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곱게 키웠더니 짐승-53화 (53/121)

# 53

#53화

에이몬의 머리카락 위로 석양빛이 반짝이며 흩어졌다.

늘 장난스럽고 느긋하게만 보였던 에이몬이 짐승의 오싹한 안광을 눈동자 속에 시리게 담고 있었다.

블론디나는 마치 홀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언어가 낯설었다. 그가 하는 말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다.

유혹하는 듯 던져지는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마법에 걸린 것같이, 정신없이 홀린 사람같이 고개를 끄덕였을 뿐.

에이몬의 눈이 마치 사냥감을 앞둔 짐승의 눈동자처럼 위험하게 잠겼다.

뜨거운 손이 그녀의 입술을 조심스레 더듬었다. 블론디나의 뺨에서부터 귓가까지 빠짐없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손끝이 스치는 부위마다 열꽃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길고 섬세히 뻗은 손가락이 블론디나의 아랫입술을 살짝 눌렀다. 붉은 입술 사이로 작은 틈이 생겼다.

얼굴 위로 새까만 그림자가 드리워진 건 그와 동시였다.

‘아…….’

블론디나는 그의 옷을 꽉 움켜쥐었다. 공들여 빚어진 것같이 고운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두 입술이 천천히 맞물렸다. 촉, 하고 물기 어린 소리가 자그맣게 울렸다.

그는 마치 바스러지기 쉬운 설탕 과자를 문 듯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입술과 입술이 스치고 뜨거운 숨결이 오갔다. 차마 안으로 들어서지 못한 혀가 입술을 핥으며 빨아당겼다.

그때까지 블론디나는 눈을 감지 못했다. 옷깃을 붙든 손이 잘게 떨려 왔다.

블론디나의 긴장을 알아챈 걸까. 에이몬은 입술을 맞댄 채로 가볍게 웃었다. 그의 입꼬리가 미끄러져 올라가는 감각이 느껴졌다.

에이몬의 우아한 속눈썹이 가볍게 움직이는가 싶더니 곧 고요한 시선이 맞닿아 왔다.

블론디나의 시야가 어둑해졌다. 에이몬이 그녀의 눈을 손바닥으로 덮어 온 것이다.

시야가 가려지자 오히려 감각이 선명해졌다.

쪽, 쪽, 간지러운 소리가 울렸다. 입술이 살짝 맞붙었다가 떨어지고 혀끝이 닿았다가 멀어졌다.

블론디나의 눈을 덮었던 손이 내려와 왼쪽 뺨을 감쌌다. 그녀의 오른뺨 역시 에이몬의 다른 쪽 손이 단단히 움켜쥐었다.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두 뺨을 한가득 감싸 쥐고 고개를 슬며시 비틀었다.

서로의 입술이 틈 없이 맞물렸다. 콧등과 콧등이 맞닿고 뜨거운 뺨이 스쳤다.

“으응…….”

블론디나는 녹아내린 신음을 뱉었다.

떨리는 손을 뻗어 그의 허리에 두르자 손아래 느껴지는 짐승의 열기가 뜨거웠다.

‘꿈일까. 꿈인 걸까. 꿈이 확실해. 꿈이 아니라면 이런 행복한 일이 있을 수 없어.’

블론디나는 눈을 더욱 꼭 감았다.

에이몬은 움찔 떨리는 블론디나의 입술을 핥다가 벌어진 사이를 혀로 문질렀다.

블론디나의 몸이 뒤로 휘청 흔들렸다. 입술이 닿을 때마다 발끝부터 전율이 내달리는 것만 같았다.

차라리 거칠게 몰아붙이면 나을 텐데, 감질나고 간질거리는 입맞춤은 마치 해소되지 않는 갈증 같았다.

달뜬 키스만 느릿하게 쏟아 내던 에이몬이 블론디나의 다리 사이로 한쪽 무릎을 끼워 넣었다.

몸이 꽉 맞붙고 체온이 겹쳐졌다. 둘 사이 맴도는 열기가 뜨거웠다.

그의 손이 블론디나의 턱을 살짝 눌렀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이 자연스레 벌어지자 뭉근하게 혀를 밀어 넣었다. 달뜬 호흡이 섞이고 젖은 살이 겹쳐졌다.

입안을 부드럽게 헤집는 온기가 너무도 선명해서, 블론디나는 마치 불덩이를 통째로 삼킨 기분이 들었다.

