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52화
「그런데 너 냄새 좋다. 맛있는 냄새 나.」
“…….”
블론디나의 얼굴이 금방 파리해졌다.
안 그래도 표범이 제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탓에 잔뜩 긴장해 있었는데 맛있는 냄새가 난다니?
에이몬은 자신의 오랜 친구라 믿을 만하지만, 샨티는 아니다. 저 신수는 분명 고기를 먹는 짐승이었다.
블론디나는 마제또를 휙 잡아채어 얼굴 가까이 갖다 대고는, 샨티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이며 물었다.
“마제또. 혹시 신수가 인간 먹는 거 본 적 있어?”
“모르겠어욧! 인간 향수 냄새를 싫어한다고 하는 건 들었는데!”
블론디나가 속삭인 것이 무색하게도, 둘의 대화를 알아들은 샨티가 툭하니 말 사이에 끼어들었다.
「인간은 안 먹어 봤는데 이 기회에 한번 먹어 봐야 하나?」
“…….”
블론디나는 당황스러움에 입만 뻐끔 벌렸다. 샨티가 크게 웃었다.
「농담이야! 그랬다가 에이몬에게 무슨 꼴을 당하려고!」
누구는 목숨이 오가는데 누구는 저렇게 경박하게 웃다니. 블론디나는 소름 돋은 팔을 쓱쓱 쓸어내렸다.
“샨티. 혹시 에이몬에게 데려다줄 수 있어?”
「어렵지는 않은데 샘에 다녀오면 꼭 에이몬만 이상해져서. 음, 괜찮으려나?」
“뭐가?”
샨티는 장난기 어린 눈으로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앞발로 바닥을 탁 내리쳤다.
「좋아! 재미있는 구경 좀 하지, 뭐! 참새, 너도 타!」
샨티가 신난 얼굴로 무릎을 굽혔다. 등에 타라는 의미 같았다. 블론디나는 약간 머뭇거리다가 이내 샨티의 등에 올라탔고,
“제 이름은 마제또예요! 블론디나 님이 지어 준 이름이라고요!”
항의하듯 외친 마제또 역시 블론디나의 어깨에 포르르 날아와 앉았다.
표범이 풀쩍풀쩍 숲을 내달렸다. 잔 나뭇가지가 스칠 때마다 종아리가 긁혔다. 블론디나는 떨어지지 않으려 샨티의 털을 꽉 움켜쥐었다.
샨티는 숲을 내달리며 계속 말을 걸었다.
「인간은 다 이렇게 가벼워?」
“아마도? 신수보다는 작으니까.”
마주 불어오는 바람이 시렵다. 블론디나는 눈을 찡그리며, 애써 답했다.
하기야 에이몬은 그 앞발만 해도 무게가 상당하니…… 신수가 느끼기에 제 무게가 몹시 가볍게 느껴질 것 같기는 하다.
「에이몬하고는 언제 만났어? 의식제 때 처음 본 건 아닐 거 아니야.」
“그냥 어릴 때 어쩌다가 친해졌어.”
블론디나의 답에는 성의가 없었다. 샨티의 등에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샨티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태생부터 수다스러운 타입 같았다.
「혹시, 너 이게 다 큰 거야? 네가 이렇게 작고 조그매서 에이몬이 아직 각인하지 않은 건가?」
나 그렇게 안 작은데. 다 컸는데. 너희 신수가 무식하게 큰 거지. 블론디나는 그리 생각하며 되물었다.
“각인이 뭔데?”
「뭐?! 너 아직 각인이 뭔지도 몰라? 에이몬이 아직 안 한 이유가 있었네!」
“…….”
표범의 뜀박질이 더욱 빨라졌다. 블론디나는 그의 털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대화 내용은 제대로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몸이 흔들렸다.
에이몬이 태워 줄 때엔 이렇지 않았는데. 늘 블론디나를 배려하느라 미끄러지듯 달렸던 에이몬의 배려가 새삼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블론디나의 머리카락을 발로 꽉 움켜쥐고 있던 마제또가 외쳤다.
“아이고! 아이고오! 참새 죽네!”
그리고 결국 흔들림을 견디지 못했는지 허공 위로 파라락 날아올랐다.
“마제또 갈 거야! 다음에 봐, 블론디나 님!”
……진작 날아가지 그랬어, 마제또. 블론디나는 하늘을 나는 마제또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다시 표범 털을 움켜쥐었다.
빠르고 안전한 이동수단이라 좋기는 한데, 몸은 너무도 불편했다.
샨티 등에 대롱대롱 매달려 끙끙거리노라니 어느새 도착한 모양이다.
「다 왔어, 인간! 아 참, 아까 이름이 뭐라고 했지?」
샨티가 무릎을 굽히며 물었다. 그새 까먹은 모양이다.
들썩거리고 오느라 헛구역질이 올라온 블론디나는, 샨티 등에서 내리며 입을 꽉 막고 웅얼웅얼 답했다.
“블론디나 륜 아테스. 에이몬은 날 브리디라고 불러.”
