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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41화 (41/121)

# 41

#41화

막돼먹은 에이몬을 향해 브리디는 마음 편히 손을 흔들었다.

“아무튼, 알겠어. 조심히 가.”

막돼먹은 에이몬은, 손을 흔들며 안에 들어가려는 블론디나의 드레스 자락을 앞발로 꾹 눌렀다.

「나 오늘 여기서 잘 거야.」

그리고 다짜고짜 자고 간다고 툭 말을 뱉었다.

“어?”

「너 구해 주느라 피곤한데 그냥 보낼 거야? 양심도 없는 인간 같으니.」

말도 안 되는 비약에 블론디나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런가?”

「그리고 이제 내 모습에 익숙해져야지.」

“음. 이미 조금 익숙해졌는데.”

「지금 나 무서워하잖아, 너.」

“그건 어쩔 수 없지. 네 송곳니가 이만한데. 나 물면 즉사라고.”

블론디나가 에이몬의 주둥이를 더듬으며 가만히 웃었다.

무서워하는 여자치고 꽤 겁 없는 행동이었다. 에이몬이 제 손을 물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이 있기에 하는 행동이었다.

「어쨌든 난 여기서 잘 거야. 여기서 잘 거라고.」

에이몬은 계속해서 고집을 부렸다.

블론디나는 꼬리로 바닥을 팡팡 두드리는 에이몬을 보고는 졌다는 듯 고개를 내저였다.

아까만 해도 험악한 피 냄새에 무서웠으나, 저 꼬리짓을 보니. 막무가내로 우기는 모습을 보니 제 에이몬이 확실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내 표범. 덩치만 거대해진 내 새까만 고양이.

그래. 내 에이몬이 맞다.

“알았어. 대신 잠결에 나 깔아 뭉개면 안 돼? 나 죽을지도 몰라.”

「……같은 침대에서 잔다는 얘기는 안 했는데. ……같이 자면 안 되는데. 나 다 컸다고…….」

블론디나는 꿍얼거리는 에이몬을 무시하고 별궁 문을 직접 열었다. 그리고 덩치 큰 고양이를 향해 손짓했다.

“이리 와, 에이몬.”

「…….」

에이몬의 수염이 찔끔 움직였다. 자신 입으로 잔다고 했으면서 왜인지 발짓에 주저가 일었다.

그러다가 결심했다는 듯 꼬리로 바닥을 탁! 두드리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성체 에이몬의 첫 입장이었다.

블론디나는 뜨거운 물에 지친 몸을 녹였다. 떨리던 몸이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괜찮은 척했으나, 욕탕 안 혼자가 되자 숨죽였던 공포가 일시에 밀려들었다. 곰이 절 덮치려 하지 않았나. 죽다 살아나지 않았나.

에이몬 덕에 살아났으니 다행이지 정말 세상과 작별할 뻔했다.

‘마지막에 에이몬 보고 싶었는데 에이몬이 멋지게 살려 줬어.’

수면을 손가락으로 튕기며 성체가 된 에이몬을 다시 상기했다.

저렇게 멋있게 크는 건 반칙 아닌가……. 사람 싱숭생숭하게……. 중얼중얼하며 한참을 참방거렸다. 그러다가.

「브리디. 혹시 빠져 죽은 거야?」

에이몬이 문을 긁으며 걱정스레 묻자 그제야 밖으로 나왔다.

젖은 머리를 털며 나오자, 침대 앞에 웅크리고 있는 에이몬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 그의 보랏빛 눈동자만이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블론디나는 발로 에이몬의 몸을 꾹꾹 밟고 넘어 침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불을 목 위까지 올린 뒤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같이 못 자겠다. 네 몸이 내 침대보다 크니까.”

에이몬은 힐끔 눈만 들어 블론디나를 살펴보고는 다시 앞발에 턱을 댔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을 툭 던졌다.

「왜 못 자. 인간형으로 변해서 같이 자면 되지.」

“…….”

인간형? 그 부분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블론디나가 침을 꼴깍 삼켰다. 뭔가…… 이상하게 뭔가 좀……. 뭐라고 해야 할까. 뭔가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평소라면 장난스럽게 대꾸했을 터다. 그래. 인간형으로 변해서 내 옆으로 와, 라고. 하지만 쉬이 그럴 수 없는 건 둘 사이에 맴도는 묘한 기류 때문이었다.

