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36화
수도로 통하는 자그마한 길 주변은 자작나무가 주욱 이어져 있었다.
길게 드리운 나뭇가지가 만든 푸른 동굴을 지나며, 에이몬이 말했다.
「브리디. 우리 당분간은 못 만나.」
“왜? 어디 가?”
「어디 가는 건 아니고, 할 일이 있어서.」
“얼마나? 얼마나 못 보는데?”
에이몬은 일정을 가늠해 보려는지 머리 위 구름을 가만히 응시했다.
「한 달 정도?」
블론디나는 무슨 일이냐고는 묻지 않았다. 기실 이미 알고 있었다.
에이몬. 그리고 에이몬과 함께 의식제를 치른 샨티와 할라는 이제 곧 성체로 변할 것이다. 성체가 되면 새로운 수장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서로의 살을 찢고 싸우게 되겠지.
속을 맴도는 걱정을 누르며, 블론디나는 고삐만 꼭 부여잡았다. 제 눈앞의 작은 표범은 저렇게 태평한데 왜 이렇게 속이 심란한지 모르겠다.
서로 죽이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혹여 그가 다치게 될까 봐.
황궁의 정문을 통해 들어오는 대신 외곽을 빙 돌아 신수의 숲을 가로질렀다. 숲과 통하는 황실 사냥터로 들어와 그림자처럼 은밀히 잠입하기 위함이었다.
블론디나의 외출 명분은 우선 ‘신수 의식제 참여’였다. 그렇기에 정문을 통해 들어오면 이것저것 불필요한 질문이 꼬리처럼 귀찮게 따라올 게 뻔했다. 그 사태를 피하고 싶었다.
사냥터 끄트머리에 도착하자 블론디나는 데이지의 등에서 풀쩍 내려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잘 가, 데이지. 태워 줘서 고마웠어.”
하얀 갈기를 쓰다듬자 왠지 모를 서운함이 밀려왔다. 그래도 같이 다니면서 꽤 친해졌는데.
히힝. 데이지는 앞발로 땅을 탁탁 두드리며 화답했다. 커다란 눈망울 속에 아쉬움이 다소 배어 있었다. 짧은 만남이었으나 데이지 역시 나름대로 정들었던 탓이다.
블론디나가 저 멀리 보이는 첨탑을 가리키며 말했다.
“데이지. 저 건물 보이지? 난 저기 별궁 살아. 심심하면 놀러 와.”
그 말에 데이지는 블론디나의 손바닥에 제 콧잔등을 비볐다. 푸륵푸륵, 콧김이 간지러워 블론디나는 작게 웃었다.
동시에 에이몬의 표정은 더러워졌다. 절절한 둘의 작별인사를 보고 있자니 언짢아지는 모양이다.
사박사박. 데이지의 몸통 위를 가로지르며 에이몬이 다가왔다. 그런 후 데이지의 귓가에 아주 작게 속살거렸다.
「오지 마.」
데이지는 안 들리는 척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데이지는 들판 너머로 사라졌다. 꿈틀거리는 단단한 근육이 힘차게 도약한다.
블론디나는 질주하는 데이지를 향해 손을 힘껏 흔들다가, 들판 뒤로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그제야 손을 내렸다.
처음에는 그 체구 때문인지 무섭게까지 느껴지는 흰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멋지고 귀엽게만 느껴지다니……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노르디와의 일을 마무리 지어서일까.
흙 묻은 신발을 톡톡 털며 고개를 돌리자, 낙엽 위에 반쯤 파묻혀 꼬리를 살랑이는 에이몬이 보였다.
“오늘은 별궁에서 자고 갈래? 당분간 못 본다며.”
「아니. 더 이상의 고문은 사양이야.」
에이몬이 괜히 낙엽을 짓이기며 툴툴거렸다.
그가 말하는 ‘고문’이 뭔지 잘 모르겠으나 우선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여기서 헤어지면 한 달은 못 본다는 거지?’
에이몬과의 짧은 이별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고작 한 달 떨어지는 건데 왜 이렇게 속상한지 모르겠다.
안녕, 이란 말을 하기 아쉬워 구두 앞코로 낙엽만 들췄다.