「그렇구나, 브리디!」
블론디나는 메슥거리는 숨을 삼킨 후 구겨진 드레스를 정리했다. 샨티의 털과 나뭇잎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팔랑팔랑 날리는 가느다란 갈색 털을 응시하는데, 누군가 달려와 샨티를 휙 덮쳤다.
쿵! 짐승의 몸이 넘어갔다. 샨티를 후려친 에이몬이 앞발로 그의 머리를 꽉 누른 것이다. 바닥에 머리를 박은 샨티가 끙끙거렸다.
깜짝 놀란 블론디나는 나무 기둥에 답삭 붙었다.
“꺅!”
갑자기 뒤엉킨 두 표범의 체구 차이가 확연했다. 거대한 흑표범의 발 아래 납작하게 깔린 샨티는, 켁켁거리며 인사를 건넸다.
「수장님, 왔어?」
목을 꽉 누른 에이몬 때문인지 샨티의 목소리가 몇가닥으로 갈라졌다. 차게 식은 시선이 샨티를 해체할 듯 쏟아져 내린다.
하지만 공격당하고 있음에도 어쩐지 그리 겁먹은 것 같지는 않았다. 마치 에이몬의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샨티가 꼬리를 흔들며 하소연하듯 외쳤다.
「왜 다짜고짜 화를 내! 내가 저 브리디라는 인간을 사냥해 온 것도 아닌데!」
「…….」
「너 만나러 온다고 숲 헤매고 있길래 친절히 안내해 준 거란 말이야!」
그제야 샨티를 제압했던 에이몬의 힘이 슬쩍 풀렸다.
샨티는 그 틈을 타 버둥거리며 에이몬을 밀쳤으나 돌덩이 같은 에이몬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에이몬이 으르렁거리며 읊조렸다.
「네가 뭔데.」
「어?」
「네가 뭔데 그렇게 불러.」
목을 누르는 힘이 다시 묵직해졌다. 에이몬이 더욱 꽉 절 누르자 샨티는 앞발을 힘겹게 버둥거렸다.
「아파! 윽! 아프다고!」
「블론디나야.」
에이몬의 눈빛이 당장 목을 물어 올 것처럼 파르스름하게 빛났다.
「뭐?」
「블론디나라고.」
그제야 에이몬의 말 뜻을 알아챈 샨티가 캑캑거리며 외쳤다.
「뭐야! 그거였어? 알겠어! 네 애칭 안 쓰면 되잖아!」
샨티의 답에 그제야 에이몬의 힘이 풀렸다.
에이몬이 힘을 거두자마자 샨티는 온 힘을 다해 자리를 벗어났다. 뒤로 한참이나 풀쩍 뛰어 에이몬과 거리를 벌린 후 겨우 숨을 내쉬었다.
힘으로는 안 돼도 달리기 속도는 빠르니 이 정도 거리면 달아날 수 있을 거다.
「깡패!」
「…….」
「이 깡패 같은 놈!」
원망을 담아 외쳤다. 에이몬은 별다른 반응 없이 빤히 바라만 봤다. 그리 날카로운 눈빛도 아니건만, 샨티는 괜히 찔려 다시 소리쳤다.
「왜! 뭐!」
「…….」
에이몬은 여전히 침묵이었다. 마치 눈빛으로 얻어맞은 듯, 흠칫 물러선 샨티가 앞발로 바닥을 긁으며 꿍얼거렸다.
「애초에 저러는 거 구경하고 싶어서 오긴 했는데…… 그래도 너무한 거 아니야? 아무튼 수장님 소유욕 때문에 블론디나인지 뭔지 하는 인간만 죽어나게 생겼어.」
혼자 화내고, 혼자 꿍얼거린 샨티는 그렇게 혼자 풀숲 너머로 사라졌다. 꼬리 뒤로 누구도 듣지 않는 하소연이 따라붙었다.
내가 무서워서 피하냐. 수장이라서 피해 준다, 내가. 참나…….
우중충한 중얼거림이 점점 멀어져 갔다.
에이몬의 저택 앞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덤불 앞. 둘만 남은 공간 속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늘, 브리디! 하고 뛰쳐 들어오거나. 우선, 제 몸부터 들이밀며 비비적거리던 에이몬이었는데. 태산같이 커다란 몸으로 우쑥 서 있는 표범이 오늘따라 세상에서 제일 낯선 존재처럼 느껴졌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이 위압감은 무얼까. 블론디나는 한 걸음, 한 걸음 그를 향해 걸어갔다.
오후 볕이 꽃덤불 위에 맴돈다. 환히 피어오르는 빛 속의 아름다운 짐승을 향해, 블론디나는 거리를 좁혔다.
“에이몬. 나 혹시 여기 오면 안 되는 거야?”
「…….」
에이몬이 대답 없이 절 가만히 응시하자, 블론디나는 긴장감으로 아랫입술을 핥았다. 살짝 나왔다 사라지는 붉은 혀끝을 에이몬은 시선으로 따랐다.
