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51화
라르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황족과 신수가 연인 사이라……. 심지어 둘은 그 사이를 비밀에 부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제 배다른 누이인 블론디나. 그리고 그의 연인으로 보이는 신수, 에이몬.
블론디나, 에이몬과 제 인연이 불미스럽게 시작됐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블론디나의 별궁을 아무렇지 않게 오갈 수 있을 정도로 친분이 생겼다.
‘차후 황제가 된다면 퍽 도움이 될지도.’
새로운 황제가 되어 자리 잡으려면, 기존 세력의 벽을 넘고 그들과 벌일 기싸움에서 이겨야만 했다. 그 순간, 아마 지금의 인연이 크게 긍정적으로 발휘될 것이다.
그날을 떠올리며 라르트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왜 이렇게 일 처리가 더딘 거야!”
아델라이가 분노한 얼굴로 부채를 내던졌다. 백작의 옷에 맞고 떨어진 부채가 다르락 바닥을 굴렀다.
씩씩거리는 숨이 아델라이의 목 아래까지 차올랐다.
금발에, 금안을 가진 자를 찾는 게 그 무어가 어렵다고. 바라한의 후예를 쉬이 찾을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그리하여 결국 황제 폐하의 신임을 얻을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생각보다 일이 쉽지 않았다. 비밀리에 진행하다 보니 더욱 속도가 더딘 듯싶었다.
백작이 허리 굽혀 부채를 주워 공손히 내밀었다.
“송구합니다, 황녀님. 좀 더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백작이 나간 후, 혼자가 된 아델라이는 부채로 열 오른 얼굴을 부치며 입술을 짓물었다.
며칠 전 보았던 광경을 상기해 본다. 신수와 함께 있던 천한 황녀. 그리고 그 황녀를 바라보던 황제의 눈빛.
이대로는 안 된다. 무언가 사건을 전환할 계기가 필요했다.
블론디나 륜 아테스. 언니이나 제 마음속에서 언니임을 인정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처음부터 싫었다. 한번 거슬리자 블론디나라는 존재가 거슬려 미칠 것 같았다.
처음에는 그녀의 미천한 태생이, 황족의 격을 떨어뜨리는 근본 없는 등장이 싫었다. 그런 주제에 이제 와 고고한 척 우아한 척 황족인 척하는 것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 보았자 피의 반은 천한 평민의 것인데.
“어디서 감히…….”
팍! 기어코 부채를 내동댕이친 아델라이가 거울 앞에 섰다.
“내가 적통자야. 내가 제국의 유일한 황녀라고.”
거울 속의 자신을 가만히 노려보던 그녀는 이내 문 밖을 향해 외쳤다.
“외출 준비해. 로드슨 공작가로 가겠어.”
필립을 방문하려는 것이었다.
비밀스럽게 바라한의 후예를 찾으며, 공식적으로는 로드슨 공작가를 제 손에 넣는다. 그것이 아델라이의 목표였다.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시작하기 위해 아델라이는 제 머리를 빗어 내리는 시녀의 손길을 받아 냈다.
***
“루시. 아무래도 이번 여름 휴가는 평탄하지 않겠어.”
블론디나가 침울한 목소리로 루시에게 말했다. 일전에 루시와 함께 여름 휴가를 가려 계획했는데 며칠 전 절 불러 통보하듯 전하는 황제의 말에 수포로 돌아갔다.
“브리디. 이번에 북쪽 제르반 반도로 여행을 떠날 것이다. 함께 갈 것이니 준비하도록.”
황제가 그리 말해 왔기 때문이다.
황제 가족이 떠나는 여행에 참석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우리 황족이랑 같이 북쪽 제르반 반도로 가야 하거든. 얼음 축제 구경한대.”
물론 그리 기쁘지 않았다. 불편할 게 뻔하지 않은가. 절 죽일 듯 노려보는 아델라이와 황후의 시선을 견뎌 내야만 한다. 그건 휴가가 아니라 고문 아닐까.
그나마 루시를 시녀로 대동하고 갈 수 있다는 게 다행이었달까. 덧붙여, 라르트 황자와의 관계가 개선됐다는 사실도 조금의 위로이기는 했다.
‘그나저나 라르트는 되게 좋아하겠네.’
루시와 함께 여행 가는 걸 알면 펄쩍 뛰며 좋아할 게 분명했다. 하늘이 준 은혜임이 분명하다며.
자그마한 물통 안에서 파르르 날갯짓하며 몸을 씻던 마제또가 짹 하고 튀어나왔다.
