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45화
“발톱도 보여 줘.”
「위험한데.」
“얼른.”
에이몬은 이번에도 착하게 발톱을 착 내밀었다.
블론디나는 혹시 몰라 손을 떼고 있다가 그의 발톱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다시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발톱 하나하나가 커다란 갈고리 같았다. 단단하고 묵직한 발톱은 어딘가에 박히면 살점을 그대로 찢어 낼 것같이 위험해 보였다.
하지만 그래 보았자 저에게는 착하고 커다란 고양이다.
언제 에이몬을 두려워했냐는 듯, 블론디나는 표범의 앞발을 갖고 놀았다. 익숙해지자 이제는 두려움보다 흥미가 더 컸다.
에이몬이 짐짓 블론디나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런데, 브리디. 이젠 이 모습이 무섭지 않아?」
“응. 사실 처음 봤을 땐 좀 무서웠는데…… 이젠 정말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예전에 노르디를 만나고 와서 그런가 봐.”
늘 큰 체구만 보면 흠칫 놀라곤 했었다. 어린 시절 겪었던 학대로 인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에이몬과 함께 제 두려움의 실체를 확인하고 오자, 절 공포로 밀어 넣었던 것들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그리고.
“에이몬은 에이몬이니까. 무섭지 않아. 에이몬인걸.”
에이몬에게 두려움을 느끼기엔, 그를 향한 마음이 너무도 깊었다.
그가 절 얼마나 소중한 친구로 여기는지 알기에 더욱.
웃음기 어린 얼굴로 뒤돌아 그의 몸을 폭 안았다. 네가 좋아, 에이몬. 언제까지나 함께했으면 좋겠어.
「…….」
동시에 에이몬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팔에 감기는 그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호흡하는 방법조차 잊었는지, 에이몬은 큰 숨을 들이마시고는 조각상처럼 안겨 있기만 했다.
“흐음.”
블론디나는 에이몬에게 제 뺨을 비비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살갗에 닿는 털의 감촉이 기분 좋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의 체온과 애정 어린 접촉으로 더없는 평화 속으로 녹아드는 기분이었다.
반면 에이몬은 간신히 숨만 내쉬었다. 거의 패닉에 가까운 상태 같았다.
그러다가 결국 블론디나가 제 몸을 그의 품 안으로 더욱 밀어 넣자 몸을 벌떡 일으키고야 말았다.
“에이몬?”
기댈 곳 잃은 블론디나가 휘청거렸다.
에이몬은 그녀가 데굴데굴 구르기 전, 앞발로 그녀의 몸을 지지해 바닥에 얌전히 눕혔다. 그런 후 밖을 향해 말도 없이 마냥 달려나갔다.
소란스럽게 테이블을 넘고, 의자를 걷어차며 직선으로 질주했다.
그림자처럼 밤을 오가는 게 특기라더니 지금의 에이몬은 누구보다 시끄럽고도 난폭했다.
“에이몬? 어디 가?!”
블론디나의 황망한 물음에도 에이몬은 대답 없이 달리기만 했다. 머리로 문을 쾅 들이받았다. 앞발로 문을 열 겨를도 없는 모양이다.
두꺼운 문이 콰직 우그러지며 열리자, 그것마저 우당탕 걷어찬 에이몬이 그대로 뛰쳐나갔다.
“에이몬?”
어색한 적막 속에 어둠만이 남았다. 끼익끼익, 반쯤 떨어져 나간 문이 덜렁거렸다.
단발적인 폭풍이 몰아쳤다 사라진 것만 같았다.
“머리 멀쩡한가.”
문에 꽝 처박히던데.
그를 향한 걱정으로 표정을 굳히며 일어섰다.
문과 에이몬의 머리가 부딪치면 에이몬 머리통보다 문이 먼저 깨질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걱정되는 건 걱정되는 거다.
블론디나는 에이몬이 망가뜨린 문을 힘겹게 닫았다. 그리고 다시 창가로 다가가 사냥터 너머를 응시했다. 사냥터를 가로질러 신수의 숲으로 달려가는 에이몬이 보였다.
