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50화
인파 사이를 걷는 유연한 짐승이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사람들은 그가 지날 때 고개를 푹 숙였다가 그의 자취가 멀어지면 뒤늦게 고개를 들고 뒷모습을 좇았다.
발자국 뒤로 숨 멎은 시선이 따라붙는다. 바짝 언 공기로 사냥터는 이미 적막이었다.
블론디나 곁에 다가온 흑표범이 걸음을 멈췄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황제가 눈을 내리며 빳빳한 고개를 숙였다.
“제국의 위대한 수호자, 신수를 뵙습니다.”
그제야 묵직하게 가라앉았던 공기가 마법처럼 깨졌다. 황제의 인사를 필두로 귀족들 모두가 납작 엎드리기 시작했다.
“위대한 제국의 수호자, 신수를 뵙습니다.”
“신수를 뵙습니다.”
넙죽 엎드린 시종들의 등이 잘게 떨린다.
에이몬은 주위를 심드렁히 둘러보더니 누군가를 향해 다가섰다. 멍하니 앉아 절 올려다보고 있는 블론디나를 향하여.
곧 에이몬은 의자에 앉은 블론디나의 허벅지에 턱을 얹고는 느릿하게 자리를 잡았다.
푸른 풀밭 위에 새까만 짐승이 인간 여자 앞에 몸을 웅크렸다.
「나 왔어. 네가 잡은 샤냥감.」
주위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그가 말해 오는 ‘사냥감’이라는 말에 누군가는 눈을 크게 떴고 누군가는 숨을 들이켰다.
블론디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습관 같은 행동이었다.
갑작스러운 에이몬의 등장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으나 표현하기 곤란했다. 위대한 신수님을 향해 ‘공식적으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 건지.
상황이 의문스러운 것은 모두 마찬가지였다.
황제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거대한 흑곰을 평범한 짐승처럼 만들어 버리는 신수를 보며, 황제는 눈빛에 이채를 띠었다.
“네 사냥감이 왔다 하심은…… 신수께서 블론디나에게 잡혔다는 말씀이신지요?”
황제에게서 농인지 질문인지 모를 것이 던져졌다. 에이몬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며 블론디나의 허리에 제 얼굴을 느릿하게 비볐다.
「물론, 처음부터 지금까지.」
다시 주위가 술렁였다. 신수의 말이 무얼 뜻하는 건지.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귀족들은 연신 눈동자를 굴렸다.
황제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렇다면 오늘 사냥대회 우승은 블론디나 황녀의 차지겠군요.”
에이몬은 대답 대신 눈을 감고, 절 쓰다듬는 블론디나의 손길을 즐겼다. 자신이 황제에게 ‘사냥감 취급’을 받아도 그다지 상관없다는 표현 같았다.
에이몬이 이 자리에 있는 것도. 관심도 없는 사냥대회에 몸을 들이민 것도, 모두 블론디나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아무도 사냥감을 주지 않는다며. 이따금 그 사실이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며 중얼거렸던 블론디나의 말을 기억했기에.
그래서 늘 성장하기를 바랐다. 오늘을 꿈꿨다. 그 어떤 짐승보다 크고, 고귀하며, 늠름한 모습으로 그녀의 사냥감이 되고 싶었다.
자리로 돌아간 황제가 시종에게 손짓했다. 들판 위에 커다란 뿔 나팔 소리가 울렸다. 술렁거리던 장소가 다시 침묵으로 굳었다.
미소 밴 얼굴로 주위를 둘러본 황제가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사냥대회 우승자를 발표하도록 하지.”
모두 침을 꼴깍 삼켰다.
“블론디나 륜 아테스. 나의 장녀가 이번 사냥대회의 우승자임을 기쁘게 밝히는 바이다.”
옆에 있던 시종이 다시 크게 외쳤다.
“블론디나 륜 아테스 1황녀께서 우승자임을 선포합니다!”
그 외침을 끝으로, 악사들의 경쾌한 음악이 들판을 덮기 시작했다.
“축하드립니다, 황녀님!”
“영광스러운 우승에 찬미를!”
여기저기서 찬사가 터져 나왔다. 블론디나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루시가 팔뚝을 톡톡 두드리며 신호를 보내자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다리를 비비적거리는 에이몬을 느끼며 몰려드는 인파를 향해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일까. 정신이 없었다. 그저 사냥감 하나라도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졸지에 우승자가 되어 버렸다.
