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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56화 (56/121)

# 56

#56화

「인간은 어떻게 결혼하는데.」

「무슨…… 무슨 소리야, 그게 갑자기.」

샨티는 부스럭부스럭 일어나 이마에 묻은 흙을 툭툭 털었다. 지금 표범인 제게 인간의 결혼을 묻는 건가?

「결혼 어떻게 하는 거냐고.」

샨티는 여전히 멍청한 표정으로 수염만 쫑긋쫑긋 움직였다. 언제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만 하는 에이몬이기는 하지만 이건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저걸 물으려고 할라와 노닥거리는 내 목을 물고 질질 끌고 나왔다는 말이야? 내가 뭘 안다고? 인간에 대해 아는 건 그들이 약해 빠졌다는 것 하나뿐인데?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침엽수가 끝을 모르게 뻗어 있다. 그 사이로 휘도는 바람이 한바탕 돌개바람을 일으켰다.

에이몬은 제 앞에서 빙글빙글 도는 나뭇잎을 퍽 내리치더니 짜증 난다는 듯 되물었다.

「넌 연애하잖아. 할라랑.」

「어. 하지.」

「짝짓기도 할 거잖아.」

「이미 했는데.」

뚝뚝 던져지는 에이몬에 질문에 샨티는 습관적으로 답했다.

「어떻게 했는데.」

「어?」

지금 짝짓기를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묻는 건가?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그건 너무도 개인적인 질문 같은데…….

설마 진짜 그 방법을 몰라서 묻는 건가? 우리 수장님이 이 숲에서 가장 순수한 동물인 건가?

진지한 얼굴로 설명을 자세하게 해줘야 하는 건지 고민하던 샨티는,

「결혼 몰라? 그럼 연애는 어떻게 시작했냐고.」

에이몬의 송곳니가 신경질적으로 드러나자 번뜩 정신을 차렸다.

저건 경고였다. 한 번만 더 멍청한 반응을 보이면 땅바닥에 패대기쳐 버리겠다는.

‘깡패 같은 놈이 힘만 세가지고. 난 또 짝짓기 방법도 모르는 백치 짐승인 줄 알았지.’

샨티는 속으로 불평을 속삭이며 되지도 않는 소리를 주절주절 나열하기 시작했다.

「우선 할라한테 고백했고, 할라한테 예쁜 사슴뿔도 갖다 줬고, 할라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산딸기도 이만큼 따서 갖다 드-.」

하지만 샨티는 말을 끝까지 끝마치지 못했다. 그의 말을 듣던 에이몬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훌쩍 뛰어 바람같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갖다 드렸다고…… 하려고 했는데…….」

이미 텅 비어 버린. 한때는 에이몬이 서 있던 제 앞을 바라보며 허망하게 말끝을 흐렸다.

그러다 이내 에이몬이 완벽하게 멀어졌을 시간이 되자 앞발로 바닥을 꿍꿍 내리쳤다.

에이몬의 제멋대로인 성향이 하루 이틀도 아닌데 당할 때마다 분한 것도 참 이상한 일이다.

「저 나쁜! 대답도 제대로 안 들을 거면서 왜 물어봐? 수장이면 다야?」

하지만 에이몬이 들을까 무서워 아주 작게 속삭이는 건 잊지 않았다.

졸지에 한 마리 참새와 한 마리 표범에게 원망을 들은 에이몬은 바람같이 내달렸다.

블론디나의 아버지, 그러니까 제국의 황제가 있는 황궁을 향하여.

황궁 사냥터에 도착하자마자 에이몬은 인간으로 변했다. 괜히 표범 모습으로 어슬렁거리면 이목만 집중되고 귀찮아진다.

나뭇잎 사이로 기분 좋게 내리쬐는 햇살 아래를 느긋하게 걸었다. 한참이나 걸었는데도 궁이 워낙 넓어 그런지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늘 블론디나의 별궁만 방문했기에 황제가 사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을 리 만무.

에이몬은 물뿌리개를 들고 지나가던 하인 하나를 발견하고 그를 불러 세웠다.

“이봐.”

“예.”

물뿌리개를 든 하인이 공손히 대답하며 몸을 돌렸다.

황궁 안을 돌아다니는 이들은 보통 두 종류로 나뉜다. 남을 내려다보는 자와 남을 올려다보는 자.

물뿌리개를 든 자신은 누군가를 올려다보는 자였고, 제게 자연스레 하대하는 상대는 분명 누군가를 내려다보는 자가 확실했다.