“나도! 나도 같이 갈래!”
“응? 마제또? 너도 같이 여행 갈래?”
“응! 나도 갈래! 나도 북쪽 가볼래! 얼음 볼래!”
쫑쫑 뛰며 호들갑스럽게 외칠 때마다 대리석 바닥에 마제또 발바닥이 종종종 찍혔다.
“마제또 인간 말하면 안 되는데 참을 수 있겠어?”
“응! 참을 수 있어요! 나 참는 거 잘해! 나도 갈 거야!”
블론디나는 픽 웃고는 마제또의 젖은 깃털을 조심스레 닦아 주었다.
네 참새 여자 친구는 어쩌려고? 라고 물어볼까, 하다가 관두었다. 최근 마제또는 별궁에 예전보다 자주 찾아왔다. 늘 올리던 여자 친구 얘기도 하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며칠을 아주 침울한 표정으로 보내기도 했었다.
창가 테이블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힘없이 짹짹거렸던 것이다. 누구보다 수다스럽고 호들갑스럽던 참새가 상심에 푹 빠져.
‘헤어졌구나.’
헤어짐이란 건 인간에게도, 참새에게도 퍽 견디기 힘든 일인 걸까. 블론디나는 평소보다 더욱 세심하게 마제또의 물기를 털어 주고는 젖은 손수건을 하녀에게 건넸다.
“그런데 마제또. 에이몬 집에 있어?”
에이몬의 방문이 또 뜸해졌다. 무슨 일인가 궁금한데 도통 알 수 없어 신수의 숲을 오가며 생활하는 마제또에게 묻는 것이었다. 마제또의 둥지가 에이몬의 집과 가까웠으니까.
부리로 젖은 깃털을 정리하던 마제또가 고개를 바짝 들었다.
“에이몬 님 샘에 가셨던 것 같은데요!”
“샘?”
“응! 응! 그런데 이제 돌아오셨으려나? 마제또가 보고 올게!”
마제또는 갑자기 포로로 날아오르더니 그대로 창문 밖으로 날아갔다. 블론디나는 훌쩍 떠난 날짐승을 잡지 못해 허공 속에서 애꿎게 손만 휘저었다.
“아니, 지금 당장 가라고는 안 했는데…….”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난 후. 마제또가 돌아왔다.
하루에 두 번이나 숲을 왕복하는 건, 자그마한 참새에게 무리였는지 마제또는 피곤한 얼굴로 블론디나의 어깨에 올라탔다.
“에이몬 님 있어요.”
귓가에 소곤거리는 목소리에 활기가 없었다. 괜히 미안해진 블론디나는 급하게 각설탕을 꺼내어 마제또에게 건넸다. 마제또는 부리로 각설탕을 콕콕 찍어 먹으며 바닥에 얼굴을 박았다.
“졸려. 여기서 자도 돼요?”
“그럼, 물론이지. 마제또 마음대로 해.”
블론디나는 자그마한 참새 머리를 손가락 끝으로 살살 문질러 주며 다정하게 답했다. 마제또가 여기서 자고 간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마제또는 각설탕을 부숴서 대충 먹은 후, 참새 전용 컵에 얼굴을 박고 물도 마셨다. 그리고 파닥파닥 블론디나의 침대로 날아가 베개 위에 털썩 누웠다.
“여기가 좋아. 여기서 잘래요.”
그리고 무어라 답할 새도 없이 고롱고롱 잠들어 버렸다. 통통한 배에 난 하얀 깃털이, 창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다.
블론디나는 창문을 꼭 닫고는 마제또의 몸 위에 자그마한 손수건을 덮어 주었다.
“귀여운 녀석 같으니.”
부리에 묻은 설탕 가루를 조심스레 털어 내준 블론디나가, 침대 아래에 몸을 말고 누웠다. 혹여 자신이 마제또를 머리로 짓누를까 두려워 멀찍이 떨어진 것이다.
“잘 자, 마제또.”
들리지 않을 작별인사를 전하고는 눈을 감았다.
다음 날, 블론디나는 홀로 신수의 숲에 들어섰다. 에이몬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아무래도 보고 싶어서 안 되겠다. 깜짝 방문해서 놀래 줘야지.
어깨 위에 앉은 마제또가 기분이 좋은지 짹짹거리며 지저귀었다.
“이따가 내 둥지도 구경해요! 내가 엄청 힘들게 지었어!”
마제또는 자그마한 발로 블론디나의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한참을 갖고 놀더니 계속된 이동이 지루한지 꾸벅꾸벅 졸았다.
