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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37화 (37/121)

# 37

#37화

자연스럽게 그녀의 얼굴 이곳저곳을 살피는 그는, 제 자식을 걱정하는 아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신수 놈들이 무례하게 굴지는 않더냐.”

황제는 블론디나의 고개를 왼편으로 돌리며 뺨을 훑고, 오른편으로 돌리며 눈가를 들여다보았다.

“예. 진정으로 환영해 주었습니다.”

그녀의 뺨은 상처 하나 없이 매끄럽게 빛났다. 블론디나의 무사함을 확인한 황제가 손을 뗀 후 몸을 물렸다.

그의 푸른 눈이, 어느새 훌쩍 커버린 딸아이를 훑었다. 탐스러운 금발과 찬란히 빛나는 눈동자. 살짝 다물고 있는 입술이 마치 탐스럽게 핀 붉은 장미와 닮았다.

그리고 까마득히 멀어진 제 옛 연인과도.

“갈수록 닮아 가는군.”

“예?”

황제는 대답 대신 자조적으로 웃더니 블론디나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블론디나는 인파에 섞인 아비를 바라보다가 허리 숙여 늦은 인사를 보냈다.

그 모습을 아델라이 황녀는 잠긴 눈으로 응시했다.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아버지, 황제가 블론디나에게 보이는 애정이 심상치 않다. 다정한 손길과 눈빛, 그건 모두 제 차지였거늘 어째서 저런 반푼이 황녀와 나누어야 하는 건지.

망막에 치졸한 질투와 분노가 단단히 박혔다.

‘권력도, 아버지의 애정도 네까짓 거와 나눌 생각 없어.’

음험한 속내와 달리 얼굴은 사랑스러운 미소를 발그스레 올린 채였다.

파티가 끝난 이후, 블론디나는 별궁을 향해 곧장 귀가했다.

하녀가 미리 받아 놓은 뜨거운 물로 몸을 씻은 후, 덜 마른 머리카락을 침대 밖으로 늘이며 창밖을 응시했다.

온몸의 신경을 타인에게 쏟아서일까. 의식적으로 계속 미소 짓고 있어야 하는 사교 모임은 늘 심신에 고단함을 몰고 왔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창문 뒤, 새까만 하늘 위로 점점이 별이 박혀 있다. 희미하게 빛나는 별이 얇게 깔린 구름 뒤로 호롱호롱 빛을 발했다.

문득 에이몬이 떠올랐다. 이유 같은 건 없었다. 내 귀여운 표범을 앞으로 한 달이나 보지 못한다니. 라르트에게서 신수 이야기를 들으니 더욱 보고 싶어졌다.

문득, 모른 척 흘려들었던 귀족들의 대화가 떠올랐다.

“의식제가 끝났으니 이제 곧 신수의 수장을 뽑겠군요?”

“그러게요. 수장 후보가 세 마리라고 들은 것 같은데……. 맞나요, 블론디나 황녀님?”

절 향한 질문에 블론디나는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었다.

블론디나가 의식제에 참여했던 이후, 신수를 가장 잘 아는 건 그녀이리라고 모두 암암리에 인정하고 있는 터였다.

이후로도 그들의 대화는 계속됐었다.

“수장은 어떤 방식으로 뽑는 거지요? 역시 결투인가요?”

“그렇다고 하네요. 한쪽 숨이 끊어질 때까지 싸우는 거라고는 들었는데…….”

“숨이 끊어질 때까지? 아휴, 무서워라.”

블론디나는 후작 부인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며 침대 왼편으로 풀썩 돌아 누웠다.

숨이 끊어질 때까지 싸운다…….

물론 에이몬이 설명해 준 바로는 그렇지 않았다. 이전엔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상대가 항복하면 그대로 끝이라고 에이몬은 대수롭지 않게 말해 주었다.

그러면서, 본능이 억눌러지지 않아 피를 볼 수도 있으리라는 말도 덧붙이기는 했다. 그래도 죽지는 않는다며.

“내가 제일 세, 브리디. 걱정하지 마.”

자신만만한 에이몬을 보며, 블론디나는 차마 마주 웃지 못했다.

에이몬이 다치면 어떡하지. 작고 귀여운 내 에이몬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걱정이 순간순간 쌓여 차곡차곡 지층이 됐다.

블론디나는 한숨을 내쉬며 베개를 꼭 끌어안았다.

