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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44화 (44/121)

# 44

#44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한번 한 라르트는 달아오른 얼굴로 주절주절 변명하기 시작했다.

“입에 붙어서 그래. 진심은 아니라고. 진짜야. 그냥 버릇 같은 거였어.”

“흐음.”

“……미안해. 고쳐 보도록 노력할게.”

풀 죽은 사과가 울려 왔다. 블론디나는 테이블 위에 내려앉은 꽃잎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너 자꾸 그렇게 굴면 네가 예전에 내 앞에서 오줌 싼 거 루시에게 말할 거야.”

“뭐? 내가 언제!”

“10년 전이었나…… 네가 신수님께 밟혀서 엉엉 울었던 그때.”

“그런 건 잊어 줘야지! 가족이 되어서!”

씩씩대는 라르트의 표정이 진실로 억울해 보였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제 목숨을 위협하는 신수의 살기를 느끼며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않을 이가 어디 있냐는 말이다.

심장이 단단한 다이아몬드로 되어 있지 않은 이상 모두 저처럼 쪼그라들었을 거다.

블론디나가 소리 내어 웃었다.

“지금까지 반쪽 가족 취급한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아, 라르트.”

“……아…… 그건 다시 미안해…… 그러니까 루시에게는 말하지 마…….”

라르트의 어깨가 다시 수그러들었다. 그는 마치 건드리면 건드리는 대로 몸을 움츠리는 미모사 같았다. 그래서 자꾸만 놀리고 싶어진다.

하지만 블론디나는 이쯤에서 멈추기로 했다.

“그런데 너 오늘은 또 왜 왔어?”

“그게……. 음…… 오늘 루시 외출시켜 줄 수 있어?”

“어렵지는 않은데. 왜?”

다 마신 찻잔을 구석으로 밀어내며 블론디나가 물었다. 라르트는 테이블 위 봉투를 열어 티켓 귀퉁이를 보여 주었다가 다시 닫았다.

“오페라 보고 오려고.”

블론디나의 한쪽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너 정말 최선을 다하는구나.’

이쯤 되니 신기할 지경이었다.

사랑에 빠진 라르트는 자신이 알던 오만하고 건방진 황자가 아니었다. 부디 그의 사랑이 일회성 가벼운 감정이 아니기를. 이 관계가 루시에게 상처로 남지 않기를.

사뭇 진지한 눈으로 라르트를 훑던 블론디나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제 눈앞의 황자는 진심 같았다.

“알겠어. 이따가 루시가 오면 함께 가.”

“그 전에 내가 찾아가면 어떨까?”

“루시는 내 직접적인 허락 없이는 움직이지 않을 거야.”

역시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는 라르트를 향해 저 역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사이 문 뒤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헤리브 영애께서 오셨습니다, 왕녀님.”

루시의 방문을 알려 오는 것이었다.

라르트는 꼿꼿하게 편 허리를 더욱 곧게 펴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사뭇 우아하고 고고하게.

며칠 전, 신수의 숲에서 낙엽 밭을 구르고 흙덩이 위를 뒹굴었던 이미지를 만회하기 위함 같았다.

“황녀님, 좋은 아침이에요!”

곧 경쾌한 인사와 함께 루시가 들어섰다. 그녀는 갓 피어난 꽃처럼 방긋 웃다가 이내 라르트를 발견하고는 “황자 전하?” 하고 살짝 놀랐다.

하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고는 라르트에게 허리 숙여 인사한 후 제자리에 어색하게 섰다. 앉을 의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블론디나와 루시만 있다시피 한 이 방에는 애석하게도 의자가 단 두 개뿐이었다. 어쩔까 하다가 블론디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그래도 몸이 찌뿌둥해서 일어나고 싶던 참이다.

더불어, 눈만 데록데록 굴리며 루시만 힐끔거리는 라르트에게 기회를 주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루시. 앉아.”

루시를 향해 휙휙 손짓한 후 사냥터가 보이는 창가에 등을 대고 섰다.