졸다가 톡 떨어지는 마제또를 손바닥으로 받으며 블론디나가 물었다.
“마제또. 날아가는 게 낫지 않아?”
“마제또는 이게 편해. 어제 힘들었단 말이야.”
당당하게 말한 마제또는 아예 블론디나 손바닥에 자리를 잡고 눈을 감았다.
어느새 제 손안에서 잠든 마제또를 보며, 블론디나는 계속 걸음을 옮겼다. 작은 참새를 소중히 쥐어 들고.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산딸기 숲 경계선이었다. 에이몬이 발톱으로 영역표시를 해준 바로 그 경계선. 블론디나는 잠든 마제또를 내려다보다가 흐음…… 하고 고민에 빠졌다.
에이몬의 표식 밖으로 나가면 위험해진다. 인간의 몸으로 갈 수 있는 건 여기가 한계였다.
마제또에게 에이몬을 데려와 달라고 하면 되는데…… 마제또가 너무 곤히 잠들어서 깨우기가 미안해졌다.
블론디나는 그대로 자리에 폭 앉았다. 참새가 일어나길 조금 기다리다가 영영 일어나지 않으면 깨워 볼 생각이었다.
한 손에는 마제또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들꽃을 훑으며 시간을 때우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바작바작 나뭇가지 밟히는 소리가 났다. 짐승이 다가오는 소리였다.
블론디나의 어깨가 긴장으로 굳었으나 이내 풀렸다. 에이몬의 표식이 있는 공간 아닌가. 일반적인 짐승이라면 감히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제게 다가온 건 대수로운 산짐승이 아니었다.
풀숲을 흔들며 기습공격처럼 나타난 건, 거대한 갈색 점박이 표범이었다. 이마 위 변환석을 보아하니 그 역시 신수가 분명했다.
“꺗!”
깜짝 놀란 블론디나가 몸을 들썩였다. 그 참에 곤히 잠들었던 마제또가 벌떡 일어났다.
“뭐야? 뭐예요? 갑자기 뭔데!”
짹! 하고 일어나 날개를 파닥거렸다. 그러다가 눈 앞에 있는 표범을 보고는 다시 소리를 꽥 질렀다.
“샨티 님!”
알아보기는 했으나 그다지 호감이 어린 목소리는 아니었다.
샨티라 불린 신수는, 블론디나를 향해 차박차박 다가오며 흥미로운 눈빛으로 둘을 훑었다.
「작은 간식이랑 그보다 더 작은 간식이 같이 있네?」
“더 작은 간식 아니에욧! 참새라고욧!”
마제또가 겁도 없이 삑삑거렸다. 하지만 블론디나는 도통 겁 없이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에이몬이 아니라서일까. 이상하게 천적을 마주한 생쥐처럼 오금이 저렸다.
상대는 신수이기 전에 짐승이었고, 짐승 중에서도 맹수이기 때문이다. 인간 따위가, 송곳니 하나로 절 죽일 수 있는 상대 앞에서 담대하기란 힘든 일이다.
블론디나 앞에서 멈춰 선 샨티가 콧잔등에 주름을 지며 웃었다.
「너, 황족 맞지? 저번에 우리 의식제에 참관했었던.」
그제야 블론디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응. 맞아.”
절 알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상대의 정체는 모르겠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에이몬 빼고는 다 똑같이 생긴 탓이다. 비슷한 체구에 비슷한 갈색 털.
「인간은 다 똑같이 생겨서 구분하기 힘들었어. 에이몬 냄새도 안 나고. 왜 에이몬이 아직 각인을 안 해놨지?」
각인? 각인이 뭐지? 블론디나가 갸웃대는 사이 ‘아하. 그냥 먹이였나?’라며 가랑가랑 웃던 표범이 앞발로 바닥을 긁으며 인사했다.
「안녕. 저번에도 소개했지만, 난 샨티야.」
“안녕. 저번에도 소개했지만, 난 블론디나. 블론디나 륜 아테스.”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야? 산딸기 먹으러 왔어?」
“에이몬 찾아왔어.”
샨티는 킁킁거리며 블론디나 주위를 맴돌았다. 블론디나는 딱딱하게 굳은 몸으로 눈만 움직여 그의 움직임을 좇았다.
꼬리를 살랑거리던 샨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만나려고? 에이몬 지금 제어 풀려서 좀 위험한데. 뭐…… 나랑은 상관 없지.」
샨티는 블론디나의 주위를 부산스럽게 빙빙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