황궁을 드나드는 이의 신분이나 정체를 모두 알 수는 없으나, 상대의 목소리에 자연스러운 고압감이 묻어 있는 것으로 보아 확실했다.

“황제는 어디에 살지?”

그 말에 하인은 깜짝 놀라 어깨를 들썩였다.

감히 ‘황제는’ 어디에 사느냐고 묻다니?! 제국을 통틀어, 아니, 대륙을 통틀어 황제를 하대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다.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국가가 아테스 제국이었으며, 아테스 제국에서 가장 위대한 이가 황제였다.

“네놈이 감히!”

하인이 분노한 얼굴로 고개를 번뜩 들었다. 감옥에 갇혀 채찍질당해야 할 무엄한 이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에이몬의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살랑 흔들리는 것과, 그 사이로 보이는 여유로운 보랏빛 눈동자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바닥에 넙죽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위, 위대하신 신수님을 뵙습니다!”

분명하다. 분명했다. 저 번뜩이는 눈동자에 새겨진 위압감을 보건대 신수님이 확실하셨다.

황궁 외곽에 신수님께서 가끔 드나든다는 이야기는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황녀님, 라르트 황자님과 친분이 있어 이따금 방문하신다나.

하지만 이렇게 딱 마주칠 줄이야.

인간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인간이 아니었기에 황제 폐하를 감히 황제라 칭할 수 있던 것이었다.

심지어 자신은 그 신수를 향해 네놈이라 칭하며 꾸짖으려 하기까지 했다. 혹여 신수님께서 절 죽이시거나 하는 건 아닐까.

물밀듯 두려움이 닥쳤다.

무심히 하인을 내려다보던 에이몬이 느릿하게 되물었다.

“그래서…… 황제가 사는 곳은?”

에이몬으로서는, 그저 황제가 어디에 있냐고 물었을 뿐인데 갑자기 겁에 질린 얼굴로 넙죽 엎드린 인간이 의아할 따름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은 참 이상한 존재였다.

하인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뒤를 향해 공손히 손짓했다.

“저곳, 가장 첨탑이 높은…… 저곳에 폐하께서…….”

에이몬은 하인의 손짓을 따라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나지막이 웃었다.

드디어 찾았다.

황제궁은 첨탑에 꽂힌 깃발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다.

에이몬은 여전히 엎드린 하인을 향해 고맙다고 전하고는 자리를 휙 벗어났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하인이 슬쩍 고개를 들어 멀어지는 신수를 응시했다. 거대한 흑표범 한 마리가 단단한 근육을 움직이며 황제의 궁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곧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치 홀린 듯 에이몬의 뒷모습을 좇았다. 눈빛에 어렸던 공포심은 어느새 씻겨 나가고 남은 건 경외심뿐이었다.

“와…… 정말…… 와아…….”

경탄을 보내던 그가 급하게 발을 놀리기 시작했다.

오늘 신수님을 뵈었노라고, 그중에서도 수장인 흑표범을 보았노라고, 소문대로 거대하고 아름다운 표범이었노라며 마구 자랑할 심산이었다.

‘인간 모습으로 걸어왔으면 온종일 걸릴 뻔했잖아.’

어느새 가까워진 황제궁을 바라보며 에이몬은 목을 그르렁 울리며 흡족해했다.

인간의 궁이라 하여 얕봤더니 신수의 숲에 맞먹게 광대한 크기 아닌가. 표범으로 태어나기를 잘했지.

커다란 나무 기둥을 지나며 아주 자연스럽게 다시 인간형으로 변했다. 언제 네 발로 달려왔냐는 듯 두 발로 천천히 느긋하게 황제궁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지나던 사용인들이 허리 숙여 그를 향해 예를 보였다. 에이몬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 오만한 태도와 표정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마치 황궁에서 평생 산 이 같아 보였다.

때마침, 황제궁에는 타국에서 온 사신들이 가득했다.

속국, 우방국, 동맹국 등, 제국과 연이 있는 왕국의 사절단이 모두 모여 제국에 바칠 공물의 양을 정하고 향후 1년간의 외교 방향을 정하기 위함이었다.

제국에서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연례행사였다.

황제의 홀 앞, 분수대. 마흔 명도 넘는 사절단 대표가 모여 작게 마련된 파티 테이블 주위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왕국의 이름이 불리면 차례차례 들어가 황제와 면담을 한 후 다시 이곳으로 오면 되는 것이었다.