팔을 위로 쭉 늘이며 앞을 응시하자, 스무 걸음 떨어진 테이블에 앉아 있는 라르트와 루시가 보였다.

부끄러워하는 라르트의 표정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나뭇잎 틈으로 들이닥치는 볕에, 뒤통수가 따끈따끈했다. 봄이 온다는 말보다 몸으로 먼저 느끼는 계절의 변화였다.

블론디나는 창틀을 짚고 서서, 웃는 낯으로 둘을 응시했다.

굳은 얼굴로 오페라 티켓 봉투를 부스럭거리는 라르트를, 목덜미를 벌겋게 물들여서는 더듬더듬 데이트 신청을 건네는 라르트를, 그 앞에서 놀란 얼굴로 흠칫 상체를 물리는 루시를.

다시 눈을 감고는 따끈한 햇빛 아래로 몸을 들이밀었다. 다시 에이몬이 떠올랐다.

에이몬이 절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으나, 동시에 그가 상처 입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정해 보이는 라르트와 루시를 보며, 저 모습을 에이몬은 보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커다란 고양이가 상처받지 않기를.

‘하지만 이런 고민조차 우습지.’

에이몬이 루시를 좋아한다 해도 둘이 이루어질 수는 없다.

짐승과 인간 아닌가. 바꾸어 말하면, 에이몬이 절 좋아하게 되더라도 에이몬과 자신이 함께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말이다.

지금처럼 친구라면 모를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에이몬을 향한 마음을 접지는 않을 것이다. 마음이 마음대로 된다면 그게 마음일까.

“애초에 짐승과 인간이 이루어질 수 없기는 하지.”

하지만 난 에이몬과 계속 함께 있을 거야. 마지막 말은 입속으로 웅얼거렸다.

그때였다. 말꼬리가 미처 제대로 닫히지도 않았는데, 등 뒤에서 문득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울려 왔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낮게 깔린 목소리에 고까움이 잔뜩 담겨 있었다.

깜짝 놀란 블론디나가 몸을 물렸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햇볕을 등진 짐승이 절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역광이 진 그의 등 뒤로 새하얀 빛이 환상처럼 흩어졌다. 에이몬의 눈빛이 거의 절 해체할 정도로 흉흉했다.

“에이몬? 왔어?”

에이몬을 향해 묻자 에이몬 등 위에 올라타 있던 마제또가 대신 쾌활하게 짹쨱거렸다.

“마제또도 왔어요!”

저도 날개가 있는 주제에, 위대한 신수님을 이동 마차 취급하는 유일한 날짐승이었다.

에이몬은 마제또의 참견을 간단히 무시하고는 송곳니를 살짝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인간과 짐승은 안 된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혹시 내 얘기야?」

이를 갈듯 에이몬이 물었다. 블론디나가 대답 없이 난처하게 웃었다.

루시를 좋아하는 걸 뻔히 아는데, 에이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사랑스럽고 커다란 고양이가 슬퍼하는 건 역시 보기 싫다.

에이몬의 눈매가 가느스름하게 좁아 들었다.

블론디나는 에이몬의 시선을 모른 척, 상체를 창밖으로 주욱 뻗었다. 손을 내밀어 그의 콧등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우선 에이몬을 진정시킬 요량이었다.

하지만 에이몬은 영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인간과 짐승이 왜. 어째서. 어째서 안 되는데.」

채근하듯 에이몬이 물었다. 숨기지 못한 열기가 부글부글 끓는 목소리였다. 블론디나는 뭐라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침묵했다.

「안 되는 거 없어. 넌 걱정 마! 내가 다 되게 할 거야! 내가 왜 수장이 됐는데!」

여덟 살 아이가 투정하듯 에이몬은 막무가내로 씩씩거렸다.

그 말에 답한 건 다시 마제또였다.

“왜 수장 됐는데요? 에이몬 님 왜 신수 수장 됐어요? 응? 뭐 이유가 있었어? 제일 강해서 된 거 아니야?”

