만. 이번 여행이 기회였다.
‘루시 헤리브. 과분한 자리에 욕심내어 탐욕을 부리면, 어떤 비참한 결말을 맞게 되는지 내 똑똑히 알려 줄 것이다.’
루베로스 데힐 공자의 눈 속에 오만한 적의가 타올랐다.
***
신수의 숲, 샨티의 저택 안. 묘한 정적이 덤불을 휘감았다.
「…….」
「…….」
「…….」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눈빛을 못 본 척. 어색한 표정으로 뒹굴뒹굴하던 두 갈색 표범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두 표범 중 체구가 조금 더 큰 표범, 샨티가 한숨을 푹 내쉬며 앞발로 얼굴을 성기게 문질렀다.
「수장님.」
「왜.」
멀찍이 떨어진 수풀 안, 느른하게 누운 에이몬이 담담하게 답했다.
그는 마치 샨티 저택의 앞뜰이 제 앞마당이라도 된 듯 무척이나 당연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샨티와 할라가 사랑에 빠져 노닥거리는 것 따위는 전혀 안중에 없다는 듯.
샨티가 수염을 찡긋거리며 물었다.
「도대체 거기서 뭐 하는 거야?」
「구경하는데.」
「뭘?」
「너희 둘.」
아무렇지도 않게 척척 나오는 에이몬의 답에 샨티는 눈을 끔뻑였다.
그렇지. 그렇다. 에이몬이 저기 심드렁하게 누워서 하는 건, 자신들을 무덤덤하게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일주일. 벌써 일주일째였다. 어슬렁어슬렁 찾아온 에이몬이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해 오는 상황이.
「왜. 왜 보는데?」
「심심해서.」
「…….」
샨티에게서 한숨이 다시 푹 나왔다.
심심하다니. 할 일 없이 늘어져 있는 게 에이몬이 가장 잘하는 일 아니었나.
함께 놀자며 찾아갈 때마다, 가차 없이 후려치며 귀찮으니 꺼지라고 했던 에이몬이다.
온종일 누워만 있으면 심심하지 않냐고 물을 때마다 대답하기도 싫다는 듯 눈을 감던 에이몬이다.
그런 에이몬이 왜. 왜 갑자기 심심하다며 저를 찾아오는가.
아니, 찾아왔으면 찾아왔지 왜 눈치도 없이 저렇게 남의 연애까지 방해하느냔 말이다.
풀잎을 꾹꾹 누르며 에이몬이 중얼거렸다.
「심심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아.」
「그러니까, 뭐가? 뭐가 심심하고 뭐가 보고 싶은 건데?」
에이몬은 두어 번 더 풀을 누르더니 앞발에 머리를 심드렁히 묻으며 답했다.
「귀찮아. 말 걸지 마.」
「……이런, 씨!」
샨티는 저도 모르게 에이몬에게 달려들 뻔했다. 수장을 향한 본능적인 공포로도 누그러뜨릴 수 없는 격한 분노였다.
하지만 제 꼬리를 꾹 밟으며 저지하는 할라의 만류에 곧 행동을 멈춰 세웠다.
「얻어맞기 싫으면 그냥 참아.」
잠시 이성을 잃을 뻔했으나, 이성을 찾아 생각해 보면 그렇다. 에이몬에게 맞으면 아프다. 그것도 엄청 아프다. 힘만 더럽게 센 놈이라.
털을 바짝 세운 샨티가 앞발로 바닥을 꽝꽝 내리쳤다.
「쟤 도대체 왜 저래?!」
아마 제 친구이자 신수 수장인 에이몬은 세상에 가장 뻔뻔한 짐승일 거다.
남의 집 앞에 찾아와서 할라와의 행복한 시간을 방해하더니, 심심하다고 중얼거리고는, 뭐가 심심하냐고 친절하게 물어 주자 귀찮으니 말 걸지 말란다.
아니, 어떻게 성장하면 저렇게 제멋대로인 성격으로 자라지?!
「우리 둘이 같이 공격해서 저 뻔뻔한 수장을 여기서 쫓아내자!」
샨티가 이빨을 드러내며 진심으로 불만을 터뜨렸다. 할라는 뚱한 표정으로 제 애인을 향해 고개를 내저었다.
「기습 공격으로도 안 될 텐데 대놓고 달려들자고? 죽고 싶어서? 너 혼자 해. 난 안 해.」
에이몬을 향해 달려들 의지 따윈 손톱만큼도 없는 목소리로 할라가 답했다.
신수의 서열은 철저했다.
연장자는 우대해 줬으나 거기까지. 성별과 나이에 상관없이 오로지 힘으로만 서열이 정해졌으며, 그중 에이몬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수장이었다.
비록 성격은 개차반일지라도 현실이 그러했다.
딱 잘라 거부하는 제 애인 할라의 답을 들으며 샨티는 신경질적으로 수염을 실룩거렸다.
「에이몬, 쟤 진짜 왜 저러는 거야?!」
「모르지. 언제는 뭐 쟤 행동이 다 이해가 갔나.」
제멋대로인 신수 중에서도 가장 제멋대로 살아온 에이몬이다.
힘만 덜 셌어도 엄청 맞으며 컸을 텐데 힘이 깡패라 발톱 자국 하나 없이 커서는 결국 수장 자리까지 차지했다.
으, 억울해! 샨티가 꼬리를 신경질적으로 철썩거리며 외쳤다.
「좀 가라, 가! 나도 연애 좀 하자! 우리 신수 후계도 만들어야 할 거 아냐!」
「발정기도 아니면서 후계는 무슨.」
샨티의 흥분에도 에이몬의 답은 더없이 차분했다. 샨티가 기어코 송곳니를 드러냈다.