시간이 어서 흘러갔으면 좋겠다. 어서 빨리 에이몬이 톡 뛰어 들어와 내가 이겼다며, 멀쩡하다며 의기양양한 모습을 보여 주었으면 좋겠다.

“내 고양이 다치면 안 되는데…….”

블론디나는 달을 바라보며 기도하듯 중얼거렸다. 불안하게 뛰어 대는 심장은 한동안 조용해질 줄을 몰랐다.

***

숲은 적막했다. 어둑한 하늘 위, 잿빛 구름이 하늘을 뒤덮어 달과 별마저 빛을 숨긴 밤이었다.

갓 성체가 된 할라는 생명의 샘 근처에 웅크리고 앉아 어둠을 응시했다.

곧 샨티가 성체가 된다. 그렇다면 수장을 가리기 위한 결투가 시작될 것이다.

물기를 머금은 공기가 음산했다. 바람결에 나뭇가지가 얽히는 소리가 울려 왔다.

참방-. 무언가가 생명의 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할라는 긴장한 얼굴로 샘을 주시했다. 이제 막 성체가 된 샨티가 갈색 털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차박차박 걸어오고 있었다.

‘샨티마저 성체가 되었으니 이제 곧…….’

할라의 심장이 더욱 거세게 뛰었다.

에이몬의 성장 이후, 갈무리되지 않은 힘이 숲을 암막처럼 덮었다.

짐승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공포가 숲을 단단히 에워쌌다. 그 공기가 제 몸을 묵직하게 짓누르고 있음을, 할라는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갓 성체가 된 신수는 대개 본능을 제어하기가 힘들다. 지금의 할라가 그랬으며 에이몬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마 에이몬은 피에 도는 흥분을 간신히 내리누르며 숲 안에 몸을 웅크리고 있겠지.

‘의미 없는 싸움일 거야.’

어차피 빤히 정해진 결과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싸워야 했으며 수장을 뽑아야만 했다. 그것이 과거로부터 이어진 그들의 전통이었다.

웅크린 할라 근처로 어느새 샨티가 가까이 다가섰다. 둘은 서로의 성장을 축하한다는 간단한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다. 묵묵히 절 둘러싼 숲을 응시할 따름이다.

무언가 다가오고 있었다. 차가운 한기가 등을 훑고 지나갔다. 바람에 실려온 내음에 폭력적인 광기가 실려 있는 것만 같다.

침묵이 내려앉은 숲에는 그 흔한 풀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툭. 바닥에 깔린 나뭇가지 밟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마저 내지 않고 걷는 상대가, 의도적으로 알려 주는 자신의 접근이었다.

크르르릉……. 숲을 헤치고 다가오는 짐승의 소리가 들려왔다.

할라와 샨티의 동공이 섬뜩하게 확장됐다. 본능적인 공포에 기인한 반응이었다.

밤을 헤치고 무언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에 파묻힌 듯한 거대한 몸, 시리게 번뜩이는 보랏빛 눈동자가 짙은 암흑을 뚫고 번뜩거렸다.

할라와 샨티는 비죽비죽 털이 오싹하게 솟은 몸을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피 안에 명령이 돌고 있었다.

숨어. 피해.

애초에 짐승은 본능적인지라 저보다 강한 상대를 마주하면 굴복해야만 한다. 도망 역시 수치가 아니었다. 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싸워야겠지.’

먼저 정신을 차린 건 할라였다.

느릿느릿 다가오는 거대한 짐승을 노려보며, 할라는 힘겸게 몸을 일으켰다. 마치 공포가 제 몸을 마구잡이로 짓누르는 것 같았다.

‘나는 신수야.’

나는 짐승이 아니다. 무릇 피해 마땅할 상대를, 네 다리로 꼿꼿이 일어서 주시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자신은 짐승이 아닌 신수였다. 오랜 기간 내려오는 전통을 이어야만 한다.

샨티 역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낮은 호흡이 바닥에 깔리고 있었다.

두 점박이 표범은 숲을 등진 생명체를 두렵게 응시했다. 아무런 감정 없이 자신들을 고요히 바라보는 거대한 흑표범, 에이몬을.

갈색 표범 두 마리는 내면의 두려움을 밟고 에이몬을 향해 달려들었다.

푸드드득! 새들이 어둑한 하늘 위로 바쁘게 날아올랐다. 본능적으로 달아나는 날갯짓에 두려움이 가득 배어 있었다.

새로운 지배자를 뽑기 위하여 이제 막 결투가 시작된 참이었다.