달콤한 사탕을 녹여 먹듯 에이몬은 그녀의 혀를 문지르고 비볐다.

부드럽게 빨아올리고 감을 때마다 예민한 살덩이가 엉기고 마찰했다.

낯선 감각으로 블론디나의 솜털이 오싹 곤두섰다. 도망가듯 물러나자 에이몬이 더욱 끌어당겨 안을 헤집었다.

블론디나에게서 여린 신음이 샜다.

그가 점막을 부드럽게 쓸고 안으로 혀를 밀어 넣을 때마다 물기 어린 소리가 울렸다.

단단한 가슴팍에 눌려 몸이 천천히 쓰러졌다. 향기로운 풀 내음이 피어올랐다.

머릿속이 열기로 휘돌아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블론디나가 할 수 있는 건 에이몬을 더욱 꽉 끌어안는 것밖에 없었다.

두근두근. 심장박동이 울릴 때마다 제 몸도 움찔움찔 떨려 왔다.

부드럽고도 다정한 입맞춤이었다.

등을 쓸어내리던 에이몬의 손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오목하게 들어간 허리 곡선을 은근히 매만지고 살살 문질렀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었던 블론디나의 몸이 부드럽게 풀리자, 봉긋 솟은 가슴 아래까지 다다랐다.

그 손길의 명확한 목적을 파악한 블론디나는 몸을 일순 굳혔다.

애초에 에이몬을 거부할 생각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이성과 맞닿은 적 없던 몸은 주인의 의사와 다르게 그를 서투르게 밀어냈다.

블론디나가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리자 가슴 아래 맴돌던 손이 다시 떨어졌다.

에이몬은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고는 가슴 대신 그녀의 두 뺨을 감싸 쥐었다.

얼굴을 슬슬 쓸어내리고 느릿하게 혀를 맞붙였다. 놀라게 해 미안하다는 듯,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조심스럽고도 부드럽게.

한참이나 사과하듯 다정히 입 맞추던 그가 천천히 입술을 떨어뜨렸다.

얽혔던 혀가 풀리고 겹쳤던 살갗이 멀어졌다. 질척한 소리와 함께 입술 사이 틈이 벌어졌다.

블론디나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닿을 듯 말 듯 은밀한 거리에 에이몬이 있었다.

촘촘하게 드리운 고운 속눈썹 아래 보이는 눈동자가 느슨히 빛난다. 그 예쁜 눈동자에 의미 모를 감정이 뒤엉켜 있는 것 같았다.

“…….”

“…….”

여운 섞인 숨이 느릿하게 맴돌았다.

에이몬은 블론디나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다가 쪽, 하고 기습적으로 입을 맞췄다. 아주 장난스럽고도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꽃잎 같은 키스였다.

블론디나의 어깨가 다시 덜컥 흔들렸다. 아까의 열기가 가시지도 않았는데 달콤한 디저트처럼 따라온 키스로 정신이 없었다.

에이몬의 눈꼬리가 예쁘게 휘었다. 녹아내릴 듯 사르르 웃으며 그가 속삭였다.

“이번엔 정말 위험할 뻔했어, 브리디.”

에이몬은, 뒤엉키느라 흐트러진 블론디나의 머리카락을 슬슬 쓸어 올렸다. 그런 후 엉켜 있는 붉은 꽃잎을 느릿하게 떼어 냈다.

“넌 인간이니까 천천히 하자. 네가 아파하는 건 싫으니까.”

“응…….”

뭐가 뭔지도 모르고 블론디나는 꿈결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등을 천천히 끌어안고, 온몸으로 그녀를 감싸 안았다.

블론디나의 귓가에 에이몬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파고들었다.

“넌 늘 따뜻해.”

“…….”

블론디나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아찔하고 어질한 감각으로 정신이 없었다. 키스의 열기가 아직 안에 뜨겁게 고여 있었다.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목덜미에 뺨을 문지르며 다시 느릿하게 속삭였다.

“네 살은 왜 이렇게 부드럽지, 브리디…….”

꽃향기가 취할 것처럼 밀려들었다. 목덜미에 닿는 에이몬의 체온이 뜨거워 견딜 수가 없었다.

***

블론디나는 침대에 풀썩 누웠다.

뜨거운 욕탕에 한참이나 있었던 탓일까. 몽롱한 열기가 몸 주위를 아지랑이처럼 감싼 것만 같았다.