이건 스케일이 커도 너무도 큰 신수 수장님 덕분이었다. 바로, 지금 제 발등을 핥고 있는 이 커다란 고양이의 덕.
귀족들은 블론디나에게서 조금 멀찍이 떨어져 칭송의 말을 외쳤다. 그녀의 발치에 자리잡은 에이몬이 신경 쓰여 차마 가까이 다가올 수 없는 탓이다.
황녀 아래 앉아 있는 커다란 흑표범이 당장 그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댈 것만 같았다.
한편 블론디나를 지켜보던 황제가 제 곁에 있는 이를 향해 손짓했다. 황제의 신실한 수족, 마르쉐 공작은 겸손히 허리를 숙였다.
제 입가에 귀를 갖다 대는 그를 향해 황제가 말했다.
“신수를 사냥한 황녀를 본 적 있는가.”
“없습니다, 폐하.”
“충분히 보아라. 내 딸이 그러하다.”
신성한 일족을 발치에 둔 황녀라니 찬사받아 마땅하다. 유례없는 행적인 것이다.
축하를 건네는 모두의 낯이 환했다. 낯선 상황에 당황했을지언정 축하에는 거짓이 없었다.
단 두 사람의 표정만이 녹녹히 침전되어 있을 뿐이다. 아델라이 황녀와 필립 로드슨.
특히 늘 여유로웠던 필립의 얼굴 위에는 자존심을 상처 입은 자 특유의 모멸감이 올라와 있었다.
고귀한 신분과 특출한 외모. 여유롭고도 선량한 품성까지. 칭송받아 마땅한 공자였다.
사냥한 짐승을 이끌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제 앞에 펼쳐진 지금의 상황을.
구렁텅이를 맴도는 천한 황녀를 구해 주는 역할은 제가 차지했어야만 했다.
‘한낱 미물 따위가…….’
필립의 낯에서 모처럼 미소가 지워졌다.
필립에게서 몇발짝 떨어져, 그의 표정을 훑던 아델라이가 픽 웃었다. 그런 후 가까이 다가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러게…… 애초에 내게 주지 그랬어.”
그가 블론디나에게 주었던 흑곰을 말하는 것이었다. 필립은 애써 침착한 눈으로 아델라이를 응시했다. 아델라이는 입꼬리를 위로 주욱 끌어당기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난 네가 좋아, 필립. 쓸데없이 고고한 것도. 항상 여유로운 잘생긴 얼굴도.”
“…….”
“상상해 봐, 필립. 네가 황녀와 결혼 후 얻게 될 것들을.”
아델라이는 손가락으로 저 자신을 가리키고는 미련 없이 필립을 떠났다.
“물론 반푼이 황녀 말고 진정으로 고귀한 혈통의 황녀를 말하는 거야.”
홀로 남은 필립은 사라지는 아델라이를 가만히 응시했다.
황녀가 떠난 자리. 곧 필립의 주위를 다른 인파가 채우기 시작했다.
안타깝게 우승자는 되지 못하였으나 흑곰을 잡은 건 정말 대단하다는 칭송의 말을 들으며 필립은 아델라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
그는 곧 미소 지으며 잔을 들었다. 경쾌한 연회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블론디나는 늘어져 있는 에이몬의 콧잔등을 슬슬 문질렀다.
멀찍이 떨어져 축하의 인사를 보내던 귀족들은 모두 다른 곳으로 가버려 이 시끌벅적한 곳에서 에이몬과 블론디나만이 한적했다.
커다란 깔개 위에 편안히 앉아, 깔개보다 더 커다란 에이몬을 앞에 둔 채 블론디나는 걱정했다.
“에이몬. 이래도 돼?”
「뭘.」
에이몬은 눈도 뜨지 않고 대충 답했다. 블론디나의 손길이 어느새 멎자, 얼른 계속 쓰다듬으라는 듯 얼굴을 들이밀며.
“인간과 같이 있는 걸 보이면 귀찮아진다고 했잖아. 장로님이 혼낸다고.”
「…….」
그제야 에이몬이 느릿하게 눈을 떴다.
「브리디. 내가 누군지 잊었어?」
“너, 에이몬.”
「그거 말고.」
“에이몬 아킨.”
「……그것도 말고.」
에이몬은 콧등으로 블론디나의 허리를 꾹 밀며 대답을 강요했다. 블론디나는 비비적거리는 에이몬을 다시 쓰다듬다가 그가 원하는 대답을 겨우 짜냈다.
“위대하신 수장님?”