***

그로부터 몇 시간 전.

양탄자 위에 늘어져 있던 블론디나가 슬그머니 상체를 일으켰다. 머리맡에 있던 상자에서 오르골 선율이 청명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루시.”

“네, 황녀님. 심심하세요?”

그저 이름 하나 불렀을 뿐인데 꼭 그녀 마음을 들여다본 것처럼 루시는 답했다.

블론디나는 최근 누워만 있었다. 에이몬을 향한 걱정으로 도무지 일상에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수를 놓으면 실이 엉키고 체스를 두면 내리 지기만 했다. 식사하다 말고 움직임을 멈춘 것도 몇 번이다.

블론디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루시. 신수의 숲에 다녀오자.”

“숲에요?”

“응. 가서 버섯 좀 따고 산딸기도 먹자.”

머리가 복잡할 때는 육체노동이 최고다. 기왕이면 접시를 닦거나 밭을 갈고 싶은데 명색이 황녀라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었다.

옷 시중을 들겠다는 루시를 말리고는 창문 밖을 응시했다. 불타오르는 해가 하늘 위에 비스듬하게 걸려 있었다.

아마 서너 시간 정도 후에 해가 질 것이다. 딸기나 실컷 따먹고 석양이 깔리기 전에 돌아와야지.

단순한 감색 드레스를 차려입고 기지개를 한번 켰다. 바구니를 든 루시가 담요를 곱게 접어 팔에 걸친 채 절 기다리고 있었다.

블론디나는 곧 루시와 손을 맞잡고 별궁을 나섰다. 하지만 화단을 돌아 나서기도 전에 누군가를 맞닥뜨렸다.

“어? 여기는 무슨 일이야, 라르트?”

라르트 황자였다.

라르트는 뒷짐을 진 채 생각에 잠긴 얼굴로 장미 덩굴 앞을 서성이다가 블론디나가 절 불러 오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뭐야. 어디 가?”

“루시랑 숲에.”

루시와 맞잡은 손을 들어 올리며 블론디나가 답했다.

“둘이? 호위 기사도 없이?”

“난 원래 호위 기사 없어. 외출 시에만 폐하께서 붙여 주시잖아.”

블론디나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애초에 황궁에만 콕 박혀 있다시피 하니 호위 기사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함께 있는 이는 늘 루시, 혹은 하녀와 시종들뿐. 황궁 안을 오갈 땐 지금처럼 루시와 단둘이 이동하고는 했다.

“숲은 왜?”

“버섯 따고 산딸기 먹으러.”

텅 빈 바구니를 응시하던 라르트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둘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루시는 그제야 기회를 잡아 라르트 황자를 향해 허리 숙였다.

“제국의 고귀한 별,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래, 루시.”

루시의 시선이 닿자 라르트 황자는 그답지 않게 귓가를 붉혔다. 누구보다 오만하고 당당한 황자의 낯에 드러난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그 모습을 힐끗 보며 블론디나는 한쪽 눈썹을 올렸다가 내렸다.

‘그러고 보니 이 근처에 너무나 자주 오더라니.’

최근, 라르트 황자의 거동이 수상했다. 자꾸만 별궁 근처를 휘휘 도는 것이다.

승마 연습을 한답시고 사냥터에 왔다가 괜히 들러 차를 마시고 가기도 했고, 호위 기사도 없이 와서 얼쩡거리다가 쿠키 상자를 건넨 후 돌아간 적도 있었다.

‘루시가 마음에 들었나 봐.’

일련의 수상한 태도가 아마 루시 때문이라고 블론디나는 확신했다.

‘하긴, 루시는 다정하고 착하니까.’

루시의 미소를 마주하노라면 주위가 환한 빛으로 가득 차는 것만 같다고, 블론디나는 늘 생각했다.

그 때문에 라르트 황자의 마음이 이해 가지 않는 건 아니다.

몇 달 전, 라르트 황자가 사냥터에서 홀로 말을 탔던 적이 있었다. 일전에 귀족들과 숲속 승마를 즐기던 중 그만 쓰러진 나무 기둥을 뛰어넘지 못해 수치스러웠던 탓이다.

사냥터에 장애물을 세워 놓고 며칠 동안이나 훈련을 했다.

호위 기사도, 시종도 없었다. 홀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거니와, 사냥터가 바로 신수의 숲 근처라 위험할 것 역시 없었다.

제정신 박힌 인간이라면 감히 신수의 숲 근처에 다가서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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