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
#60화
블론디나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꿈꿔 온 일이 하나하나 이루어지고 있다.
신수의 수장이 되고자 하여 수장이 되었다. 황제의 허락도 받았겠다, 이제 남은 건 자신이 열망하고 바랐던 단 하나의 소원밖에 남지 않았다.
옆에 나른히 누워 있던 샨티가 중얼거렸다.
「기분이 무척 좋아 보이십니다? 수장님도 권력이 좋긴 좋은가 보네?」
하지만 눈을 뜬 에이몬이 형형한 눈빛으로 절 바라보자 찔끔한 샨티는 모른 척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못 하게 해, 말을……. 꿍얼꿍얼 중얼거리는 불평불만을 입안으로 꿀꺽 삼키며.
그러는 사이 황제의 연설이 끝났다.
“-에이몬 아킨 님 아래 제국이 귀속됨을 선언합니다.”
동시에 경쾌한 음악 선율이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경건한 즉위식이 끝나 파티가 시작됨을 알리는 신호였다.
블론디나는, 사람들이 웃으며 담소를 나누기 시작하자마자 자리를 벗어나 에이몬을 향해 달렸다.
“에이몬!”
체신머리 따위 알 게 무어냐. 곧장 그의 목덜미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에이몬은 블론디나가 이렇게 공식적으로 달려들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는지 눈을 끔뻑거리며 굳어 있다가 곧 그녀의 목덜미에 제 뺨을 비비기 시작했다.
응석 부리듯 뺨을 문지르고 어리광 부리듯 파고드는 에이몬의 머리를 끌어안은 채, 블론디나는 기쁘게 말을 전했다.
“축하해, 수장님!”
「……응.」
에이몬의 머쓱한 대답이 작게 울렸다.
늘 당당하고 우아한 신수도 블론디나 앞에서는 이따금 몸집 큰 고양이가 되고는 했다.
짹짹짹. 짹짹. 아까부터 나무 위에 앉아 지저귀던 참새 한 마리가 포르르 뛰어내렸다.
파닥파닥 날갯짓과 함께 내려온 참새는 블론디나와 에이몬 사이를 마구잡이로 파고들었다.
“행사 끝났어요? 응? 이제 에이몬 님 진짜 수장님 된 거야?”
자그마한 머리를 들이밀며 마제또가 외쳤다.
블론디나는 키득 웃으며 작은 참새 목덜미를 손끝으로 슥슥 긁었다.
에이몬과 저 사이를 가르고 밀고 들어와도 에이몬에게 혼나지 않을 존재는 이 작은 참새가 유일할 것이다.
사랑스럽고도 귀여운 날짐승이 부리를 딱딱거리며 외쳤다.
“마제또도 에이몬 님 축하해요! 제국 말고 마제또 지켜 주세요!”
“욕심쟁이 참새 같으니.”
블론디나는 잔잔히 웃으며 작은 참새를 슥슥 쓰다듬었다. 마제또는 제 부리를 블론디나 손등에 비비며 흥겹게 짹짹거렸다.
“네! 그럼 이제 나 쿠키 갖다 주세요! 체리 박힌 거로!”
한편, 귀족들은 웃는 얼굴로 수군거렸다. 시선은 아닌 척 에이몬을 향해 있었다. 자그마한 인간에게 끌어안긴 거대한 표범을.
“황녀님과 신수님 사이가 긴밀하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봐요?”
“예. 일전에 황녀님께서 신수 의식제에 참석하셨는데 그때 친분이 생긴 모양이셔요.”
“얼마 전에는 신수께서 황제 폐하를 찾아오셨다고도 하던걸요?”
“네. 저도 소문 들었어요. 그래서 다들 기대가 크지요? 어쩌면 저 아름다운 신수님들을 황궁에서 자주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이야기를 나누던 귀족들은 고개 돌려 신수들을 응시했다.
당당하고도 우아한 자태의 표범들이 보였다. 제국을 수호하듯 서 있는 그들을 향해 선망의 눈길이 달라붙었다.
“그나저나 정말 아름답네요. 저도 황녀님처럼 가까이서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저는 사실 무서워서 가까이 가지도 못하겠어요. 이렇게 멀리서라도 볼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할래요.”
고귀하고도 신성한 일족이 자신들을 지켜 준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뿌듯한 자부심으로 마음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흥겹고도 기쁜 분위기 속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생각에 잠긴 이가 있었다.