에이몬은 여전히 마제또를 무시했다. 블론디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제또는 뽈뽈뽈 날아와 에이몬의 목덜미에서 콩콩 뛰며 계속 물었다.

“왜요. 왜 수장 됐는데요. 왜? 왜요? 에이몬 님, 왜요?”

그러다 에이몬의 목 아래에서 크르르……. 하고 위험한 소리가 울리자 깜짝 놀라 하늘로 날아올랐다.

“뭐야! 왜 갑자기 화를 내고 그래요! 참새 놀라게!”

물론 갑작스러운 화는 아니었다. 마제또는 삐진 듯 “나 갈 거예요!”라고 외치더니 그대로 숲으로 사라져 버렸다.

마제또가 가건 말건, 에이몬은 앞발로 바닥을 탕탕 두드리며 다시 외쳤다.

「나 이제 수장이야!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짐승도, 인간도 못 막아!」

마구잡이로 뻗대는 어린아이 같은 말에, 블론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언제는 마음대로 안 했나…….”

씩씩대던 에이몬은 화가 덜 풀렸는지 한참을 으르렁거리다가 안쪽에서 창문을 기웃거리는 고귀한 핏줄을 향해 낮게 읊조렸다.

「나가. 내 영역이야.」

“…….”

불똥이 괜히 라르트 황자에게 튀었다.

라르트는 날뛰는 흑표범이 궁금해 기웃거리다가 졸지에 방에서 퇴출당하는 처지가 됐다.

블론디나를 향해 오페라 입장권을 툭툭 두드린 라르트는, 루시까지 데리고 조심스레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우물쭈물하다가 신수에게 혼나는 건 사양이었다. 더군다나 저렇게 무섭게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는데.

‘제 영역’에 블론디나만이 남자 그제야 에이몬의 표정이 풀렸다. 당당하게 고개를 쳐든 에이몬이 거만하게 말했다.

「나 오늘 여기서 잘 거야.」

제 영역이라고 말하더니, 정말 제 영역처럼 막무가내로 행동한다. 블론디나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에이몬의 턱을 긁어 주었다.

“마음대로 해.”

아무래도 제 예쁜 고양이가 성장하더니 더 성격이 나빠진 것만 같다.

밤공기가 아직 시렸다. 블론디나는 창문 뒤 자그마하게 박힌 달을 바라보다가 코를 훌쩍이고는 창문을 닫았다.

평소라면 한창 꿈나라일 텐데. 에이몬에게 기대어 누운 채 창문 틈으로 밀려오는 풀벌레 소리만 들으며 눈을 끔뻑였다.

블론디나는 에이몬에게 제 몸을 더욱 푹 기댔다. 덩치가 워낙에 커서 짐승의 품 안을 꿈질꿈질 파고들면 제 모습은 푹 파묻혀 보이지도 않을 것 같다.

“에이몬. 앞발 만져도 돼?”

몸을 에이몬의 상체 쪽으로 슬슬 움직여 커다란 앞발을 쿡 찍었다. 에이몬이 주저하자 블론디나가 다시 말했다.

“앞발 줘봐.”

맡겨 놓은 듯 당당한 요구였다. 에이몬은 말없이 발을 스윽 들이밀었다.

착하기도 하지. 블론디나는 제 허벅지 위에 툭, 떨어진 커다란 발을 만지작거렸다. 고작 발만 올라왔는데 무시무시할 정도로 무겁다.

‘도대체 이 짐승은 얼마나 무겁고 얼마나 큰 거야.’

그날, 커다란 곰을 메뚜기 잡듯 짓누를 때부터 알아봐야 했는데.

그의 발바닥을 꾹꾹 누르고 털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손길이 스칠 때마다 움찔거리며 앞발을 꿈지럭거렸다.

블론디나는 그의 앞발을 찰싹 때렸다.

“가만히 있어.”

「나도 그러고 싶어.」

에이몬은 눈을 꾹 감고는 하소연하듯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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