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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38화 (38/121)

# 38

#38화

신수가 사는 숲이야말로, 사실 황궁을 지켜 주는 거대한 요새에 가까웠다.

어쨌든 라르트 황자는 열심히 말을 탔다.

해질녘까지 고군분투하다가 돌아가려 말에서 내렸는데, 순간 돌조각을 잘못 밟아 발목을 접질리고야 말았다.

호위나 시종이 없어 퍽 곤란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근처에 블론디나와 루시가 있었다.

그녀들은 우연히 마실을 나와 과자를 먹던 중으로, 라르트에게는 퍽 다행인 상황이었다.

라르트 황자가 발목을 쥐고 주저앉자, 루시가 곧바로 달려갔다.

슬렁슬렁 일어난 블론디나가 그들에게 다가갔을 때, 루시는 이미 제 손수건으로 라르트의 발목을 단단히 감싼 뒤였다. 근처에 있던 나무로 부목까지 만들어.

아직도 생생하다. 루시의 부축을 받는 라르트의 뺨이 벌겋게 달아올랐던 광경이.

영 못 볼 꼴이었다. 생경한 동시에 웃겼다. 저 오만하고 건방진 황자도 사랑에 빠진 순간에는 얌전을 떠는구나, 싶어서.

블론디나는 회상을 멈추고는 피식 웃었다.

구두 앞코로 잔디를 짓누르던 라르트가 다짜고짜 루시의 바구니를 건네받으며 말했다.

“나도 같이 가.”

“어디를?”

“숲.”

숲, 이라는 짧은 단어만 내뱉고는 라르트는 벌게진 목덜미로 성큼성큼 앞서 나갔다.

아직 같이 간다고 대답하지 않았는데. 사냥터를 지나 숲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참으로 본격적이었다.

“같이 가도 괜찮겠어?”

싫다면 내가 거절해 줄게. 쟤가 제멋대로인 건 하루 이틀이 아니니까. 말을 덧대며 그리 묻자 루시는 어색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자님께서 함께 가자고 하시는데 감히 거부할 리가.

그렇게 블론디나와 제국의 황자, 그리고 시녀 루시가 사냥터를 향해 함께 걷기 시작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바작바작. 발에 밟히는 조약돌 소리가 꽤 듣기 좋다. 블론디나는 라르트를 힐끗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게 뭔 일인가 싶었다.

“흙이 묻잖아. 황족이 바닥에 주저앉아 뭐 하는 거야?”

“아까부터 왜 이렇게 투덜거려? 싫으면 돌아가.”

툴툴거리는 라르트의 말에 블론디나가 톡 쏘아붙였다.

“누가 싫대?”

라르트는 흙 묻은 신발을 연신 털어 내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이곳은 신수의 숲 경계. 셋은 커다란 나무 밑동에 모여 버섯을 따는 중이었다.

발아래 바스러진 나뭇잎과 흙덩이가 뒹굴고 있었는데 고귀하신 황자 전하는 그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블론디나는 갈색 버섯을 따서 루시의 코 밑에 갖다 댔다.

“어때? 향기 좋지?”

루시가 작게 킁킁거렸다.

“네. 이건 무슨 버섯인가요?”

“라리움 버섯이야. 말리면 달달한 맛이 나.”

“향기가 정말 좋아요. 황녀님은 어쩜 이런 것까지 아세요?”

루시의 곱게 휜 눈매를 보며 블론디나가 빙긋 웃었다.

‘어찌 알기는. 배고플 때 뒷산에 가서 따먹고는 했으니까.’

둘의 대화를 듣던 라르트 황자가 이죽거렸다. 뒷짐 진 얼굴이 꽤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블론디나가 어찌 알겠어? 천한 것이 뒷산이나 돌아다니며 저런 거나 주워 먹었으니 알겠지.”

정답. 바로 맞혔네. 블론디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있던 붉은 버섯을 땄다. 이따 루시에게 건네주어 라르트에게 먹여 버릴 생각이었다.

아마 일주일은 설사로 고생하겠지. 라르트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화장실만 오가는 모습을 상상하며 흠뻑 웃었다.

한편, 블론디나의 표정을 살피는 루시는 울기 일보 직전이었다. 천한 것이라니. 저런 거나 주워 먹었다니. 소중한 황녀님을 향한 황자의 언사가 몹시도 잔인하다.

루시가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을 건넸다.

“황녀님. 황녀님은 천하시지 않아요……. 그렇지 않아요…….”