아델라이는 잔을 쥔 채 입안 살을 가만히 물었다. 얼굴에 열이 몰리고 속에서 분이 끓었다.
방금의 제 행동을 떠올려 본다.
저깟 짐승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보였다. 덩치만 큰 짐승에게 위대한 황족이 머리를 조아린 것이다.
더군다나 그 사실에 분노를 느끼는 건 저밖에 없는 것 같아 더욱 분했다.
크게 소리라도 내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건 절대 인정할 수 없는 일이라며.
몸을 맵시 좋게 감싸고 있는 화려한 옷을 꽉 움켜쥐었다.
‘라르트고, 황제 폐하고 모두 저 비루한 짐승에게 홀리기라도 한 게 틀림없어!’
심지어 황제 폐하께서는 일전에 ‘바라한의 후예’를 찾으라며 언질을 주시기까지 하지 않았나. 한데 지금 보이는 저 호의는 무언지.
인정할 수 없었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감정을 눌러 죽이며 술을 마시고 있으려니 웃음기 머금은 라르트 황자가 다가왔다.
“무슨 생각 해?”
기분 좋다는 듯 웃으며, 아델라이의 잔에 제 잔을 장난스레 짠 마주쳤다.
아델라이는 잔을 휙 치워 버렸다.
라르트는 아델라이의 거부에 신경도 쓰지 않으며 느긋하게 웃었다.
“보기 좋지?”
“뭐가.”
“신수님과 블론디나.”
라르트가 잔을 든 손으로 까만 짐승과 인간 여성을 가볍게 가리켰다.
흥. 퍽이나. 아델라이는 속으로 대답을 짓씹으며 입술을 삐죽였다.
에이몬을 칭송하는 자들, 존경하는 자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기가 불편하다. 그건 제 동생인 라르트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짐승이 아무리 강해 보았자 짐승일 뿐. 인간의 힘으로 없애지 못할 이유가 없다.
만약 신수의 수가 조금만 더 적었더라도, 그들이 조금만 더 약했더라도 인간 스스로 힘으로 무너뜨릴 수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신수에게 이렇게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을 느끼지 않았을 수도 있지.
홀로 눈가를 찌푸리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라르트가 어느새 웃음이 지워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무 티 내지는 마, 아델라이.”
“뭐?”
아델라이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라르트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 기울여 눈을 맞춰 왔다.
“황족과 신수의 관계는 이전과 달라졌어. 네가 신수에게 느끼는 감정이 어떻든 상관없이 말이야.”
“…….”
“난 저들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 거야. 그게 차후 황제가 될 내가 할 일이지. 인간의 번영과 안정을 위해 위대한 종족과 손을 잡는 것.”
아델라이는 씨근거리며 라르트의 말을 듣기만 했다.
차후 황제라니. 차후 황제라니.
제 바보 같은 쌍둥이 동생은 아무것도 모른다. 황제 폐하께서 자신에게 어떤 기대를 하고 있는지, 폐하께서 제게 무얼 주셨는지.
무의식적으로 손을 올린 아델라이가 목에 건 황금 열쇠를 꼭 쥐었다.
라르트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아델라이도 웬만해서는 마음 좀 풀어. 이제 자주 볼 사이란 말이야.”
“싫다면?”
아델라이에게서 삐딱한 대답이 나왔다. 하지만 라르트는 어깨를 으쓱이며 여전히 가볍게 대꾸할 따름이었다.
“싫어도 어쩔 수 없어. 이제 곧 신수와 인간이 정말 친밀한 관계가 될지도 모르거든.”
“그게 무슨 뜻이야?”
상체를 숙인 라르트가 아델라이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아델라이 네가 로드슨 공작가와 이어져 권력을 잡으려 하듯, 우리 황족 역시 신수와 피로 이어져 평화를 가져오겠다는 뜻이야.”
“…….”
바보 멍청이가 아닌 이상 라르트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할 리 없다. 아델라이는 눈을 번쩍 뜨고는 다시 에이몬과 블론디나를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에이몬의 몸에 기대앉은 블론디나가, 작은 참새를 매만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뭐? 황족과 한낱 짐승을? 아무리 미천한 블론디나라고는 해도 그래도 황족은 황족이다. 한데 짐승 따위와?!
역사상 인간과 짐승이 이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차마 지를 수 없는 비명을 삼키며, 아델라이는 충격 어린 눈으로 라르트를 응시했다.
라르트가 씨익 웃었다.