서로를 남몰래 견제하는 동시에 제 왕국을 적당히 뽐내며 눈치껏 대화를 이어 갔다.

에이몬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 틈에 섞여 있었다. 황제의 홀로 향하는 에이몬을, 길을 지나던 시종이 아주 자연스럽게 이곳으로 안내해 주었기 때문이다.

황궁에서 본 적 없는 이. 제국에서는 흔히 보기 힘든 검은 머리와 자홍빛 눈동자.

이곳이 황궁 외곽이었다면 머리 색과 눈동자 색만으로 에이몬이 ‘신수’임을 쉽게 알아차렸겠으나, 이곳은 온갖 머리 색과 이질적인 외양의 사절단이 가득한 장소였다.

붉은 머리, 푸른 머리, 밤색 눈, 녹색 눈, 하얀 피부, 붉은 피부. 생김새가 다들 현란하고도 다양했다.

그렇기에 ‘황궁을 산책하시다가 길을 잃으신 사절단이로군.’이라고 판단한 시종이 아주 공손히 에이몬을 이 파티장에 데리고 온 것이다.

아주 착하게 시종을 따라온 에이몬은, 곧 분수대 앞 야외 파티장에 도착했다.

“그럼 저는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즐거운 방문 되시기를.”

그리고 마지막 인사를 전하는 시종에게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테이블 위 체리파이를 집어 먹기 시작했다.

‘내가 누군지 아는 건가? 인간이란 참 신기해. 황제를 만나려면 늘 이렇게 여기서 기다리면 되는 건가?’

인간의 법도를 몰랐기에 우선 에이몬은 하라는 대로 하기로 했다. 여기서 기다리라 하니 착하게 기다렸다가 황제를 만나면 될 것.

어쨌거나 황제는 블론디나의 아비였기에 그를 무시하거나 험한 행동을 보일 생각은 없었다.

제아무리 제멋대로 살아왔다고는 해도 마음을 얻고자 하는 이의 아비 되는 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기본 상식 정도는 있었기에.

황제의 홀 문 앞에 서 있던 시종이 크게 외쳤다.

“오라핀 왕국에서 온 사절단은 이곳에서 입장을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분수대 앞에서 하프를 연주하던 여인이 반가운 얼굴로 홀 앞으로 다가서기 시작했다.

에이몬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다시 체리파이를 하나 더 집어 들었다.

‘난 언제 불리려나. 오래 기다리기 싫은데 모두 꺼지라며 다 부숴 버리고 황제 보러 들어가는 건 역시 안 되겠지.’

눈을 예쁘게 내리깐 채 흉포한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스윽, 옆에 커다란 그림자 하나가 붙어 왔다.

에이몬보다 살짝 작은 키에, 우락부락한 승모근과 돌덩이 같은 팔뚝을 가진 커다란 사내였다.

에이몬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전 타르칸에서 온 마하린이라고 합니다.”

입꼬리를 시원하게 끌어 올린 사내가 제 어깨로 에이몬의 어깨를 툭 쳐왔다. 물론 에이몬은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제 어깨를 힐끗 내려다본 에이몬이 사내를 향해 조용히 시선을 들었다.

에이몬의 눈을 마주한 사내는 저도 모르게 찔끔하여 턱을 아래로 움츠려 내렸다. 본능적인 위협이 느껴진 까닭이다.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내젓고는 어깨를 쭉 폈다.

그는 타르칸 민족 출신이었다. 사냥을 사랑하는 타르칸족은 특유의 커다란 체구와 강한 힘으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 때문에, 에이몬의 몸집과 풍기는 기운을 보고 흥미가 생겨 가까이 다가온 참이었다.

마하린이라고 절 소개했던 사내가 다시 씩 웃었다.

“한 번도 뵙지 못했던 것 같은데, 혹시 어디서 오신 누구십니까?”

서로가 서로를 소개하며 친분을 쌓는 건 일반적이었기에, 마하린은 쉽게 에이몬의 정체를 물었다.

에이몬은 ‘타르칸에서 온 마하린 티샬라라고 합니다.’라고 했던 그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 역시 비슷한 답을 간단히 뱉었다.

“숲에서 온 에이몬 아킨.”

신수의 숲에서 왔으니 맞는 답이기는 했다. 비록 인간이 아닌 신수라는 말은 생략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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