눈을 느릿하게 감고는 손끝으로 입술을 더듬었다. 알 수 없는 감각이 눅눅하게 침전된 기분.

에이몬과의 키스 이후, 블론디나는 계속 이 상태였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미열이 배 아래 고여 있는 것만 같은.

‘어떡해. 어떡하면 좋아.’

속이 다시 달아올랐다.

괜히 고개를 휙휙 내저으며 신수의 숲을 떠올렸다. 그의 잔상을 지워 내기 위함이었다.

나무 사이에 보이던 주홍빛 노을. 머리카락을 휘감고 지나던 향기로운 바람…….

하지만 그보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건 몰래 훔쳐보았던 에이몬의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좋긴 너무 좋은데…… 갑자기 왜 그렇게 짐승이 됐냐는 말이지…….’

수면 위로 참방참방 의문이 튀었다.

에이몬은 분명 루시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어째서 상황이 이렇게 된 건지 잘 모르겠다.

모두 오해였던 걸까. 내가 무언가를 착각하고 있던 걸까.

절 내려다보던 따뜻한 눈빛은 진짜였다. 제게 입 맞추던 부드러운 입술도 진짜였다. 제 몸을 끌어안고 속삭이던 목소리 역시 진짜였다.

모두 진심만이 가득한 행동이었다.

그래서 더욱 알 수가 없었다.

“인간하고 짐승은 좀 정조 관념이 다른가……?”

그건 그거대로 좀 싫은데.

블론디나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손바닥 틈새로 실없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짐승의 정조 관념이 이렇든 저렇든, 우선 오늘 밤은 행복했다.

***

날이 좋았다. 환하게 피어오르는 뭉게구름 사이로 해가 모습을 숨겼다가 드러냈다.

루시는, 멍한 표정으로 차를 마시는 블론디나를 가만히 주시했다.

흥미 가득한 눈길로 그녀를 훑다가 종내에 치미는 궁금증을 참을 수 없는지 입을 열었다.

“황녀님.”

“…….”

“황녀님?”

“……응?”

두 번이나 불리고서야 블론디나는 겨우 답했다.

반쯤 정신이 나간 것 같은 모습이 된 연유는 뻔했다. 에이몬과 벌였던 일련의 사건 때문이다.

그 열기를 잊기에 블론디나는 너무나 순수했고 동시에 무지했다. 쉬이 잠을 이루지 못해 밤새 뒤척거릴 정도로.

첫 키스의 위력은 순진한 소녀에게 너무나 강력했다.

한편, 찻잔을 치워 낸 루시는 테이블 위로 상체를 드리웠다.

분명, 어제 에이몬 님을 만나러 신수의 숲으로 간다고 하셨던 황녀님이다. 마제또를 어깨에 태우고는 의기양양하게 떠나가셨었다.

그리고 현재. 에이몬 님을 만나고 온 황녀님의 태도가 퍽 이상해졌다.

무얼 상상하는지 홀로 목덜미를 발갛게 물들이기도 하고, 입술을 꾹 물며 고개를 휘젓기도 했다.

그쯤 되자 루시는 알아채고야 말았다.

‘에이몬 님과 무언가 있었구나!’

비실비실 치솟는 미소를 숨기고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에이몬 님은 잘 만나고 오셨어요?”

“잘 만날 게 뭐 있어. 평소랑 똑같지.”

더듬더듬 블론디나가 답했다.

루시는 확신의 미소를 지었다.

‘확실해!’

무언가 모종의 사건이 벌어진 게 뻔했다.

황녀님과 누구보다 가까웠던 상대가 본인 아닌가. 평소와 다른 황녀님 모습에서, 전과 달라진 신수님과의 관계를 알아채는 건 손쉬운 일이다.

궁금한 것도, 알고 싶은 것도 많았다. 하지만 루시는 굳이 입 열어 묻는 대신 테이블 위로 올라온 블론디나의 손을 꼭 잡았다.

전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스럽고 충실한 시녀예요. 자랑거리나 할 말이 있으면 제게 털어놓으세요. 그런 눈빛을 강하게 올렸다.

그리고 그 눈빛이 통한 모양이었다.

블론디나는 이미 다 식어 버린 찻물을 단숨에 마신 후 입을 열었다. 무언가를 털어놓으려는 듯.

하지만 누군가의 방문을 알리며, 문밖에서 들려오는 하녀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다시 입을 다물고야 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