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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39화 (39/121)

# 39

#39화

숲 밖을 향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점점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신수들의 성장 탓으로 숲의 기운이 뒤틀렸다. 그것을 모르는 인간 셋은 숲을 빙빙 헤매기만 했다.

바구니를 쥔 손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 주위에 연기처럼 차 있는 선득한 감각이 오싹했다. 에이몬과 함께 있을 때는 안온하게 느껴졌던 숲이 지금은 메마른 냉기에 잠겨 있었다.

“해가 졌어…….”

셋의 얼굴이 더없이 심각해졌다. 블론디나는 제 숄을 펼쳐 루시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루시의 어깨가 이유 모를 두려움으로 떨리고 있었다.

라르트 황자가 들고 있던 바구니를 내던졌다. 그리고 블론디나 곁에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뭐……야?”

올려다보는 그의 턱이 단단히 굳어 있었다.

“뭔가 위험해. 지금 여기서 가장 강한 건 나니까 내게 붙어 있어.”

그의 다른 쪽 손이 검 자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평소의 빈정거림은 말끔히 사라진 상태였다.

라르트는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이 솜덩이처럼 퍼진 구름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셋은 자그마한 숲길을 헤치고 걸었다. 황궁 불빛이라도 보인다면 그 빛을 따라갈 텐데, 나무들로 빽빽이 들어찬 숲은 암흑뿐이었다.

“우리 길을 잃은 것 같은데.”

당연한 사실을 선포하듯 말했다

셋은 걸음을 멈춰 세우고는 우두커니 서서 어둠만 응시했다. 이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위험이 몸을 웅크리고 저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라르트가 맞잡은 블론디나의 어깨를 더욱 끌어당기며 물었다.

“블론디나. 네 신수 친구 있잖아. 불러 봐.”

블론디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 소리가 들리지도 않거니와, 시끄럽게 굴었다가 야생동물이 다가오면 어떡해. 지금 여기는 에이몬이 표식도 해놓지 않아 들짐승이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라르트가 불안함으로 입술을 꾹 물었다가 뗐다.

“둘 사이에 신호 같은 거 없어? 휘파람을 분다거나 하는.”

“없어.”

침울한 눈빛의 블론디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이 숲에 들어서는 경우는 산딸기 숲을 갈 때를 제외하고 전무했다. 늘 에이몬이 먼저 절 찾아왔다. 숲에서 그를 찾게 되는 위급한 상황 같은 건 미처 대비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모두 내 탓이야.’

늘 에이몬과 함께라 공포를 잊었다.

애초에 이들을 이끌고 들어오면 안 되는 것이었다. 에이몬 없이 신수의 숲에 들어서다니. 아무리 안전하다고 하더라도 경솔한 행동이었다.

자책하며 어깨만 축 늘어뜨리려니 라르트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황궁에서 우리를 찾고 있을 텐데.”

지금쯤 두 황족이 사라졌다는 이유로 비상이 내려졌을 터였다.

전혀 상관 없는 황궁 밖을 뒤지고 있을지도, 아니면 신수의 숲 경계에 서서 고민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신수의 영역에 감히 침범할 수 없었기에.

섣불리 발을 내디뎠다가 신수와 인간 사이의 충돌이 다시 일어날 수도 있다. 물론 그로 인한 피해는 오롯이 인간이 짊어질 터였다.

우왕좌왕하는 사이 신수가 황궁에 들이닥쳐 모두를 학살하기라도 한다면 제국의 황족은 핏자국만 남긴 채 멸족될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여기서 둘이 죽어 버리는 게 그 결과보다는 나으리라.

라르트가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다 내 탓이야. 애초에 너희가 이곳에 온다고 했을 때 막았어야 했는데.”

라르트는 의외로 자기 자신을 탓했다. 전에 없이 심각한 얼굴이었다. 블론디나가 고개를 내저으며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라르트. 잘못이 있다면 이곳에 오자고 한 내게 있어. 하지만 우선은 이 숲을 나간 후에 얘기하자. 응?”

“그래.”

라르트는 착한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라면, 네가 감히 날 가르치려 드느냐, 혹은 네까짓 게 날 위로하는 거냐며 빈정거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기 상황에서의 라르트는 낯설 만큼 평소와 달랐다.

“위험하니 꼭 붙어, 블론디나. 루시.”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리 중얼거렸을 따름이다.

다시 숲길을 걸으며 블론디나는 문득 뒤를 돌았다. 스산한 바람 탓에 한기가 몸을 훑고 지나갔다. 블론디나의 어깨를 감싼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이상하게도, 블론디나는 처음으로 라르트가 제 ‘진짜’ 남동생처럼 느껴졌다.

밤이 점점 깊어졌다. 숲도 점점 으슥해지는 것 같았다.

한데 위험한 들짐승은커녕 토끼 한 마리 마주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더욱 불안했다. 풀벌레 소리조차 죽은 밤이 무겁게 깔려 있었다.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숨죽여 걸음을 옮겼다. 어디서인가 찬바람이 불어왔다.

크르르…….

목을 울리는 듯한 위협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셋은 얼은 듯 걸음을 멈췄다.

침을 꼴깍 삼키고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어둠에 묻힌 동굴 입구가 보였다. 정체불명의 짐승이 안광을 번뜩거리며 동굴 밖을 향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새까만 털. 나무통만 한 허리.

“곰이야.”

라르트가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블론디나는 축축해진 손을 꽉 쥐며 대꾸했다.

“……찢어져서 달아나자. 루시와 넌 왼쪽으로 가. 난 오른쪽으로 갈 테니.”