낙엽 속에서 뒹굴던 에이몬이 블론디나를 향해 다가왔다. 까만 털 위에 낙엽 부스러기가 멋대로 붙어 있었다.
허리 숙여 그의 몸을 톡톡 털어 주며, 블론디나가 비로소 마지막 말을 전했다.
“가려고?”
「응. 해야 할 일도 있고.」
“응, 알겠어. 좀 아쉽다.”
에이몬은 제 털을 쓰다듬는 블론디나의 손길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왔다.
「곧 찾아올 테니 기다려.」
그의 꼬리가 곧 블론디나의 종아리를 휘감았다.
「다시 올 땐 이 모습이 아닐 거야.」
살갗에 닿는 털이 사뭇 부드러웠다.
그 인사가 끝이었다. 블론디나가 대답할 기회조차 없었다. 에이몬은 미련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모습으로 숲으로 사라져 갔다.
저 멀리, 풀 흔들리는 소리만이 고요히 남았다.
“잘 가.”
블론디나는 이미 보이지도 않는 에이몬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길 위에 올라온 낙엽을 가만히 주시했다. 그의 털에 붙어 있던 것.
“고마워, 에이몬.”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여운처럼 잦아들었다.
***
황궁으로 돌아온 다음 날, 바로 티파티에 초청됐다.
특별한 행사는 아니었다. 아름답게 피어난 튤립을 보며 제국의 찬란함을 누리자며 모인 것이었다.
“안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황녀님.”
후원에 들어서자 익숙한 이들이 보였다. 제 가족들과 몇몇 고위 황족이었다. 블론디나는 그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간 후 황제를 향해 예를 보였다.
아델라이 황녀와 라르트 황자를 향한 인사는 그다음, 고위 귀족을 향한 인사는 맨 끝이었다.
블론디나로서는 그다지 즐겁지 않을 티파티의 시작이었다.
“그래. 의식제 참관은 어떠했는가.”
블론디나의 찻잔에 손수 차를 따라 주며 황제가 물었다. 블론디나는 웃는 얼굴로 낭랑히 답했다.
“신비로운 경험이었습니다.”
“한데 무얼 그리 오래 하더냐. 그 짐승들에게 네 안부를 물을 수도 없으니 퍽 답답하더군. 무섭지는 않더냐.”
황제의 어조에 담긴 걱정은 진심이었다.
언젠가부터 그랬다. 처음엔 의식적인 호의를 베풀더니 어느새 진짜 딸을 대하듯 다정해졌다.
물론 라르트 황자와 아델라이 황녀를 향한 애정만큼은 아니겠으나 적어도 그의 얼굴에 스며 있던 일말의 냉랭함은 그 찬기를 풀어낸 지 오래였다.
“무섭지 않았다 하면 거짓이겠지요. 하지만 신수께서 배려해 주셔서 괜찮았습니다.”
사실 신수의 숲에 있던 건 단 며칠. 그 뒤에는 에이몬, 데이지와 함께 여행 같은 복수를 하고 온 참이었다.
하지만 그 일을 황제에게 말할 생각은 없었다.
아직 에이몬과의 관계를 밝히고 싶지 않았거니와 제 트라우마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 역시 없었다.
짧은 안부 인사를 끝으로 다른 화두가 던져졌다. 다가오는 사냥대회나 새로 주문한 조각상에 대한 이야기들.
블론디나는 이야기를 대충 흘려들으며 나긋하고도 우아하게 응수했다.
차를 다 마시고 나서는 삼삼오오 모여 튤립 화단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블론디나는 황제 가족과 멀찍이 떨어져 꽃을 구경하는 척 외곽을 거닐었다. 그들과 무의미한 미소를 나누느니 차라리 혼자 있는 편이 낫다.
황제 일행에 껴 있던 라르트가 주위 눈치를 슬슬 살폈다. 그런 후 곧 블론디나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봐. 블론디나.”
언제나 그랬듯 돌멩이 던지듯 툭 날리는 인사였다.
“응, 라르트. 오래간만이야.”
“무슨, 오래간만. 몇 달 된 것도 아닌데.”
퉁명스러운 라르트의 답에 블론디나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어깨를 작게 으쓱였을 뿐이다. 무시 섞인 그의 말투에 익숙해진 지 오래, 이젠 그냥 가볍게 화답할 수 있었다.