“폐하께서도 허하신 일이야. 그리고, 아델라이. 네가 쥔 그 열쇠가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라르트는 아델라이의 목에 걸린 열쇠를 훑으며 담담히 속내를 보였다.
“내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아주 바보 멍청이는 아니거든. 최근 네가 무언갈 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
“…….”
“깊게 파지는 않을게. 하지만 경고하건대…… 내가 꿈꾸는 미래를 망치려 든다면 더 이상 가만있지만은 않을 거야.”
아델라이의 눈망울이 휘청 흔들렸다.
제 쌍둥이의 눈빛에 깃든 협박이 절 향해 오롯이 쏘아지고 있었다.
지금 웃는 낯으로 압박하는 라르트가 제가 알던 그 라르트가 맞는가.
아델라이의 마음속에서 라르트는 늘 팔푼이였다. 황제 자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멍청이였다.
눈치 없이 여기저기 끼어들며 진지함이라는 전혀 모르는 머저리. 그게 바로 제 동생, 라르트였다.
그렇기에 제국을 진정으로 잘 이끌 이는 자신이라고 늘 생각해 왔건만.
언제 이렇게 변한 걸까.
자신이 발견하지 못했던 것인지, 아니면 진실을 억지로 외면했던 것인지.
눈앞에 보이는 동생은 자신이 알던 그 멍청한 라르트가 아니었다. 눈빛 위로 형형한 총기가 맴돈다. 믿을 수 없게도 위압감마저 묻어 있었다.
아델라이가 침을 꼴깍 삼켰다.
라르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난 말했다, 아델라이? 응? 응?”
그리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가볍게 말을 던지며 히죽히죽 웃었다. 지금의 태도로만 보면 여전히 깃털처럼 가벼운 황자가 맞았다.
하지만 일순 보였던 그의 날카로운 눈빛은 아델라이 마음을 깊게 파고들었다.
아델라이는 다시 목에 건 황금 열쇠를 꽉 쥐었다.
현실을 뒤집을 패는, 제게 남은 희망은, 이제 이것 하나뿐이었다.
***
시끌벅적하던 신수의 숲 경계선이 적막에 휩싸였다.
모든 인간이 장소를 벗어나고 모든 신수가 숲으로 돌아가자 고요한 침묵만이 남았다.
별궁 창 아래로, 차근한 달빛이 내려앉았다. 뜨거운 물에 씻고 나온 블론디나는 노곤한 몸을 늘이며 까만 털에 몸을 기댔다.
에이몬은 창 아래 웅크리고 있다가 블론디나가 기대기 편하게끔 몸을 더욱 낮추더니 꼬리로 그녀의 발목을 슬쩍 문질렀다.
살랑살랑 살갗을 간질이는 감각에 블론디나가 킥 웃었다.
“오늘 멋있더라.”
「뭐가?」
“그냥. 신수들이 한 번에 걸어 나오던 모습이랑…….”
블론디나는 중얼중얼 즉위식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까만 꼬리가 어느새 그녀의 종아리까지 휘감겼다.
무릎 뒤를 건드리며 올라오다가 드레스 안으로 더욱 깊숙이 파고든다.
“간지러워. 아무튼, 네가 앞발로 검을 나뭇가지 부수듯 가볍게 동강 내던 거랑…….”
위로 올라오는 꼬리를 움켜쥐자 에이몬이 진입을 포기했다.
에이몬은 몸을 움직여 슬슬 몸을 뺐다. 계속 중얼거리는 블론디나의 몸 역시 자연스레 움직였다.
블론디나가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짐승의 품에 폭 감싸 안긴 뒤였다.
천장을 바라보며 블론디나는 에이몬의 털을 헤집었다.
“네 친구들 할라와 샨티가 으르렁거리며 포효하던 것도 멋있었어. 넌 왜 그런 거 안 해?”
블론디나의 목덜미에 얼굴을 푹 들이민 에이몬이 향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그런 건 다 수하들이 알아서 하는 거야.」
“음…… 간지러운데, 에이몬.”
짐승의 뜨거운 숨과 털이 살갗을 스쳤다. 간지러움과는 조금 결이 다른 감각이 치밀었으나 블론디나는 그게 무언지 알 수 없어 에이몬의 머리를 쭉 밀었다.
하지만 돌덩이 같은 짐승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거대한 앞발로 블론디나를 끌어당겨 그녀를 제품에 더욱 가까이 묻었을 뿐이다.
「난 안 멋있었어? 응?」
심연을 긁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에이몬이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