“왔는데 인사도 안 해주고…….”
블론디나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의 턱과 뺨 사이를 천천히 문질렀다. 어쩐지 불청객이 된 것 같아 행동에 주저가 일기는 했으나, 에이몬은 늘 쓰다듬어 주는 걸 좋아했으니까.
에이몬은 나직한 숨을 내뱉고는 그녀 손바닥에 제 뺨을 비볐다. 만약 샨티가 봤더라면 얼빠진 얼굴로 입을 떡 벌렸을 게 뻔한 어리광이었다.
「그게 아니라…… 위험해서.」
에이몬은 눈을 감고 계속 비비적거렸다. 저와 맞닿은 체온이 기분 좋아 견딜 수 없다는 듯.
에이몬이 낮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치미는 감정을 홀로 삭여 내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손길이 스칠 때마다 에이몬의 눈동자에 열기가 고여 갔다.
“뭐가 위험한데?”
「내가, 네게.」
나지막하게 읊조린 에이몬이 그대로 눈을 감았다.
블론디나의 손에 닿던 검은 털이 사라졌다. 어디서인가 향기로운 미풍이 부는가 싶더니, 블론디나 앞에 서 있는 건 커다란 짐승이 아닌 어깨 넓은 미청년이었다.
에이몬의 몸에 눌려, 블론디나는 뒤로 풀썩 넘어갔다.
제 아래 깔린 블론디나를 내려다보며 에이몬이 낮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제어가 잘 안 되거든.”
에이몬의 얼굴에는 무섭도록 감정이 없었다. 침전된 듯 가라앉은 눈동자로 블론디나를 훑을 뿐이다. 블론디나는 그제야 불안한 눈동자를 들었다.
에이몬이 블론디나의 손을 끌어당겨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네 몸에 다른 짐승의 냄새 묻히지 마, 브리디.”
부드러운 목소리와 달리, 에이몬의 분위기는 몹시 음험했다.
몸이 이유 모르게 떨리는 건 아마 저 눈동자 때문일 것이다. 어둠이 짙게 감긴 듯 가라앉은 눈동자가 절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기에.
블론디나의 손날을 살짝 깨물며 에이몬이 말을 이었다.
“이러면 기다리기가 힘들어지잖아.”
블론디나는 손을 허공에 멈춘 채 어색하게 굳었다. 짐승일 때는 쉬이 다가섰으나 인간이 되자 어쩐지 손끝 하나 대는 게 조심스러워진다.
“뭘 기다려?”
아까부터 에이몬은 알 수 없는 말만 했다. 형체가 잡히지 않는, 연기처럼 모호한 말. 그래서 블론디나는 자꾸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에이몬은 그녀의 손목을 휘어잡으며 나른히 웃었다.
“네 몸에 남길 각인.”
그의 눈동자 안에 새빨간 석양빛이 타오르고 있었다. 부드러운 음색이 울려 오는데 이상하게 긴장감이 등골을 타고 올랐다.
맞닿은 손목에서부터 뜨끈한 열기가 퍼지는 것 같다.
에이몬이 슬며시 상체를 기울였다. 블론디나의 얼굴 위로 어둑한 그늘이 졌다. 뿌옇게 피어오르는 마른 빛 속에서, 에이몬은 나직이 웃고 있었다.
에이몬 역시 몸을 낮췄다. 둘의 시선이 가까이 맞닿았다. 블론디나는 긴장감으로 눈을 깜빡이다가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짜 가느다랗게 물었다.
“각인이 뭔데……?”
“그게 뭔지 궁금해?”
잔잔한 호수처럼 낮고 조용한 음색이었다.
가까워진 둘의 거리 때문일까. 블론디나의 심장이 놀랄 만큼 거세게 뛰어 대기 시작했다.
에이몬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밀어 넣어 단단히 깍지 꼈다. 그런 후 천천히 얼굴을 내려 블론디나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각인은 이렇게 몸을 맞대고.”
그의 정적인 시선이 입술에 닿았다. 맞닿은 몸이 뜨겁다.
“체온을 나누면서.”
허리 아래 그의 팔이 휘감겨 왔다. 둘의 몸이 더욱 가까이 붙었다. 입술이 살짝 닿을 정도의 거리 틈으로 달아오른 숨결이 오갔다.
“함께 밤을 보내는 거야.”
“…….”
블론디나는 잠시 숨 쉬는 것을 잊었다.
에이몬의 뜨거운 손이 블론디나의 아랫배를 천천히 문질렀다.
“이 안에 날 새기는 거지.”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어? 귓가에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은밀하게 감겼다. 간지러운 숨결이 맞닿자 블론디나는 어깨를 오싹 떨었다.
감미로운 웃음소리가 짧게 들려왔다.
“내게 각인될 준비가 됐어, 브리디?”
얼굴을 떨어뜨린 그가 시선을 맞춰 왔다. 미소는 부드러웠으나 눈빛은 수렁같이 잠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