블론디나는 에이몬의 인간형 모습을 상상하기 관두고 괜히 말을 돌렸다. 아까부터 맘을 맴돌던 찝찝함을 풀어내기로 했다.

“에이몬, 루시 좋아해?”

「좋아하지.」

에이몬이 심드렁히 답했다. 블론디나는 이불 속으로 주먹을 꽉 쥐고는 어금니를 맞문 채 물었다.

“그럼 고백할 거야?”

「무슨 소리야.」

에이몬이 슬며시 고개를 들어 침대 위를 넘겨다봤다. 블론디나는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머리 위에 펼쳐진 휘장만 응시하고 있었다.

에이몬의 마음을 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에이몬이 루시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니 제 마음이 자각됐다.

이제 알았다. 늘 에이몬의 방문을 기다렸던 이유는, 우정이 아닌 사랑 때문이었다. 에이몬이 왜 그렇게 편하고 소중했는지, 동시에 함께 있으면 왜 그토록 설렜는지.

‘저 커다란 고양이를 꼬시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애초에 포기라는 생각은 블론디나의 마음속에 없었다. 에이몬이 환장하는 그 나뭇가지라도 온몸에 칭칭 감고 유혹해야 하나.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고민할 뿐.

에이몬은 의아한 눈으로 블론디나를 응시하다가, 블론디나가 뒤척이는 통에 쇄골뼈가 스륵 드러나자 깜짝 놀라 고개를 휙 돌렸다.

털이 자르르 섰다가 가라앉았다.

「내가 미쳤지. 어쩌자고 제 발로 들어와서는.」

에이몬은 앞발에 얼굴을 처박고는 중얼거렸다.

에이몬과 블론디나, 각자 꽤 심각한 고민에 빠진 밤이었다.

***

나비가 흰 날개를 팔랑거리며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블론디나, 라르트를 비롯한 황족이 실내 정원에 모여 차를 마시고 있는 참이었다.

곤혹스러운 표정의 라르트가 눈썹을 문지르며 황제를 향해 말을 이었다.

“-꽃사슴을 쫓다 보니 그렇게 깊이 다다른 것입니다. 저도 이렇게 될 줄은……. 송구합니다, 폐하.”

황제는 별다른 답 없이 차를 한 모금 넘겼다.

블론디나는 멍한 표정으로 찻잔을 응시했다. 맞은편의 아델라이 황녀에게서 험악한 시선이 쏟아졌다. 그건 가만히 무시했다.

라르트 황자는 지금 황제 앞에서 어제의 사건에 대해 변명하는 중이었다. 어찌하여 말도 없이 숲으로 들어서게 된 것인지, 어쩌다가 그곳에서 길을 잃은 것인지.

변명은 간단했다.

사냥터에서 과녁 맞히기 놀이를 하다가 블론디나를 만나게 되었고, 어여쁜 꽃사슴이 지나가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그녀를 끌고 숲까지 따라 들어갔는데 그날따라 숲의 기운이 이상하여 길을 잃게 되었다는 가벼운 변명.

요컨대, 모든 잘못을 라르트 제 탓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정원에 들어서기 전, 라르트는 말했다.

“이번 일의 수습은 내가 알아서 할게.”

블론디나는 입술을 베어 물며 고개 저었다.

“왜? 다 내 탓이잖아.”

“네 잘못? 아니야. 정확히 말하면 모두의 잘못이지.”

“그러면서 넌 왜 혼자 짊어지려고 해?”

라르트가 그녀의 뺨을 톡, 건드렸다. 장난스러운 미소가 얼굴에 걸렸다.

“네가 일부러 곰을 유인했잖아. 넌 목숨을 걸었는데 난 걸 게 없어. 이렇게라도 해야지.”

그리고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어차피 난 언동이 가벼운 황자야. 널 끌고 숲으로 갔다고 해서 별다른 문제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그간 무책임한 삶을 살기를 잘했다며 씨익 웃었다.

만약 열심히 살았더라면 이번에 모두가 실망했을 수도 있잖아, 라고 주장하며.

블론디나는 우선 거부했다. 차기 황제가 될 그보다는 존재감 없는 황녀인 자신이 짐을 짊어지는 편이 낫지 않은가.