라르트가 아델라이 황녀를 힐끔 돌아보더니 상체를 슬쩍 기울여 속닥거려 왔다.
“있잖아. 의식제는 어땠어? 신수는 몇이나 있어? 그들이 널 보고 침 안 흘려? 어쨌든 짐승이잖아.”
어지간히도 궁금했던 모양이다. 뒷짐 진 그가 계속 따라붙으며 질문을 늘어놓았다.
블론디나가 픽 웃음을 흘렸다. 신수의 숲은 예로부터 인간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비밀스러웠기에 더욱 신비로운 장소였다.
그 때문에 늘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하고는 했는데, 라르트 역시 흥미를 느끼는 건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신수가 한 서른 마리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정확히 세어 보지는 않았어. 날 보고 침은 안 흘렸고. 오히려 정중했지. 그들은 그냥 짐승이 아니라 신수니까.”
“그래? 신수 성체가 바위만 하다는 게 사실이야? 실제로 그렇게 커?”
질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현재 신수와 황족의 교류는 없었다. 1년에 한 번 만나 형식적인 만남을 가질 뿐,
그 외 소통 창구는 단단히 닫힌 지 오래였다. 황제조차 인간형이 아닌 신수 성체를 본 적 없을 정도였다.
라르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어린 시절 에이몬을 마주친 적이 있으나, 어디까지나 작은 표범이었을 뿐. 성체는 책이나 조각상으로만 그 모습을 접한 게 다였다.
블론디나가 심드렁히 말했다.
“실제로는 정말 크지. 대장로라는 신수는 우리가 보아 온 신수 조각상보다 컸어.”
“사실 나도 신수의 숲에 가보고 싶었거든. 그런데 왜 너만 초청받은 거지? 내가 황자이자 후계자니까 날 초청해야지 왜 하필 반쪽만 황족인 널 초청한 거냐고. 격이 안 맞잖아?”
블론디나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어느 정도 돌려 말해야 할 말이 생기지…… 절 향한 멸시가 무식할 정도로 직접적이라 차마 말도 못 얹겠다.
하기야 애초에 이런 인물이다. 더욱 놀라운 건, 저 발언이 저의 하나 없이 순수함으로만 이루어졌다는 사실이었다.
비하의 의미조차 아니었다. 진정으로 ‘반쪽만 황족’이라 생각하기에 그것을 가감 없이 입에 올렸을 뿐이다.
하지만 저런 말을 툭툭 내뱉음에도, 황족 중 가장 상대하기 편한 건 라르트였다.
그는 오만하고 건방지며 무례했다. 그러나 동시에 순수했다. 대놓고 욕할지언정 빈정거리지는 않았다. 비꼬는 것조차 늘 직설적인 황자였다.
돌려 경멸하는 아델라이 황녀보다, 라르트처럼 제 속내를 송곳같이 드러내는 편이 차라리 나았다.
“나를 왜 초청했냐고? 신수가 내 친구니까 그렇지. 라르트. 너도 만나 봤잖아, 작은 짐승에게 깔려 엉엉 울어 놓고 뭘 모른 척이야?”
“…….”
라르트 황자는 다짜고짜 들어오는 치욕스러운 과거에 입술을 짓이겨 물었다. 잊은 적 없는 수치였다. 의도적으로 절대 꺼내지 않는 이야기.
에이몬과 블론디나 사이의 친분을 라르트 황자와 아델라이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진실을 화두에 올리지 않는 이유는, ‘신수의 비호를 받는 블론디나’를 공개적으로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세에 득 될 것이 하나 없었으니까.
“튤립은 꽃잎이 몇 장일까…….”
라르트는 억지로 화제를 돌리려 중얼중얼 쓸데없는 말을 나열했다. 그러다가 곧 민망한지 자리를 훌쩍 떠났고 그 옆을 공교롭게도 황제가 채웠다.
“폐하.”
블론디나는 황제를 향해 다시 인사를 전했다.
젊었던 황제는 시간이 지나 중년에 들어섰다. 하나 주름 하나 없는 특유의 나른한 얼굴은 아직도 아름다웠다.
황제가 느릿하게 손을 뻗어 블론디나의 턱을 잡아 들어 올렸다.