「내가 발정기는 아니지만, 연애하는 개인적인 모습까지 너한테 다 보여 줘야겠냐? 어?」
「보여 주는 거야 네 맘이지. 왜 나한테 물어.」
에이몬은 화를 내는 제 친구를 향해 심드렁히 답했다. 더없이 느긋하고 차분한 모습에 오히려 샨티는 더 불타올랐다.
「왜 여기 와서 난리야! 심심하면 네 소중한 인간이나 찾아가서 온종일 쳐다보든가!」
그 말에 에이몬의 눈빛이 대번 달라졌다. 언제 무료한 표정으로 누워 있었냐는 듯 자리에서 펄쩍 일어나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낸다.
「그래도 돼?」
「뭐? 뭘?」
샨티는 의아한 얼굴로 멍청하게 반문했다.
뭘 그래도 되냐는 건지. 가서 인간이나 구경하라는 말에 에이몬이 왜 저렇게까지 기뻐하는 거지?
에이몬은 기분 좋다는 표정으로 샨티의 앞뜰을 휙 벗어났다. 샨티의 궁금을 해소해 줄 그 어떤 답도 없었다.
샨티는 멍하니 서서 방금까지 에이몬이 앉아 있던 수풀을 응시했다.
제발 좀 가라고 사정사정해도 심드렁히 무시하던 수장님이 갑자기 자리를 떠나다니 이 무슨 일이래?
「뭐야, 진짜.」
드디어 귀찮은 놈에게서 벗어났다며 기뻐해야 하는데,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어 수염만 실룩일 때였다.
훌쩍 떠났던 거대한 흑표범이 다시 수풀을 가르며 확 튀어나왔다.
「야.」
「왜! 왜!」
휙 달려오는 에이몬을 보며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꼬리를 움츠리며 물었다. 워낙 어디로 튈지 모르는 놈이라 다짜고짜 앞발로 후려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이몬은 후려치는 대신 더없이 당당한 요구를 던져 왔다.
「제르반 반도에 있는 휴양지가 어느 쪽인지 알아 와.」
「제르반 반도? 그게 뭔데. 거기가 어딘데.」
샨티가 목을 휙 뒤로 제쳤다. 이건 또 무슨 난데없는 말이야? 평생 신수의 숲에서만 노닥거리는 신수가 제르반 반도가 어디인지 알 게 뭐냐.
「모르지. 모르니까 네가 가서 알아 오라고.」
「내가?」
「그래. 네가.」
에이몬이 두 번 말하기 귀찮다는 듯 목을 울리며 위협했다. 주름진 콧잔등을 보니 한 번만 더 물으면 송곳니라도 보일 기세였다.
저 깡패 같은 놈!
억울함에 앞발을 꿈지럭대던 샨티는, 결국 꼬리를 축 늘이고 황궁을 향해 터벅터벅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하라면 해야지. 더러워도 해야지. 힘만 무식하게 센 수장님 말씀이신데. 도대체 어디서 뭘 알아 와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우선은 가야겠지.
아무래도 어릴 때 에이몬을 괴롭혔던 죗값을 지금 받는 것 같다. 역시 표범은 착하게 살아야 해.
등 뒤로 에이몬의 느긋한 목소리가 울렸다.
「뛰어.」
「……잇……!」
뒤돌아 에이몬을 휙 노려본 샨티가 발바닥에 불이 나게 뛰기 시작했다.
제르반 반도의 위치고 뭐고 저 막돼 먹은 수장 놈이 원하는 걸 알려 주고 어서 꺼지게 해야겠다!
제발 좀 꺼져 주라!
억울한 열망만이 샨티의 머리를 가득 채웠다.
***
멍하니 거울 앞에 앉은 제 여동생을 향해, 데힐 공작가의 장남 루베로스 데힐 공자가 빙긋 웃었다.
“누가 무어라 해도 가장 빛나는 이는 클레아, 너야. 아름다운 여자는 많으나 너처럼 총명하고 사려 깊은 영애는 흔치 않지.”
“…….”
“어깨를 쭉 펴, 클레아. 황자 전하의 변덕이야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니잖아? 곧 그 시녀에게서 흥미를 잃고 다시 돌아오실 테니 걱정하지 마.”
루베로스의 얼굴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렸다.
분명 제 생각이 맞을 것이다. 매사에 가벼운 라르트 황자는 지금까지 늘 그리 행동해 왔다.
부족함 없이 자란 탓일까. 라르트 황자는 여기저기 얕게 관심을 두는 경우가 많았지만 깊이 빠질 때즈음이면 이미 다른 것에 흥미를 옮긴 뒤였다.
이성 관계 역시 마찬가지. 그 어떤 영애와도 깊은 관계를 가진 적이 없었다.
스쳐 가는 짧은 만남에 그쳤을 뿐, 오로지 제 여동생, 클레아 데힐만이 항상 곁에 있었다.
물론 친구라는 명분이기는 했으나 오랜 시간 눈처럼 쌓인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견고해질 게 분명했다.
한순간 스쳐 지나갈 비루한 시녀 따위와는 다르다.
루베로스 공자는 애처로운 표정인 여동생을 다정히 내려다보았다.
제 동생이 이리 울적해하는 이유는 바로 어제 있었던 일 때문이다.
어제. 주제 모르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시녀를 일으켜 세우고 앉았을 때,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상황이 흘러갔기에.
루시가 조용히 일어나 자리를 피하자, 라르트 황자는 저 역시 느긋하게 일어나며 말을 던져 왔었다.
“루시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 앉아야 할 만큼 여행이 고단했어, 루베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