라르트 황자는 들을 수 없도록 자그맣게 속삭였다.

한미한 백작가 출신 시녀 따위가 라르트를 향해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라며 주제넘은 소리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제가 모시는 이를 힘겹게 위로하는 것 정도는 하고 싶었다.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라르트의 표정이 가만히 굳었다.

그가 곧 우물쭈물 변명을 쏟아 냈다.

“나, 나는 무시하려던 게 아니라…… 그게 사실이…… 사실이라서…….”

숨 쉬듯 해온 경멸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도, 나쁘다고 생각했던 적도 없었다. 블론디나의 혈통이 미천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지 않은가.

하지만 루시가 저런 반응을 보이자…… 이러면 안 되는 건가, 하는 늦은 반성이 찾아왔다.

블론디나는 고개를 비껴 올려 라르트를 응시했다. 라르트의 낯이 하얗게 질려 있는 게 보였다.

‘저런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는데.’

라르트의 당황으로 오히려 공기가 더 어색해졌다. 이러다 그에게서 ‘미안해’라는 단어가 나오기라도 하면 자리에서 펄쩍 뛸 것만 같다. 그 어색함을 견딜 수 없어서.

저 오만한 망아지 같은 황자를 주저하게 만들다니. 아무래도, 루시를 향한 라르트 황자의 마음이 생각보다 깊은 모양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블론디나가 더러워진 치맛단을 툭툭 털었다.

“산딸기나 따러 가자, 루시.”

차가워진 루시의 손을 마주 잡고 슬쩍 끌어당겼다. 입만 뻐금거리는 멍청이는 내버려 두고 안쪽으로 더 들어갈 생각이었다.

라르트를 힐끗 돌아보며 심드렁히 제의했다.

“따라올 거면 오고, 아니면 잘 가.”

라르트는 굳은 몸을 움직여 성큼 다가왔다.

“나도, 나도 갈래!”

“그럼 사과부터 먼저 해봐.”

“뭐?”

기회였다. 오만한 망아지에게서 절 무시한 사과를 받아 낼. 제 말에는 눈 하나 꿈쩍도 하지 않는 이였기에 더욱 이 기회를 이용하고 싶었다.

라르트는 눈만 끔뻑일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자존심상 사과하지 않을 심산 같았다.

블론디나는 그대로 등 돌렸다. 애초에 기대는 크게 하지 않았다. 사과를 받지 못했다 하여 기분이 상할 리 없다.

콧노래를 부르며 루시와 함께 걸어가는데 등 뒤로 라르트의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꽂혀 왔다.

“……미안해.”

“뭐라고?”

치솟아 오르는 입꼬리를 누르며 뒤돌았다. 벌겋게 달아오른 라르트의 얼굴이 보였다.

“미안하다고.”

“나 무시하고 막말한 거 사과하는 거 맞지?”

라르트는 대꾸 대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세상에. 루시랑 저리 같이 가고 싶을까. 저 자존심 강한 황자 전하께서. 이젠 신기할 지경이다.

블론디나는 결국 픽, 웃고는 휙휙 손짓했다.

“진작 이러면 좀 좋아. 그럼 얼른 와서 바구니 좀 들어 줘.”

라르트 황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녹슨 양철 깡통처럼 삐걱삐걱 걸어와서는 바구니는 건네받았다.

걷는 걸음마다 블론디나의 미소가 따라붙었다. 라르트는 그리 유쾌하지는 않은지 입만 삐죽 내밀고 있었는데 이젠 그 모습마저 귀여워 보일 지경이다.

참 솔직하기도 하지.

얼마나 걸었을까. 허리까지 올라오던 수풀을 지나 오솔길을 걸어가다 보니 작은 나무들이 서로 몸을 기대고 서 있는 길목에 들어섰다.

“그런데 이렇게 깊이 들어가도 돼? 원래라면 숲 경계선까지 다가서는 것도 위험한데.”

라르트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음…… 원래는 안 되는데, 에이몬이 산딸기 있는 데까지는 괜찮다고 했어.”

신수의 숲 전체를 드나드는 건 무리지만 산딸기 숲까지는 괜찮다고 에이몬이 말했었다. 산딸기 숲으로 향하는 길목과 숲에 에이몬이 발톱 자국으로 영역표시를 해놓았기 때문이다.

미친 짐승이 아닌 이상에야, 신수의 경고를 무시할 수 있을 리 없다. 지금 이 길은 황궁 정원보다 안전하다 해도 무방했다.