두 쪽으로 찢어지는 것이 도망에 유리할 것이다. 적어도 한 쪽은 살 수 있을 테니. 그렇다면 최대한 저 둘을 살리는 쪽으로 해보자. 이곳에 온 건 내 책임이니 내가 책임져야 해.

그것이 블론디나가 내린 결론이었다.

“가!”

짧게 외친 블론디나가 둘을 왼편으로 휙 밀쳤다. 그들이 거부할 새도 없었다.

블론디나는 오른쪽을 향해 곧장 마구잡이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곰도 자리를 박차고 달려 나왔다. 커다란 몸집이 그녀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에이몬-!”

블론디나에게서 절박한 이름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목소리가 숲을 휘돌아 왕왕 울렸다. 답해 주는 이는 없지만 저도 모르게 부르는 이름이었다.

곰은 블론디나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에이몬! 에이몬……!”

블론디나는 달리면서도 에이몬을 부르고 또 불렀다. 에이몬이 이 목소리를 듣고 절 구해 주리라는 헛된 기대 따위는 없었다. 다만 곰이 절 쫓아오기를 바랄 뿐이었다.

저로 인해 벌어진 일이다. 죽어도 자신이 죽는 게 옳았다.

루시와 라르트가 무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래서 에이몬으로만 이루어진 마지막 유언을 내뱉듯 그를 불러 댈 수밖에 없었다.

블론디나는 휘청거리며 내리막길을 내달렸다. 곰은 내리막길을 잘 내려오지 못한다고 들었다. 그 상식에 제 목숨을 걸어 보기로 했다.

“헉, 헉……!”

숨이 목까지 차올랐다. 호흡이 가쁘게 차올라 목구멍이 찢어질 듯 아파 왔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렸다.

나뭇가지가 스쳐 팔뚝에 생채기가 났다. 블론디나는 멈추지 않고 달렸다. 곰과의 거리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숲을 휘감는 음험한 기운 때문일까.

평소라면 이미 덮치고도 남았을 텐데, 곰은 마치 마약에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다가 다시 달리고, 멈춰 섰다가 블론디나를 향해 다시 달려들었다.

블론디나의 망막이 뿌옇게 흐려졌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아 미친 사람처럼 숲만 휘저었다.

“흐윽, 흑…….”

어느새 뺨 위로 눈물이 줄줄 흘렀다. 뜨거운 물기를 떨어뜨릴 새도 없이 일그러진 얼굴로 발만 놀렸다.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휘어잡고는 마구 내려가다가, 곰이 내리막길에서 뒹굴면 다시 엉금엉금 위로 기어 올라갔다.

낙엽만 깔린 민둥한 언덕에서, 겁에 질린 블론디나와 곰 사이에, 닿을 듯 닿지 않는 도망과 추격이 이어졌다.

얼마나 쫓고 쫓겼을까. 다리에서 힘이 풀린 블론디나는, 결국 나무 밑동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야 말았다.

빠르게 일어서려 했으나 허벅지 근육이 끊어질 듯 아파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벌벌 떨리는 몸을 움직여 바닥에 엉덩이를 붙인 채 엉금엉금 뒤로 물러났다.

흔들리는 눈동자 안에 성난 짐승이 점점 가까이 오는 것이 비쳤다.

끝인 걸까.

눈 아래 뜨거운 물기가 오목하게 들어찼다. 방울방울 흘러내린 눈물방울이 더러워진 뺨을 적시고 땅에 뚝뚝 떨어져 내렸다.

진정되지 않는 숨을 헉헉 몰아쉬며 나무 기둥에 등을 댔다. 그리고 절 향해 달려오는 곰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에이몬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주 우습게도, 마지막으로 에이몬과 여행을 다녀와 추억을 쌓았다는 게 다행이라 여겨졌다.

같은 방에서 함께 자며 자그마한 표범의 등을 매만졌다. 콧잔등을 문지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었다.

아니, 애초에 황궁에 들어오기를 잘했다. 그게 다행이었다. 에이몬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 지치고 힘든 제 삶에 빛이 되어 준 작은 고양이.

네가 날 행복하게 해준 만큼 나도 네게 힘이 되고 싶었는데. 늘 기대기만 해서 미안해, 에이몬.

죽음을 예감하며 마지막 눈물방울을 툭 떨어뜨린 순간, 갑자기 곰의 포효가 터져 나왔다. 오금이 저려 블론디나는 감은 눈꺼풀을 움찔 떨었다.

뒤이어 거대한 무언가가 땅을 뒹구는 소리, 다시 들려오는 곰의 울부짖음. 낙엽이 흩어지고 나무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블론디나는 차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한기가 내려앉는 어깨를 떨며 딱딱한 나무에 등을 대며 몸을 더욱 웅크릴 따름이었다. 이상하게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이 힘들었다.

그렇게 부들부들 떨다가 큰 숨을 내쉬며 간신히 눈을 떴다.

“아…….”

블론디나는 비집어 나오는 신음을 삼켰다.

구름을 벗어난 달빛 아래, 거대한 표범이 곰을 덮쳐 앞발로 곰을 짓누르고 있었다.

크르르릉…….

낮고도 묵직한 표범의 경고가 들려왔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당장이라도 곰의 목덜미에 박힐 것 같다. 치명상을 입은 곰이, 표범 아래 헐떡거리고 있었다.

블론디나는 시린 눈을 깜빡였다. 고여 있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흑…… 하고 삼키지 못한 흐느낌을 뱉어 냈다.

「…….」

그제야 흑표범이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시린 달빛 아래 타닥거리는 안광이 번뜩거리고 있었다.

경외감이 들 정도로 크고 아름다운 짐승은 낯설었으나 그 존재가 무엇인지 블론디나는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에이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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