하지만 ‘널 물어뜯을 어머니와 아델라이는 어찌할 건데?’라는 말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천한 피의, 반푼이 황녀가 제국의 차기 황제를 이끌고 숲으로 들어갔다?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다. 아마 황후와 황녀가 작정하고 물어뜯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엔 라르트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라르트의 변명을 듣던 황제가 달칵 찻잔을 내렸다.

“라르트. 네 경솔한 행동으로 자칫 큰 충돌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너와 블론디나를 찾기 위해 기사들을 신수의 숲으로 들여보냈을지도 모르지.”

황제의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타박이 배어 있었다. 라르트는 과장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린 후 넉살 좋게 말했다.

“그랬더라면 기사들에게도 신수의 숲 산딸기 맛을 보여 줄 수 있었을 텐데요. 제가 낮에 따먹은 산딸기 맛이 정말 최고였습니다, 폐하.”

황제가 픽 웃었다. 제 아들의 빤히 보이는 거짓말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고민한다.

잠시 후, 찻잔 받침을 두드리던 황제가 미소 지었다. 불혹을 넘겼건만 그의 미소는 여전히 주름 하나 없이 매끈했다.

“한데 신수가 너희와 함께 나왔다던데, 그건 어찌 된 일이냐.”

이대로 넘어가기로 한 모양이다. 별다른 사고는 없었으며, 신수의 숲과 얽혀 있는 일인 이상 사건을 크게 만들고 싶은 마음 역시 없었다.

황제의 말에 답한 건 블론디나였다. 긴장 하나 없는 얼굴로 황제를 향해 방긋 웃는다.

“이번 의식제에서 친분이 생겼습니다. 저희가 숲에서 길을 잃자 도와주셨어요.”

“친분이라…….”

황제의 표정이 묘해졌다.

무릇 신수와 황족은 시작부터 어그러진 관계였다. 인간의 안전과 신수의 안온을 위하여 위태롭게 맞잡은 손. 모래 위에 지은 성같이 믿음은 얄팍했다.

심지어 지금은 교류마저 없었다. 그 때문에, 인간의 존속을 위하여 바라한의 후예를 찾아 신수를 없애 버리려 했건만…….

황제는 짐짓 생각에 잠긴 눈으로 블론디나를 응시했다.

신기루 같은 신의 일족을 찾는 것보다 오히려 신수와 친분을 맺는 편이 낫다.

적국이 국경선 너머로 감히 발을 디디지 못하는 건 황궁 뒤 신수의 숲, 그 안에 사는 짐승의 덕도 있었다.

게다가 막상 바라한의 후예를 찾아낸다 해도 문제는 있다. 신수와의 전투에 휘말려 황족 역시 피해를 볼 수 있지 않은가.

‘블론디나를 중심으로 관계를 개선한다면.’

블론디나의 단정한 얼굴을 보며 황제가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에 많은 가정이 지나갔다. 신수 의식제에 초대됐던 유일한 황녀. 신수의 숲에서 신수의 보호를 받은 블론디나.

황제가 생각에 잠기자 테이블이 침묵으로 고요해졌다. 라르트 황자는 블론디나를 힐끗 살폈다. 곧 그에게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건네 왔다.

“그런데 블론디나 너 잠은 잘 잤어?”

걱정하는 말투가 꽤 건방졌다. 하지만 그게 라르트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오히려 예의와 매너로 대하면 이상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응. 라르트, 넌?”

“나야 푹 잤지.”

어제의 그늘은 하나도 없는 듯 라르트의 표정은 매우 말끔했다.

루시와 들러붙어 있다가 에이몬에게 들려 바닥에 처박힌 건 다 잊은 모양이다. 놀랄 만큼 뒤끝이 없는 성격이었다.

“그랬다면 다행이고.”

홀로 태평한 라르트에게 가만히 웃어 보였다.

왠지 라르트와 가까워진 것 같다고 느껴진다면 착각일까. 무례하고 건방지면서 솔직하기까지 한 라르트가 이제 밉지만은 않았다. 심지어 조금 귀여워 보이기까지 하다니.

라르트는 무슨 할 말이 있는지 블론디나를 옆눈으로 힐끗 살폈다.

그러고는 괜스레 찻잔을 만지작거리고 티스푼을 들었다가 놓더니 곧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루시는? 루시는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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