“어때? 맛있지?”

“뭐, 나쁘진 않네.”

라르트가 산딸기를 우물거리며 답했다.

“맛있으면 맛있다고 해. 괜히 툴툴거리지 말고.”

블론디나는 마치 성질 고약한 어린아이를 달래듯 말했다.

라르트는 뒷짐 진 채 산딸기 숲을 거닐다가 몰래 눈치를 살피고는 커다란 산딸기 하나를 따 먹었다.

후식 푸딩이나 장식용으로 올라온 것만 먹었지, 이렇게 직접 따먹는 건 처음이다. 그래서인지 톡톡 터지는 맛이 상큼한 게 꽤 괜찮은 것 같았다.

힐끔힐끔 주위를 살피며 열매를 따 먹는 황자를 보며, 블론디나는 옅게 웃었다. 아무튼, 귀엽기는.

라르트는 나뭇잎을 헤쳐 가장 큰 산딸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다 그만 삐죽 나온 가시에 손등을 긁히고야 말았다. 아주 자그마한 상처였다.

“피! 피가 나!”

하지만 그는 핏방울 맺힌 손을 붙잡고는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어 댔다.

피가 나! 고귀한 황족의 몸에 상처가 생겼다고!

라르트는 손을 붙잡고 피를 억지로 쥐어짰다. 그런 후 얼른 알아 달라는 듯 블론디나와 루시를 응시했다. 어서 이 사태의 위험성과 긴박함을 알아 달라는 신호였다.

“호들갑 좀 떨지 마, 라르트.”

블론디나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깜짝 놀란 루시가 다급히 라르트에게 다가갔다. 바구니에서 손수건을 꺼낸 그녀가 라르트의 손끝을 꽉 눌렀다.

“황자 전하. 상처를 누르고 계셔요. 피가 멎을 거예요.”

처치할 만큼 큰 상처도 아닌데. 블론디나는 일순 비웃고 싶었으나 라르트의 표정을 보고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라르트는 제 손을 붙잡은 루시를 내려다보며 부끄러움으로 벌게진 얼굴로 콧김만 흥흥 내뿜고 있었다.

‘와, 정말 못 볼 꼴…….’

블론디나마저 입을 꾹 다물자 숲 안이 일순 적막에 감겼다.

블론디나는 멀뚱히 서서 둘을 응시했고, 루시는 라르트의 손을 붙들고 있었으며, 라르트는 부끄러운지 눈만 굴렸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땅을 휘돌았다. 블론디나는 문득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런데 지금 좀 이상하지 않아?”

숲이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바람결에 풀 흔들리는 소리만 들릴 뿐 그 흔한 산새 소리, 풀벌레 소리조차 없었다.

오싹한 적막이었다.

숲 저 너머, 석양 그림자가 뒤덮은 하늘 아래 에이몬이 지금 막 성체가 됐다. 그 기운에 숲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나무 위를 오가는 날짐승마저 숨을 죽일 정도로.

적막이 숲을 에워싸고 두려움이 첩첩이 덮였다. 짐승만큼 예민하지 않은 블론디나 일행만이 묵직한 기운을 느끼지 못할 뿐.

하지만 아무리 감각이 무디다고 하더라도 지금 숲이 평소와 무척 다르다는 건 알아챌 수 있었다.

숲 끄트머리가 석양빛에 젖었다. 셋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별다른 건 없었다. 한데 왠지 모르게 어깨 위로 으슬으슬 한기가 맺혔다.

“그러게. 뭐가 이상한지 모르겠는데 뭔가 이상하기는 하네.”

“너무 조용해요.”

라르트 황자와 루시도 조용히 중얼거렸다.

블론디나는 숄을 펼쳐 어깨에 두르고 바구니를 단단히 붙들었다.

“이만 가자.”

“그래.”

“네, 황녀님.”

셋은 이유 모를 초조함을 느끼며 발을 움직였다. 해가 지기 전에 이 선득한 공간을 벗어나야만 했다.

나뭇잎을 바작바작 밟는 셋은 말이 없었다. 숙제하듯 걸음을 옮겼을 뿐.

하지만 나아가면 갈수록 무언가 이상했다.

“……길이 이상해.”

블론디나가 불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른 인간은 접근하지 못하지만, 블론디나와 루시는 나름대로 자주 왔던 장소였다. 분명 아는 길이 맞았다. 아는 길이었다. 한데 걸으면 걸을수록 알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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