그가 커다란 나무 하나를 퍽 내리쳤다. 우지끈 부서진 잔해가 펑펑 흩어졌다. 잠들었던 새들이 허공 위로 날아오른다. 여기저기서 콰직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숲을 수호해야 할 위대한 신수, 심지어 수장이 숲을 마구잡이로 망가뜨리고 있었다.
블론디나는 멍하니 에이몬의 행패를 보고만 있다가 침대 위에 누워 몸을 더욱 쭉 뻗었다. 언젠 에이몬이 이해할 만한 행동을 했나. 저러다가 언젠가는 오겠지.
머지않아 에이몬이 망가진 문을 조심스레 밀고 들어왔다. 여전히 숨을 몰아쉬고 있으나 아까보다는 조금 진정된 모습이었다.
블론디는 종아리를 동동 굴리며 에이몬을 향해 물었다.
“왔어? 갑자기 왜 그래? 머리는 괜찮아?”
에이몬은 머쓱한 듯 방 안을 어슬렁거리다가 다시 블론디나의 침대 아래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그냥 좀 성장해서 그래.」
픽 웃은 블론디나가 발가락으로 에이몬의 털을 헤집었다.
성장.
역시 모든 일을 적당히 얼버무릴 수 있는 마법의 단어가 분명했다.
***
라르트와 루시가 황궁 사냥터로 데이트를 간 어느 날. 블론디나는 마제또와 체스를 두고 있었다.
블론디나가 하얀 말을 움직이자, 제 차례가 된 마제또는 체스판 위를 쫑쫑 뛰어가 네모난 영역을 부리로 콕 찍었다.
“여기! 여기! 난 여기에 놓을래!”
마제또의 명에 까만 기사를 대신 옮겨 놓으며 블론디나는 픽 웃었다.
새삼 기분이 이상해졌다. 말하는 참새와 체스를 두며 놀고 있다니. 누가 믿기나 할까. 반쯤 미쳤다고 할 것 같은데.
말하는 표범은 제 친구. 말하는 참새도 제 친구. 참 별난 친구들도 다 뒀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습관처럼 창밖을 응시했다.
에이몬이 자그마한 표범이었을 때, 톡 뛰어 들어오곤 했던 장소.
하지만 기다리는 짐승은 보이지 않고 늘어진 나뭇가지에 달린 잎사귀만 보일 뿐이다.
숲을 부수며 난동을 부리다가 씩씩거리고 돌아온 날. 에이몬은 결국 잠을 이루지 못한 채 홀로 방황하다가 해가 뜨기도 전에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리고 그 이후로 이렇게 2주나 지나갔다.
‘보고 싶은데.’
블론디나는 멍하니 상념에 잠겨 있다가,
“왜 체스 말 안 옮겨요? 지금 블론디나 차례야!”
짹짹거리는 마제또의 말에 불현듯 정신을 차리곤 다시 하얀 말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때, 귓가를 간질이는 바람 사이로 낯선 소리가 울려 왔다. 나무 바퀴가 돌바닥에 맞붙는 마찰음. 달그락거리는 마차 소리였다. 누군가 별궁으로 다가오고 있는 모양이다.
반대편에서 오는지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시선 대신 소리로 상대를 파악하며 뒤돌아 문을 응시했다.
잠시 후. 예상대로 누군가의 방문을 알리는 하녀 목소리가 울렸다.
“황녀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누군데?”
곧 하녀에게서 조금 생경한 이름이 돌아왔다.
“로드슨 공작가의 필립 로드슨 공자님이십니다.”
어쩐지 익숙한 이름이다.
로드슨 공작가…… 필립 로드슨……. 블론디나는 입속에서 필립이라는 단어를 우물거렸다. 어디서 들어 본 것 같기는 한데 확실히 머리에서 떠오르지 않았다.
블론디나가 상대방을 떠올리기 전 마제또가 날개를 파닥이며 외쳤다.
“필립? 누구야? 필립이 누구야?”
블론디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곤 마제또의 부리를 꼭 눌렀다.
“마제또. 말하면 안 돼. 사람들이 네 정체를 알면 위험해질 수도 있단 말이야.”