「바로 그거야.」
심드렁히 답하며 에이몬은 꼬리로 블론디나의 발목을 간질였다.
깜짝 놀란 블론디나가 “꺅!” 하고 풀밭에서 발바닥을 떼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드레스 안에 꼬리를 들이민다.
그녀의 종아리를 꼬리로 휘감고는 에이몬이 중얼거렸다.
「남의 이목 같은 건 이제 신경 쓰지 마. 그게 인간이든 신수이든.」
“그럼 별궁도 당당히 드나들 수 있겠네?”
블론디나의 종아리를 은근슬쩍 간질이던 꼬리가 슬슬 위로 올라왔다. 블론디나는 다시 깜짝 놀라 드레스 안 꼬리를 옷 위로 휙 붙들었다. 천 아래 은근히 오가는 행동이 퍽 야릇하다.
그 행위를 하는 에이몬은 모르고 있는 것 같아 제지하자 에이몬은 못 이긴 척 꼬리를 내렸다. 다시 애꿎게 발목만 휘감았다.
「물론이지. 안 당당할 이유가 뭐야.」
느릿하게 읊조리던 에이몬은 가볍게 몸을 움직여 블론디나를 털썩 넘어뜨렸다. 그리고 그대로 그녀를 덮쳐, 드레스 위로 드러난 어깨를 가볍게 물었다.
블론디나는 에이몬이 해를 가려 주자 찡그렸던 눈을 똑바로 뜨고 몸에 힘을 풀었다. 에이몬이 고작 머리 부분만 들이밀었을 뿐인데 무게감이 상당했다.
「밤에도 보란 듯 네 방으로 들어갈 거야.」
까슬한 혀가 블론디나의 여린 살갗을 할짝거렸다. 블론디나는 절 음험하게 핥는 에이몬의 뺨을 문질렀다.
“잘됐다. 안 그래도 몸이 커져서 몰래 다니기 힘들었을 텐데. 그동안 힘들었지?”
진정 기쁘다는 듯 발랄한 목소리로 말하며 흠뻑 웃었다.
에이몬이 우뚝 행동을 멈췄다.
「네가 이렇게 순진하니까.」
“응?”
「네가 이렇게 날 자꾸 받아 주니까…… 내 버릇이 나빠지잖아.」
블론디나는 버릇이 나빠진다는 제 고양이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버릇 좀 나쁘면 어때. 잡아먹지만 마.”
에이몬이 절 장난스레 물다가 힘 조절에 실패하기만 해도, 자신은 그의 한입거리로 전락하지 않겠는가.
에이몬이 다시 블론디나의 목덜미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향기로운 내음을 맡는 듯 킁킁거리며 연신 부비적거렸다.
「이렇게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식인은 안 한다며.”
「내가 그랬나.」
뻔뻔하게 답하는 에이몬이 계속 붙어 오는 통에, 맞닿는 털이 자꾸 간지러웠다. 블론디나는 결국 제게 얼굴을 파묻는 에이몬을 두 손으로 쭉쭉 밀었다.
“거짓말쟁이.”
「맞아. 게다가 야비하기까지 해서 말도 잘 바꿔.」
콧잔등을 톡톡 두드리고 주둥이를 있는 힘껏 밀어내자 에이몬은 그제야 져준다는 듯 몸을 떨어뜨렸다.
어둑했던 블론디나의 시야가 화악 밝아졌다. 세상이 환했다. 기분이 무척 좋았다. 새까만 흑표범으로 뒤덮인 제 세상은 그토록 찬란한 것만 같았다.
한편, 한 마리의 표범과 인간 한 명의 꽁냥거림을 지켜보던 라르트 황자는, 제 옆에 앉은 루시에게 속닥거렸다.
“루시.”
“네, 전하.”
“저 둘. 그러니까…… 저 둘 말이야.”
에이몬의 머리를 밀어내는 블론디나와, 끈덕지게 달라붙는 에이몬을 눈으로 좇으며 라르트 황자가 말을 이었다.
“저 둘 혹시 그런 관계야?”
루시가 눈으로 답했다. 여태 그것도 모르셨어요? 하지만 이내 타박을 지워 내고 다시 상냥히 웃었다.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말하신 바는 없으나 행동으로 보아…….”
“역시 그렇지? 지금 저 둘은 여기가 어딘지도 잊은 것 같은데.”
다른 이들은 차마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것 같으나, 둘 사이를 잘 아는 라르트는 쉬이 알아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