비록 자신은 이제 익숙해졌지만 말하는 참새라는 존재가 참 희귀하지 않은가. 소문이 퍼지기라도 하면 이 작은 참새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며 마법부에서 산 채로 해체하려 들지도 모른다.
블론디나가 입술 위에 쉿, 하고 손가락을 올리며 꼭 잡았던 부리를 놓자, 마제또는 활기찬 목소리로 크게 답했다.
“알았어요! 마제또, 말 안 해!”
“말하면 안 된다니까.”
“……짹!”
마제또는 벌써 입이 근지러운지 짹! 하고 나서도 부리를 몇 번 뻐끔거렸다.
그사이 블론디나의 허락을 받은 필립이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필립보다 먼저 보인 건 커다란 장미 다발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훤칠한 미청년.
장미향과 함께 들어선 사내를 마주하자, 블론디나는 그제야 필립을 제대로 떠올릴 수 있었다.
‘아. 그 필립이로구나. 생일잔치에 초대했었던.’
필립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블론디나를 향해 장미 다발을 내밀었다. 그러곤 우아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제국의 위대한 핏줄, 블론디나 황녀님을 뵙습니다.”
“다시 만나서 반가워, 필립 공자.”
그가 내민 꽃다발이 꽤 풍성했다. 블론디나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꽃다발을 품에 안아 들었다.
‘이게 무슨 일이람.’
공자가 갑자기 방문한 것도 놀라웠는데, 다짜고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더욱 놀랐다. 이런 건 청혼할 때나 하는 포즈 아닌가.
블론디나가 꽃을 받아 들자 그제야 필립이 눈꼬리를 말아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어쩐지 마주하는 사람의 마음을 간지럽게 하는 미소였다.
그때, 구석에서 새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뭐 하는 짓이야? 미쳤나?”
마제또였다.
깜짝 놀란 필립이 흠칫 어깨를 굳혔고, 블론디나 역시 휙 고개 돌려 마제또를 응시했다. 입 다물고 잠깐만 있으랬더니 그사이를 못 참고.
마제또는 찔끔하여 커다란 화분 이파리 안에 몸을 숨겼다.
“방금 이상한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까?”
필립이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꽤 귀여운 아이 목소리 같은 게 울렸는데, 아이는 보이지 않고 웬 참새 한 마리가 화분 옆에서 쫑쫑거리고 있다. 누가 봐도 이상한 상황이었다.
“난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
블론디나가 뻔뻔하게 답했다.
필립은 짐짓 표정을 굳히고는 다시 안을 휙휙 둘러보더니, “그렇습니까…….” 하고 말꼬리를 늘이며 수긍했다.
극적이고 로맨틱한 재회를 꿈꾸며 왔는데 어찌 된 게 분위기가 조금 묘하다. 필립은 머쓱한 듯 뒷목을 주물럭거리다가 이내 다시 멀끔하게 웃었다.
“재회 기념으로 잠시 산책이라도 함께 가는 건 어떠신지.”
블론디나는 괜히 화분 쪽을 힐끔거렸다.
필립과 산책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마제또가 그 뒤를 뒤쫓을 것이며 이리저리 짹짹거리고 참견해 댈 수도 있다.
마제또를 위하여, 그리고 제 정신 건강을 위하여 그런 사태를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블론디나는 화병에 장미를 꽂아 넣으며 부드럽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오늘은 곤란해. 선약이 있거든.”
그 선약은 참새와 체스를 두는 것이었다. 꽃향기를 흠뻑 맡은 그녀가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조심히 돌아가도록 해.”
무슨 진행이 있기도 전에, 지레 벽부터 치는 단호한 거절이었다.
필립의 낯에 명백한 당황이 담겼다. 블론디나가 거절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던 탓이다.
돈도 많고, 잘생긴 데다, 막강한 공작가 출신 공자. 누구도 절 이렇게 거부한 적은 없었다.
천한 핏줄을 가진 황녀의 구원자 역할을 할 게 바로 자신이었거늘 이렇게 단호한 거부를 맞닥뜨릴 줄이야.
그는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듯 당황하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부드럽게 웃었다.
“제가 실례했군요. 다음에는 미리 약속을 잡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마제또에게 온 신경을 기울이느라 블론디나의 답에는 영 성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